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개국선포와 토사구팽>
을사(乙巳) 년 1545년의 새해가 밝아왔다.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소록소록 내리고 있었다.
설날인 아침 일찍 황궁 안 동궁 뒤에서는 제례를 지내고 있었다. 전에는 조상들께 제사를 지냈지만 그런 의미는 이제 사라졌다.
태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제(天帝)의 아들이라고 점차 알게 모르게 알려졌다. 그래서 조상께 드리는 제사 대신에 천제(天際)를 지내게 되었다.
나중에 태왕이 죽은 이후에는 천제(天際)를 겸한 조상께 제사를 지내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위에 조상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조상과 하늘에 있는 천제(天帝)에게 제사를 드리는 형태다.
참석자는 각부 장관이나 차관으로 봉황성 주변에서 있는 관료들만 참석했다. 멀리 떨어진 사람은 부르려고 하자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말렸다. 제사보다는 나라의 안정이 우선이라 그들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대형 돌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제단이 특별하게 만들어졌다. 형태는 장군총으로 알려진 무덤형태인 피라미드와 비슷했다.
해가 뜨는 동시에 동쪽의 백두산을 향해 지내는 제사다. 신령스럽다는 하얀 소와 말 그리고 양을 잡아서 바치는 의식이 있었다.
“재배!”
둥둥! 삐리리 삐리!
장엄하며 웅장한 음악 소리가 나며 순서에 따라 제단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태왕이 제단 위에서 제사를 드리는 옆에는 황비로 결정된 아설화, 소피아, 주정향이 화려한 비단 옷으로 치장하고 서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한 달 뒤에 개국을 선포하게 된다. 하지만 사실 내부적으로는 오늘이 개국하고 처음 맞이하는 1주년 기념일이다.
1년 전에 이미 비사성에서 개국과 같은 천제를 지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연호를 그때부터 사용하고 있었다. 올해는 흥무(興武) 2년이 시작되는 해의 첫날이다.
“다음은 황비 마마들이 나와서 술을 올리세요.”
부인인 황비들도 술을 따라 놓고 절을 올리고 있었다. 가족이 별도로 없기도 하지만 황비들은 나름 개국에 큰 공이 있어 같이 천제를 지내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황비들이 낳게 되는 자손이 후계를 이어간다는 의미도 있었다.
제사를 지내며 읽은 축문에는 이 땅에 있었던 나라들을 열거하고 있었다. 배달, 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진(발해), 요, 금, 원, 고려를 칭하며 대진국은 그 나라들의 정통성을 이어간다고 했다.
이런 발표를 들으며 각료들은 속으로 매우 긴장했다. 원나라와 고려 그리고 한반도의 고대왕국인 삼국을 포함시킨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제단 아래서 모여 절을 하면서 작은 소리로 각료들이 대화를 나누었다.
“이거 앞으로 조용할 날이 없겠어.”
“한 달 뒤에 정식으로 선포하면 주변국들이 상당히 긴장하겠어.”
“당연하지. 당분간 외무부가 바쁘겠군.”
정통성을 이어간다는 뜻은 그 나라들이 있는 영토까지 차지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원나라를 포함시키자 더욱 그랬다.
“원을 포함시켰으니 여차하면 명나라도 복속시킬 수 있다는 뜻이야.”
“가정제가 어찌 나올지 모르겠어.”
“그렇겠지.”
사실 원나라를 포함시키자는 의견은 명나라 출신들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나라를 포함시키면 명나라 영토인 지금 대륙을 전부 지칭하게 되니 사실 자신들은 배신자가 아니게 변하기 때문이다.
고려나 한반도의 삼국을 포함시킨 이유도 조선 출신들의 요구 때문이다. 그리고 금이나 요야 본시 북방에서 발전된 나라들이니 자연히 넣게 된 것이다.
제사가 끝나고 나서 차려놓은 음식을 차일 안에서 먹으며 명나라 출신 각료들은 나름 북경으로 언제 진군하느냐를 놓고 의견들을 나누었다.
“자네 생각에 북경으로 언제쯤 갈 것 같은가?”
“아마 2년 후쯤이 되겠지. 그 때는 심양이 완전히 자리를 잡을 것 같으니까.”
“나도 그쯤이 적당하다고 보는데.”
