409화
그저 추측만으로 오우치 가문에서 조선을 공격했다고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다. 뭔가 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기 전에는 속단하기는 이르다.
‘바보가 아니면 그들이 함부로 조선을 공격할 이유가 없어.’
오우치 가문은 자신이 발행한 주인장을 가지고 조선, 남경, 대진국과 교역하고 있으니 조선을 공격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아니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혹시 동왜의 영주들이 오우치 가문과 자신과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어떤 증거를 남길 수도 있었다.
‘자세하게 알아 봐야 될 것 같군.’
어차피 왜로 가기는 해야 되니 가게 되면 자신이 직접 알아 볼 생각이다. 정확하지 않은 첩보 수준으로 오우치 가문을 단죄할 수는 없었다.
황후로 월녀를 받아들이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주변에서 부하들이 뭐라 말하던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아직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이해하는 정도로 끝내자고.’
세상의 여자들이 모두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모두 아내로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그런 경우에 해당되지는 않지만 가정사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월녀의 진짜 마음도 잘 모르면서 함부로 단정해서도 안 돼.’
의남매라는 사이란 본시 아주 애매모호하다. 과한 우애를 옆에서 지켜보면 그것을 연정으로 아는 경우가 많다. 또한 본인들 스스로 큰 착각에 빠지는 수도 있었다. 그러니 모든 것을 함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본래 여동생으로 생각하던 처지로 부하들이 권한다고 해서 덥석 따르고 싶지도 않았다. 또한 큰 나라를 다스리는 태왕의 몸으로 그리해서도 안 된다.
‘부하들 생각은 생각이고 나야 달리 행동하면 돼.’
궁녀나 또는 유구 공주에 대해서도 마찬 가지다. 약간은 미온적인 태도 때문에 다소 흐리멍덩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 문제로 복잡해지기는 싫었다.
‘세상사는 모르는 법이니 일단 가능성만 열어두고 지내다 보면 결론이 나겠지.’
언제 부터인지 모르지만 최인범은 자신의 깊은 속을 외부로 잘 표출하지 않았다. 아마도 여러 번 암살 음모가 진행되는 과정 중에 몸조심하다 보니 생긴 습성 같았다.
이지함은 조선에서 자신이 취한 조치에 대해 말했다.
“폐하, 우선 전라도 쪽에 있는 수군을 서쪽으로 이동시키고 경상도 수군을 강원도 쪽으로 배치해 놓았습니다.”
“알았소. 일단 여기서는 어떻게 처리할 수 없으니 짐이 하카타로 가서 결정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일단 급한 내용을 보고하고 나서 명나라의 북경 소식에 대해서도 보고했다. 북경은 알탄 칸이 여전히 거용관에 포진해 계속해서 포격전만 벌이고 있었다.
“몽골이 그런 정도의 화약을 보유하고 있나요?”
“폐하, 저희가 양쪽에 모두 화약과 무기를 계속 판매하고 있사옵니다.”
“뭐요? 그것을 상대방들이 서로 모른다는 거요?”
“넷!”
자신이 지시한 일이지만 금방 들통이 날 일인데 아직도 쌍방이 모르고 있다니 이상했다. 그게 아니면 두 진영 모두 뒤로 물러서기가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해 어쩔 수 없어 소모전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훤하게 드러난 사실도 정황이 그리 돌아가면 싫어도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직은 국가정보원장이 특별히 연락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모든 것은 표면에 나타나는 것과 다를 수 있었다.
이지함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조선의 군대를 앞으로 어떻게 관리하느냐 때문이다. 외교권이야 아직 타국과 교류해야 할 절박한 상황도 아니라 조선을 별로 상관없었다. 그러나 군사권은 당장 왜구의 침입을 받고 있으니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폐하, 조선의 군대는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요?”
“왜로 가서 짐이 직접 해결할 것이니 조선 군대에 대해 어떤 조치도 내리지 마시오.”
“넷!”
