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화
1만필의 말을 끌고 이동하려니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최인범은 수시로 사냥하며 주변지형을 더 자세하게 살피고 있었다.
이곳도 광활한 초지로 조성된 곳이 곳곳에 아주 많았다. 그러니 말을 대규모로 사육하는 농장을 건설하기에 적당한 곳이다.
‘여기에 목장을 만들면 좋겠어.’
이런 생각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마카와 많은 물건을 거래하기로 약속했다는 설화의 말에 놀랐다.
“그렇게 많은 물건은 거래하려면 재물도 많이 필요한데. 그게 가능하겠소?”
“예, 충분히 그런 거래를 할 정도의 재물은 이미 있어요. 앞으로 이곳에 중점적으로 투자해서 각종 사업을 벌여야죠.”
이런 대답에 최인범은 굳이 설화가 이곳으로 같이 오자고 권했던 이유를 확실하게 알았다.
‘결국 기회에 장사도 하고 사업을 벌이기 위해 왔군.’
설화는 그동안 통화를 거점으로 삼아 조선과 교역해서 큰 이득을 봤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방법으로 큰 재물을 벌수 없게 되었다.
이유는 이미 만주지역도 조선과 기술력에서 우위에 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선에서 물건을 사서 여진족에게 파는 방법은 큰 이득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물론 여전히 거래하는 품목들이 많으니 남기는 하지만 별로 큰 이득금을 거둘 수는 없었다.
더구나 황실에서 국내 상권을 가지고 일반 대상인들과 경쟁하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설화는 이제는 접경지역으로 변한 이곳에 새로운 거점을 만들어 몽골과의 거래를 하거나 새로운 사업에 투자해 재물을 모을 생각인 것이다.
설화는 황실의 재력이 튼튼해야 태왕의 권력 기반도 반석위에 올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폐하, 이곳에 황실에서 직영하는 큰 목장을 만드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꼭 직영해야 하나?”
“그래야 폐하께서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을 사용할 수가 있사옵니다.”
“그렇군. 대진국은 강제로 사유재산을 압류하지 못하니 그게 좋겠어.”
설화는 단순한 무역 이외에 이곳에서 큰 목장도 만들고 여러 가지 사업도 시작해 재물을 벌어볼 심산이다. 최인범은 이런 정도로 간단하게 판단했지만 설화의 내심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었다.
‘아진태를 빨리 황궁에서 내보내야 해.’
표면적으로 아진태는 태왕의 양자에 해당된다. 그리고 자신의 배다른 남동생이지만 그는 나중을 생각하면 문제점이 있는 황족이라고 판단했다. 더구나 그의 모친은 명나라 출신이고 재혼한 여자다 보니 설화는 후일을 벌써 생각해서 아진태를 황궁에서 내보내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자칫하면 이상한 일도 벌어지는 불씨가 될 수 있어.’
남편이야 아직 젊고 튼튼해 자손이 없다는 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설화는 전혀 달랐다.
이제 막 개국하게 된 대진군은 전쟁을 자주 하는 나라다. 더구나 태왕의 성품으로 보아 앞으로도 최전선에서 싸우게 되는 경우가 많게 생겼다. 그러니 어떤 돌발적인 사건이 벌어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니 후계자에 대한 문제를 간단하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설화는 후계자는 자신의 소생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처녀로 시집온 여자가 낳은 자식이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되도록 여진 출신이나 또는 조선 출신인 황비가 낳은 자식이 황위를 이어야 순리라고 봤다.
설화는 말을 타고 가면서 슬며시 제안했다.
“폐하, 아진태 왕자도 이제 장성했으니 장가를 보내고 또 어떤 직책을 줘야죠.”
“아직 너무 어리지 않나?”
“어리지만 그래도 황실의 법에는 12세면 장가를 보내도록 되어 있사옵니다.”
일반 국민들의 경우 조혼의 폐단 때문에 남녀가 모두 16세 이상이 되면 혼인할 수 있도록 혼인법이 정해졌다. 조선의 경우 동성동본의 혼인을 불허하지만 대진국에서는 동성동본이란 개념이 약해 7촌 이상이면 혼인이 가능했다.
조선 출신들은 기겁한 혼인법이지만 다수를 차지하는 여진족의 경우 족내혼이나 형사취수제의 풍습이 강해 결국 그리 정해졌다.