“치열한 전쟁이 터지겠군.”
“치열하긴 군사를 일으키면 겁쟁이인 가정제는 도망치기 바쁠 거야.”
“도망을 어디로? 남쪽으로 그쪽은 때를 기다리는 헌강왕이 버티는데? 그리되면 얼씨구나 하고 잡아 죽이고 옥쇄를 차지할 건데.”
“듣고 보니 그렇군. 아무튼 가정제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되나?”
“그야 태왕의 결심에 따른 거지.”
이들은 명나라와는 전쟁을 반드시 일으킨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순탄하게 대륙의 패자가 바뀌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조선 출신인 각료들의 경우는 조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태왕 폐하께서 한양으로는 1년 이내로 내려가게 될 거야. 명나라를 치기 전에 분명히 조선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해두기가 쉬워.”
“조선 국왕이 죽으면 내려가겠지?”
“아무래도 그때가 적기라고 봐야지.”
그러나 조선 출신들은 전쟁이 아닌 뭔가 협상해서 합병하게 되길 희망하고 있었다. 이유는 조선은 대진국에서 밀고 내려갈 경우 별로 대항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알아서 처신할 거야.”
“그래도 이상한 고집을 부리면 무력을 동원해야 되겠지?”
조선도 전에 비해 경제력이 좋아지고 군대도 강해지기는 했다. 하지만 북방의 패자로 커져버린 대진국에 비하면 너무 허약해 보이는 조선이다. 더구나 대진국에서는 이미 많은 군대를 압록강 주변에 포진하고 있으니 태왕께서 명령만 내리면 쉽게 한양을 점령할 무력이 있었다.
“조선은 우리가 해군력을 동원하면 한양은 금방 점령이 가능해.”
“설마 바보들이 아니면 뭔가 절충안을 찾아보겠지.”
후궁인 진유향은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는 처지다. 그녀는 이제 이용 가치도 없고 사실상 용도 폐기된 처지다. 그녀를 부인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아패록과의 약속 때문이라 더 이상의 뭐는 없었다.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을 꿈을 노출시키다 보니 황비들은 단합해서 그녀를 완전히 내치기로 결정했다. 따로 그런 말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이심전심으로 통해 내치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가 어찌 됐는지 잘 아는 진유향은 슬며시 처소로 돌아가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아들에게나 가서 같이 살까?”
개국에 별로 도움을 주지도 못한 처지라 무슨 주장을 할 처지도 못된다. 진유향은 어느새 황궁 내에서 시녀들 사이에도 찬밥 신세로 변하고 있었다. 시녀들의 입장에서는 과부로 시집을 온 그녀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뭐 하러 저렇게 추하게 살아. 그냥 아들과 같이 살지.’
참으로 세상살이의 남녀 관계를 몰라도 너무 모르니 하는 속 편한 말이다. 이미 진짜 사내의 힘찬 맛이 들어버린 진유향은 시녀들 말처럼 살 수 없는 처지다.
‘딱 한번 만이라도 만나면 소원이 없겠어.’
세상은 이래서 항상 공평하지는 않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행복한 순간도 누구에게는 불행한 경우가 많은 것이 세상살이의 이치다.
최인범은 새해 첫날이라 각료들의 하례를 받고 있었다. 먼저 국무총리와 부총리들이 같이 인사를 드렸다.
“폐하, 감축 드리옵니다.”
“고맙소. 앞으로 총리들의 능력을 믿어 보겠습니다.”
대진국은 이제 국무총리와 좌총리 우총리를 두는 삼정승 체제로 변했다. 그리고 새롭게 사법부와 보건부가 생기고 교육부가 문교부로 명칭이 바뀌었다. 사법부가 법무부에서 분리된 것은 비록 삼권 분립의 원칙은 아니더라도 순수하게 재판만 담당하는 법관을 두기로 했기 때문이다.
문교부의 경우 이제는 정식으로 나라가 되었으니 문화 사업도 신경을 써야 된다고 해 교육부로 그 업무를 포함시키게 되어 부처의 이름이 바뀐 것이다.
모두 12개의 부에 장관, 차관들이 있고 12개 부처에서 사법과 군대와 관련된 부분은 좌총리가 담당하고 재정이나 인사관리는 우총리가 관장하며 모든 업무는 국무총리가 총괄하게 된다.