이런 대화를 나누고 나자 이지함은 매우 곤욕스럽고 황당한 표정으로 서찰을 슬며시 내밀었다.
“폐하, 인종께서 승하하시기 전에 폐하께 전하라고 남긴 유언장이옵니다.”
“뭐라?”
“쓰기는 오래 전에 썼지만 아마도 내용이 너무 중요해 늦게 전하는 것 같사옵니다. 폐하만 읽으시고 반듯이 내용과 같이 해달라고 부탁했사옵니다.”
두툼한 서찰은 겉에 옥쇄도 찍어 놓아 단단히 밀봉했다. 인종이 남에게 해서는 안 되는 속마음을 적은 유언장이라 최인범은 따로 떨어져 서찰을 읽었다.
서찰의 내용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깊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특히 어린 아들에 대한 걱정과 젊은 나이로 과부가 될 민비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어미 없이 자란 자신을 돌봐준 윤 대비에 대한 고마움도 적혀 있었다.
‘흠! 천성이 너무 착해서 결국 그 때문에 일찍 죽은 거야.’
앞으로 자신의 뒤를 이어 조선을 잘 다스려 백성들이 평안하게 잘 살게 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 유언의 내용은 조선의 왕위를 윤 대비 소생인 경원 대군이 아닌 최인범에게 넘긴 것이다.
‘인종이 복선을 깔아 버렸어.’
민비를 후궁으로 받아주고 정강 대군을 양자로 받아들여서 그저 평범하게 살게 해달라고 간곡하고 애절하게 부탁했다. 군왕이란 자리는 영광스럽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삶을 박탈당하니 결코 행복하다고 볼 수 없다고 평했다. 그러니 자신의 아들을 남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예우만 받으며 살게 해달라고 여러 번이나 강조했다.
“흠! 월녀를 이씨로 만들어 버렸어.”
인종은 최월녀를 자신의 양녀인 공주로 만들어 성을 이씨로 바꾸어 버렸다. 조선에서 노비 출신이던 월녀의 과거 신분을 완전히 변화시켜 준 것이다.
최인범이 아무리 창업 군주라고 하지만 오빠가 성을 주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고 했다. 성이란 부모가 주는 것이라며 인종이 딸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 그렇게 처리해 놓았다.
‘인종이 어린 아들을 살리려고 별 짓을 다 했어.’
하긴 만고의 진리란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거야 애절하다. 더구나 자신이 단명해 죽게 되고 아들이 꼭 죽게 생기자 별 생각을 다한 것 같았다.
‘나도 나중에 자식이 생기면 이렇게 하게 될까?’
최인범은 편지를 모두 읽고 나서 이지함을 불러 명령했다.
“여기도 사단으로 바뀌고 다른 곳에도 사단장이 필요하니 28, 29, 30 사단의 사단장과 제10 군단장을 임명해 보내도록 하시오. 반드시 여진이나 조선 출신으로 결정하고.”
“넷!”
조선에 직접적으로 군사를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11, 12군단을 별도로 만들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일단 편제만 서류상으로 만들고 나중에 세부적으로 지침을 내려 처리하겠다고 했다.
결국 조선에는 2개 군단으로 총 6만명의 편제다. 그래서 3만명의 현역 군인만 두고 도에는 예비사단만 두겠다는 의도를 미리 말해준 것이다.
인종의 유언장도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조치도 내렸다.
“국방장관은 귀국하며 한양엘 들려서 민비와 정강대군을 데리고 봉황성으로 가시오. 혹시 삼년상이네 뭐네 하며 못 간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데리고 가시오.”
“넷!”
아울러 주산 담로의 총통으로 결정된 김신완을 해군 상장으로 올리고 중령이던 경호실장, 비서관들을 모두 상령으로 계급을 올리라고 지시했다.
“비공식으로 현난풍을 해군 중장으로 서류 정리를 하시오. 직책은 해외원정함대 사령관이요. 대마불은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역시 중장을 주도록 하고.”