아울러 황실의 법은 완전히 족내혼을 허용된다. 부모가 같은 친형제가 아니면 혼인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근친혼의 폐해를 너무 잘 아는 최인범은 반대했지만 결국 여진족들이 극구 주장해 그렇게 황실 혼인법은 정해졌다.
설화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그녀는 태황의 자손들이 계속해서 나름 순수한 혈통을 이어가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었다.
설화는 이미 최인범의 비밀을 조금은 눈치 채고 있었다.
‘태왕은 부여의 해모수나 조선의 단군께서 이 땅에 내려온 것처럼 내려오신 분이야.’
조선 조정에서 태왕의 출생지라는 백두산 주변을 철저하게 조사했지만 살았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설화는 조선에서 태왕을 음해하기 위해 그런다고 판단해 많은 사람을 백두산으로 보내 흔적을 찾아보게 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도 태왕이 백두산 주변에서 살았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조선에도 흔적이 없고 백두산이나 또는 여진 땅에도 그가 살았던 흔적이 전혀 없으니 태왕은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태왕폐하는 진짜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천손인거야. 그러니 그 천손인 혈통의 순수성은 유지되어야 해.
이런 깊은 다소 주술적인 의미도 있지만 이미 기득권자가 되어버린 설화다. 그녀는 황실에서 소유한 막강한 재력의 분산을 막아 보려는 의도가 있었다. 황족은 족내혼을 함으로 일단 황족들은 영원히 큰 부와 권력을 유지하게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진유향은 별로 창업에 공로도 없으며 권력에 집착이 강했다. 아들인 아진태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진유향은 절대로 힘을 키우게 해서는 안 돼.’
설화야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태왕께서 친자식을 보아 후계를 이을 생각이다. 하지만 진유향은 태왕의 친아들 보다는 아진태를 슬며시 후계자로 삼았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진 빈은 자격 미달이야.’
단순하게 남편을 두고 애정을 다투는 차원이 아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 진유향이 이상한 망상을 하지 못하게 할 필요성도 있었다.
다소 복잡한 이유로 설화는 아진태 왕자를 이곳으로 보내기를 원했다.
“폐하, 아진태도 옆에서 누가 도와주면 이곳에서 최소한 황실에서 운영하는 목장은 관리하며 정착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옵소서.”
죽은 아패록 족장에게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던 터라 최인범은 결국 설화의 청을 들어주게 되었다.
“알았소.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면 그렇게 합시다. 하지만 목장 관리가 쉽지 않으니 따로 책임자를 보내는 것이 좋겠소.”
“그렇군요. 반드시 유능한 사람을 찾아야 되겠네요.”
중요한 전력인 군마를 몽골에서 들여오고 대규모 목장을 관리해야 한다. 그러니 상술도 있고 말에 대해 알아야 하며 또 측근일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최인범은 천먹쇠가 목포에서 제주도와 하카타 그리고 부산포 등의 해상무역을 모조리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떠올렸다.
‘양돌쇠가 지금 쉬는 중이니 그를 여기로 불어오는 것이 좋겠어.’
하카타로 가는 무역을 담당하던 양돌쇠가 다시 풍기의 동물농장에서 지내고 있었다. 가축에 대해 잘 아는 그를 황실 직영목장의 책임자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전령을 보내서 풍기의 양돌쇠를 이곳으로 오라고 하시오. 그곳에서 공방들을 운영하는 기술자들이나 광산업자도 같이 오도록 전하시오.”
“예.”
이곳에는 철이나 또는 기타 광물들이 많이 매장된 지역이다. 그래서 목장 이외에 광업도 시작하고 또한 생산된 광물로 가공업도 같이 해볼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 출신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와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되는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행정조직도 있어야 되니 시나 군을 설치할까 고려하다가 발전가능성을 생각해서 도(道)를 두기로 결정했다.
“아진태 왕자를 이곳 도지사로 임명하지.”
“아주 잘 결정하셨사옵니다.”
결국 최인범은 이 지역을 대흥도라고 칭하고 도지사로 아진태를 임명하기로 했다. 어린 나이지만 황족이고 부지사 제도를 두어 부지사가 행정업무를 담당하면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도지사는 세습제도가 아니라 언제고 교체가 가능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없었다. 어린 나이지만 황족이라고 해서 도지사로 임명하면 건주여진족도 좋아할 것으로 판단했다.
