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풀이 죽어 자금성으로 들어온 백삼수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자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다. 그 여자들을 만나자 저금성이 죽을 구멍이 아닌 상황으로 변했다.
‘이럴 수가 여긴 내 구역이야.’
자길 보자 너무 반가워 남모르게 고개를 살짝 돌리고 눈물을 흘리는 많은 상궁들을 보자 신이 났다.
‘저 여자들이 임인 궁변에서 모두 살아남았어.’
황궁인 자금성에는 환관들도 있지만 상궁이나 궁녀들이 아주 많았다. 더구나 자금성은 넓어서 사실 사람이 사라져도 쉽게 찾기 어려운 곳이다.
왕 황후는 큰 목소리로 상궁들에게 지시했다.
“백수를 데리고 가서 잘 입히고 자금성을 구경시키도록 해.”
“에이.”
가정제 때문에 무질서해진 곳이지만 그래도 자금성은 서열도 있고 나름의 질서는 있었다. 태감이라고 불리는 환관들의 우두머리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는 장소가 있었다.
백삼수는 두려운 빛으로 상궁의 안내를 받아 자금성을 돌아다니며 살폈다. 물론 살피는 장소야 겨우 서궁 지역에 불과하지만 넓어서 돌아다닐 곳은 많았다.
“여기는 환관이 안보이네.”
“아! 환관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곳도 있어요.”
“그래? 그러면 궁녀들만 있는 곳이네.”
“그렇지요. 환관이 들어오려면 황제폐하의 특별한 명령을 받아야 해요.”
황제의 명령이 아니면 환관이 합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곳도 있었다. 궁녀들의 수장인 최고상궁이 지내는 곳에는 범접하기가 어렵다. 그뿐 아니라 그 바로 아래의 직급에 해당하는 고위층인 상궁들의 처소도 환관들은 함부로 드나들지 못한다.
‘자금성도 복잡한 곳이군.’
막강한 지위를 가진 고위직 상궁들은 모두다 자신이 이미 천진에서 데리고 놀아 수족처럼 부리던 여자들이다. 여자의 정이란 금방 식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칫하면 철천지원수로 변하는 수가 많았다.
그러나 처음 만난 상궁들은 다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반가워했다. 그러니 백삼수 입장에서는 정신병자에 불과하고 아편에 찌는 가정제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자금성이야 말로 자신이 안전하게 몸을 보호하고 지낼 곳이라고 판단됐다.
그러나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유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왕미미 황후가 상궁들과 달리 고분고분한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흠! 문제는 성질이 까칠하고 더러워 보이는 왕 황후가 문제군.’
일단 백삼수는 우선 자신의 처소를 가장 은밀한 곳으로 정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새 참지 못해 구석진 방으로 자신을 끌고 와서 치마를 급하게 올리려고 하는 최고상궁에게 넌지시 물었다.
“내가 지내기는 어디가 제일 좋지?”
“어머, 그냐 제 처소지요.”
물어 보는 놈이 미친 거지. 하나 마나한 물음이고 답이다. 그래도 넌지시 어느새 잔뜩 부풀어 버린 탱탱한 젖가슴을 어루 만져주며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알잖아. 태감들의 눈초리도 있고.”
“알았어요. 제가 언제고 몸을 피할 수 있는 가산의 비밀 통로가 있는 옆으로 거처를 마련하죠.”
“고마워.”
최고상궁이 정해준 곳은 그녀의 거처와 그리 멀지 않고 또한 감찰 상궁들만 드나드는 곳이다. 일종에 가짜로 만든 산인 가산(假山)에는 안에 밀실이 있었다. 그곳에는 각종 고문도구가 있는 곳의 옆방이다.
환관인 태감들만 동창이라는 특별한 정보조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외적으로 활동을 심하게 하지는 않지만 황궁 내의 궁녀들도 비밀 정보조직이 있었다. 황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소위 궁녀들의 사가(事家)나 또는 유격한 고관들 부인들을 감찰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기구가 있었다.
‘감찰 상궁이 제일 권력이 막강하군.’
환관들이 주축인 정보, 감찰 조직인 동창(東廠)처럼 어떤 특별한 상설기구가 있는 것은 아니다. 황후나 비빈들이 가끔 필요에 의해서 가동되는 조직이다.