최인범은 이황 국무총리에게 당부했다.
“앞으로는 장관의 임명은 국무총리께서 추천을 해보도록 하세요?”
“폐하, 장관을 소신이 추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옵니다.”
“아니요. 앞으로 세 분의 총리께서 복수로 추천하면 임명할 것이니 그렇게 아세요.”
최인범의 이런 지시에 3명의 총리는 어리둥절했다. 왕권을 강화하더니 이제는 그것을 완전히 풀어 버리는 신권체제로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새해가 되자 부처도 새로 생기게 되어 각료들 사이에 약간의 인사이동도 있었다. 이황이 국무총리가 되고 좌총리에는 장하균 우총리에는 박대정이 임명되었다. 내무부 장관에는 유달곤, 사법부 장관은 양미성, 보건부 장관은 장주한이 임명되었다.
이렇게 되어 황궁은 여러 형태로 구분된다. 외궁인 중앙청에는 국무총리실을 비롯한 3정승이 업무를 보는 장소로 변했다. 그리고 중궁은 태왕의 근무처로 변해 태왕의 집무실을 비롯해 직속기구들인 비서실, 내시부, 경호실, 감사원, 정보원들이 있다.
그리고 내궁은 태왕이 다소 편하게 근무하는 편전에 해당하는 집무실이 있다. 마지막으로 대내궁은 교태전이 있고 좌측에는 부인들이 지내는 서궁의 춘하추동인 4개 전이나 각종 전각이 있다. 우측에는 나중에 왕자들이 지낼 동궁이 들어서 있었다.
삼정승에 해당되는 총리들이 있지만 각부 장관들은 태왕께 직보가 가능하다. 그 때문에 태왕이 실질적으로 모든 국정을 장악하는 전제정치형태다.
체제만 그렇게 만들고 장관들이 태왕에게 찾아와 직보를 드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특별히 관심을 두는 분야 이외에는 모두 총리들 선에서 결정하도록 전결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제사나 하례 의식이 모두 끝나고 나자 최인범은 부인들과 같이 동화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3명의 황비들과 같이 다과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설화는 조심스럽게 대부분의 업무를 국무총리에게 위임한 문제를 놓고 가볍게 의문을 표했다.
“폐하, 총리께 너무 권리를 위임한 것은 아니온지요?”
“그렇지 않아요. 앞으로 더 많은 업무를 총리 쪽으로 넘길 생각입니다.”
“더 넘기신다고요?”
“그렇소. 사실 많은 업무를 군왕이 모두 알 수도 없으니 특별한 내용이 아니면 분야별로 전문지식을 지닌 각부 장관들이 처리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렇다면 쉬엄쉬엄 국정을 살피시겠네요.”
“그렇소. 앞으로는 그리할 생각이요.”
이런 대답에 세 황비의 눈에서는 불꽃이 소리 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는 진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나라로 완전히 개국하다 보니 군왕이 직접 업무를 챙기다 보면 조선의 국왕과 같이 서류 더미에 파묻혀 살게 생겼다. 그래서 감찰할 기구만 세분해 놓고 총리들에게 대부분의 업무를 보도록 조치를 취했다. 권력이란 너무 한곳에 집중될 경우 그것이 오히려 부패를 낳고 문제를 일으킨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장관들이나 삼정승에게 권력을 분산시켰다.
역대 어떤 왕조도 군왕이 정치를 잘해서 보다는 삼정승의 능력이 뛰어나면 나라가 더 빨리 발전한다. 그런 내용을 잘 아니 과감하게 총리들을 믿어 주기로 결정했다. 이제는 정식 나라라 태왕으로 함부로 출타하기도 번거롭게 되었다.
최인범은 진 빈이 눈에 뜨이지 않자 그에 대해 물었다.
“아까는 보이더니 진 빈이 왜 보이지 않는 거요?”
“아마도 아들 생각이 나서 일찍 처소로 돌아간 것 같아요.”
“그렇소? 아무래도 아들과 떨어져 살면 어미로 뭐든 걸리는 것이 많을 거요.”
최인범은 잠시 진 빈을 떠올렸지만 쉽게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그 여자보다 더 급하게 꼭 처리해야 할 중요한 볼일이 있었다. 그래서 슬며시 일어나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