현대적인 사고력을 지녔으니 조금은 꺼림직 하지만 그래도 절충안을 찾아 적당한 벼슬과 임무를 맡기게 되었다. 인구도 거의 없고 땅만 넓은 곳이라 사실 관리가 그리 어려운 지역도 아니다.
새로 도(道)가 생기게 되어 최인범은 그에 대해서도 지시하게 되었다.
“금이여를 이곳으로 보내 사단장을 하면서 몽골로 가는 길목에 산성을 축조하라면 되겠군.”
최인범의 이런 지시에 철갑웅이 응수했다.
“폐하! 산성을 건설하려면 인력이 많이 필요하옵니다.”
“그렇지 않아. 그래도 과거에 고구려가 건설한 산성들이 의외로 남은 곳이 많으니 그곳을 새로 보수 공사를 해서 이용하면 돼. 자네도 사냥을 다니며 봤지 않나. 중요한 지점에는 어김없이 산성이 있는 것을.”
“알겠습니다.”
최인범이 야생동물의 날고기만 먹자고 사냥한 것이 아니다. 사냥을 핑계로 고구려에서 축조해 놓았던 산성을 돌아보고 활용도를 직접 점검한 것이다.
최인범이 이 시대로 와서 제일 놀란 것은 바로 고구려의 산성들이 오랜 역사가 흘렀어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자 비록 나무가 자라고 풀이야 무성하지만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그러니 기존에 산성을 잘만 보수하면 충분히 산성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최인범은 몽골에서 가져온 1만필의 말을 몰고 장춘군에 도착했다. 한 번에 많은 말들을 가져오자 금일여가 매우 놀랐다.
“폐하, 한 번에 많은 말을 가져오셨군요. 몽골 족과 협상이 잘 된 것 같사옵니다.”
“잘 됐지. 그게 아니면 아예 가서 빼앗아 오려고 했어.”
“아, 그래서 철 장군님들과 같이 가셨군요.”
항상 복합적은 구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최인범은 협상이 잘 진행되지 않았으면 몽골로 들어가 말들을 끌고 올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자신의 몸 하나를 보호하자고 철씨 삼형제를 해직시켜서 몽골로 데리고 간 것이 아니었다.
무기를 거래한다는 말에 금일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구형 무기라면 별로 없는데요?”
“앞으로 철령위나 또는 심양의 건주여진에서 획득한 무기를 적당히 수리해서 보내주면 돼. 그리고 현재 육군에서 보유한 제일 오래된 구형 대포는 모두 장춘으로 보내니까 그것을 모두 새로 생긴 대흥도로 보내도록 해. 일단 보유하고 있다가 말을 받고 넘겨주면 되고.”
“알겠습니다.”
“대흥도의 방어 책임자인 사단장으로 금이여를 보내고.”
“넷!”
“유사시 군단장이 모두 책임지는 지역이니 잘 도와줘.”
“명을 따르겠나이다.”
최인범이 몽골과 접한 곳까지 진출해 대흥도를 새로 만들게 된 사실은 그가 어떤 정도의 범위를 영토로 포함시키려는 지 의도가 드러나는 것이다.
한편 봉황성에서는 태왕이 보낸 전통을 받자 놀랐다.
“허! 태왕 폐하께서는 결국 그곳까지 영토로 삼을 목표를 가지시고 움직인 것이야.”
“그곳도 영토로 포함하면 너무 넓은 것 아닙니까? 인구도 별로 없는데.”
전령을 통해 이런 소식을 접한 이황은 다소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굳이 사람도 별로 없는데 그곳에 대흥도(大興道)를 둔다는 점이 의외로 받아 들였다. 더구나 도지사로 어린 아진태 왕자를 임명하자 약간은 실망감이 생겼다.
‘결국 이상과 현실은 다른가?’
조선에서 오래 유학자로 살아서 이황은 여전히 왕권과 신권 중에서 신권이 강한 정치체제를 원했다. 그러나 점차 돌아가는 모양으로 보면 신권 보다는 왕권이 일방적으로 강한 형태인 정치체제로 잡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