더구나 수많은 궁녀들이 있다가 보니 별일이 다 많았다. 우연히 마주치는 황궁을 지키는 병사들과 재주도 좋게 놀아난 궁녀도 있다. 또는 법으로 금지하는 동성애를 즐기는 궁녀나 시녀가 발각되기도 한다.
사실 그런 여자들에게 벌을 주거나 고문해서 뭔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밀실이 있다. 그것을 관리하는 감찰부 소속인 궁녀들이 따로 있었다.
자신이 이미 수족으로 부리던 여자들은 모조리 최고 상궁이나 감찰부 책임자인 상궁 등의 중요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임인궁변에서 큰 공을 세워 황궁에서 실세로 변했다. 그러니 백삼수로는 여기 자금성이야 말로 자신이 가장 놀기 좋은 구역이라고 판단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모르지만 이곳에 들어온 백삼수는 매일 조선에서 보낸 인삼을 무 뿌리 먹듯이 먹어가며 지내게 되었다.
‘여자만 남자 때문에 팔자가 바뀌는 것이 아니야. 나처럼 여자 때문에 황제처럼 지내는 수도 있다고.’
그래도 걱정거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조 귀비가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을 예리하게 관찰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백삼수는 상궁과 논의했다.
“어떻게 하지? 조 귀비가 나를 이상하게 살피는 것 같은데?”
“염려하지 마세요. 적당한 때 만나서 해결하시면 됩니다.”
“오호! 조 귀비도 그렇고 그런 여자란 말이지.”
“그렇지요.”
제정신이 아닌 여자가 다다 많을수록 백삼수에게는 더욱 살기 좋은 환경이다. 백삼수는 이런 최고상궁의 대답에 다시 한 번 이곳이야 말로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곳임을 느끼고 있었다. 어떤 과정을 거쳤건 백삼수는 여장하고 자금성에서 궁녀로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왕미미 황후는 그에게 감찰부 소속의 2인자의 자리인 상궁으로 임명해 버렸다. 그저 남의 힘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도 이제는 궁녀들의 행동을 규찰하는 높은 위치로 오른 것이다.
한편 황궁의 교태전에서 지내는 왕 황후는 아침 식사를 하다가 심하게 구역질을 했다.
“우엑! 우엑!”
심하게 헛구역질을 하던 왕 황후는 뭔가 골똘하게 생각하더니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해졌다. 그리고 급하게 상궁에게 명령을 내렸다.
“빨리 어의를 들라.”
“에이!”
정신없이 어의를 불러 진맥하자 어의는 급하게 엎드려 소리쳤다.
“황후마마. 감축 드리옵니다.”
“고맙소.”
어의로부터 축하한다는 말을 듣자 임신이 확인됐다. 그토록 원하던 임신을 하고 보니 약간 우울했다. 지난 일을 떠올려 보니 막상 어떤 남자의 아이인지 애매모호한 것이다.
‘백수라는 놈의 아이인지 아니면 거리에서 누워 있던 걸인 씨인지 잘 알 수가 없네.’
가임의 최적기간이라고 판단해 왕 황후는 3개월 전에 너무 급해서 사찰로 가다가 만난 늙은 걸인을 풀숲으로 끌고 가 위에서 기마자세로 덮쳤었다. 그것으로 안심이 안 되어 사찰의 부엌에서 백수와 처음으로 흐드러지게 정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때문에 누구 아이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느낌으로 어떤 감은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백수 놈의 씨가 확실해.’
늙은 걸인 보다는 마음에 드는 힘 좋은 백수가 아비 자격이 있다고 판단한 것인지 그리 생각했다. 물론 그날 접한 사내는 둘만 아니다. 밤에는 자금성으로 돌아와 교태전에서 황제와도 대충 한 번 더 했었다. 세 남자 중에 한 명이 아비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몸이야 백수를 만나서 흐드러지게 놀아보고 싶지만 별 고생을 다하고 얻은 결과물이라 너무도 소중했다.
‘자중해야지.’
임신 초기에 큰 물건을 넣고 신나게 즐기다 보면 이제까지 고생이 허사가 될 수 있었기에 신중하게 처신했다.