“넷!”
“다른 세부적인 문제는 척 비서관과 만나서 내용을 자세하게 들으면 알거요.”
“알겠사옵니다.”
최인범은 이지함을 만나고 나서 월녀를 만나기 위해 부두로 향했다.
바닷가의 넓은 백사장을 거닐며 슬며시 물었다.
“월녀야, 최씨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이씨로 바꿨냐?”
“아뇨! 승하하신 주상께서 저를 만나더니 성을 바꾸라고 해서 별 생각 없이 바꾸었어요. 누가 어찌 부르던 저야 언제고 최씨 집안의 월녀인걸요.”
“그러냐?”
“오라버니, 제가 성을 바꾼 것이 싫으세요?”
“아니, 성이 바뀌니 조금 어색해서.”
두 사람은 겨울 바닷가를 천천히 거닐며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이 보낸 시간은 그리 많지 않지만 나눌 이야기는 많았다. 처음 풍기에서 만난 사람들이 지금 대진국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그들에 대한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제일 궁금한 것은 역시 풍기의 소식이다.
“풍기에는 들렸냐?”
“예, 가서 살펴보니 조갑중이 아주 잘하고 있어요. 이제 풍기는 인삼재배로 아주 잘사는 고을로 변했어요.”
“인삼은 어디서 주로 재배해?”
“풍기, 금산, 부여, 개성, 강화에서 주로 많이 하죠.”
산삼씨를 구해 삼포를 만들고 재배하는 인삼은 처음에는 산삼과 비슷하게 뿌리가 도라지처럼 매우 가늘었다. 그러나 삼포에서 재배한 인삼의 열매를 채취해 파종하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뿌리가 차츰 산삼과는 다르게 굵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호랑이는 어떻게 키운 거야?”
“죽령에 호랑이가 나타나서 착호갑사들이 그물로 포획하며 호랑이 굴에서 새끼를 잡았다고 해 제가 사서 우유 먹여 키우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큰 고양이 같아도 나중에는 위험하니 키우지 마.”
“알았어요. 나중에 크면 백두산에 풀어 놓죠.”
최인범은 월녀와 바닷가를 거닐며 대화를 나누고 보니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과거에 노비 신세이던 처지라 말을 못하고 있지만 월녀는 오라버니가 아닌 이성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월녀는 말을 못하고 혼자서 속을 끓이며 그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흠! 그래서 시집을 안가고 평생 나와 같이 산다고 했었어.’
사실 이성적인 문제는 당사자가 모르는 경우도 많다. 옆에서 지켜보는 남들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월녀가 최인범을 좋아하고 있는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표출되었다.
최인범은 남에게 시집보내기가 아까운 마음이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월녀의 혼인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자 부하들이 눈치를 채서 황후 자리를 놓고 자꾸만 월녀를 거론하게 된 것이다.
‘후우! 옛말이 하나도 다르지 않아. 남녀 간에 너무 친해 오빠 동생으로 지내다 보면 결국에는 여보 당신으로 변한다고 하더니 결국 이렇게 됐어.’
며칠을 계속해서 바닷가나 또는 주산도의 해안 도로를 돌아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최인범은 자연스럽게 한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한민옥이 지어준 보약을 먹어서 그런지 급했다. 더 이상 뒤로 미룰 상황이 아니라 혼인식도 없이 바로 동침에 들어간 것이다.
“나중에 봉황성으로 돌아가서 그때 정식으로 혼인식을 하자.”
“예.”
두 사람은 이날 이후 계속해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식사도 같이하고 항상 붙어 다니자 사람들은 모두 두 사람이 이미 부부가 됐다고 짐작했다.
“이제야 대진국에도 황후가 생겼어.”
“결국 조선 출신이 황후가 됐으니 잘 된 거야.”
이런 훈훈한 소식은 겨울의 찬바람을 타고 아주 빠르게 널리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