한편 황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한 백삼수는 잠시 하늘이 노래졌다. 이유는 이건 분명 씨내리 수법으로 왕 황후에게 자신이 이용당한 것이라 조선에서 도망친 지난 사연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백삼수는 최인범의 배려로 마포나루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났다. 그리고 수원에서 지내다가 인심이 좋고 양반의 고장이라는 정산을 거쳐 규암나루에서 배를 타고 젓갈이 유명한 강경으로 갔다.
새우젓 장사인 과부를 만나 짜디 짠 새우젓만 실컷 얻어먹고 전주 근처의 왕궁리라는 마을에서 잠시 지냈다. 소문대로 전라도의 음식 솜씨들이 너무 좋아 어디고 주막에 들리면 입이 무척 즐거웠다.
우연한 기회에 왕궁리의 양반 집 별당아씨와 접하게 되었다. 많은 돈을 준다고 해서 씨내리 역할을 승낙했다. 돈이 너무 곤궁해진 이유도 있고 여자라면 마다하지 않는 성품이기 때문에 접했다. 전에는 많은 여자와 접해도 임신이 안 되더니 단 한 방에 임신이 되었다.
씨내리하는 남자의 역할이라 목적이 달성 되었으니 졸지에 죽을 운명에 처했었다. 아무튼 그나마 진하게 접해 눈이 뒤집어지고 완전히 돌아갔던 전주 김씨 댁의 별당 아씨가 그 때문인지 귀띔을 해주어 도망쳤다.
백삼수는 강경 나루를 통해 미곡을 팔러 산동으로 오는 무역선을 타고 명나라로 들어왔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북경으로 왔다. 여기서도 씨내리 역할이라 황후가 자길 죽일 확률이 아주 높았다.
‘황후가 임신했다고 나를 죽이려고 하면 어쩌지?’
충분히 그럴 만한 성품인 냉혹한 여자다. 그러자 마냥 내 세상이라고 활개 치며 자금성의 서궁에서 지내던 백삼수는 걱정이 태산으로 변했다.
‘이거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네.’
그러나 임신한 왕 황후는 혹시 딸이면 나중에 또 접해서 아들을 낳고 싶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아직은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닌 모양이야.’
한편 왕 황후는 임신을 하자 위세는 더욱 높아졌다. 이제는 자식도 있게 되었으니 명나라가 온전해야 된다. 그녀는 정치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왕 황후는 나름 대진국에서 대련항으로 해군들이 모여드는 사건 때문에 나라 전체가 너무 어수선 하자 가정제에게 심각하게 조언했다.
“폐하, 건주본위와 철령위의 기마병들을 산해관으로 부르옵소서. 상륙하는 해군들은 기마병으로 돌격하면 얼마든지 격퇴할 수 있사옵니다.”
“오! 그런 좋은 방법이 있었군. 기마병이라면 빨리 도착할 수 있으니 좋은 생각이야.”
그쪽의 군사들에 대한 영향력이 적어 그냥은 불러 올수 없었다. 건주 본위와 철령위로 많은 은자를 보내고 최대한 빨리 요택을 지나 산해관으로 오도록 명령하게 되었다.
“누굴 사신으로 보낼지 대신들이 잘 결정하시오.”
“에이.”
전에는 여진족을 요리하기 위해 많은 은자를 건주본위나 철령위로 보냈으나 한동안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 시절의 안 보낸 은자까지 포함해 보내게 되었다.
이런 거액의 정치 자금이야 항상 운반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것이 많은 법이다. 북경에서는 건주본위로 은자를 운반할 책임자를 두고 몹시 술렁였다.
그러자 이제 권력이나 정치에 관심이 많아진 왕 황후는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폐하, 왕승 태감이 사신으로 적임자입니다. 그를 보내옵소서.”
“그게 좋겠군.”
왕승은 자신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환관이라 충분히 믿을 만하고 자격이 있었다. 그래서 가정제는 후보자로 물망에 오르는 대신들을 제치고 왕승 태감으로 결정했다.
이런 일은 바로 선불이라 왕승은 즉시 왕 황후를 찾아와 가임을 축하한다며 많은 금은보화를 바쳤다.
“황후 마마, 감축 드리옵니다.”
“고맙소. 우리 친척이니 앞으로도 계속 잘 해보도록 합시다.”
왕승은 왕 황후의 힘으로 심양에 있는 건주본위와 더 북쪽에 있는 철령위로 은자를 나르는 사신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왕 황후의 입김은 노골적으로 북경 조정의 일에 깊숙하게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