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대련 항의 북동쪽으로 길게 돌출된 바위산에 자리한 별궁······.
이곳은 비사성의 내성에서 시작된 길과 연결된 곳이다. 소피아가 이곳에서 지낸다고 해서 크게 별궁을 짓고 있다. 별궁과 연결된 해안의 높은 절벽 위에는 포대 지휘소인 커다란 누각이 있었다. 별궁의 건물들은 모두 벽돌이나 대리석으로 유럽식으로 지어지고 있었다.
제일 동쪽의 돌출된 초대형 바위 위에는 조선식의 큰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영일루(迎日樓)는 제일 먼저 해를 맞이할 수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대형으로 지어진 영일루의 2층에는 커다란 상에 많은 음식들이 차려졌다.
소피아 왕비가 천진을 떠나 이곳 대련으로 사업체를 옮겼다. 마침 새해 첫날이 되자 조상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음식들을 차려 놓았다.
시녀장인 허후화는 시녀들에게 독촉하고 있었다.
“서둘러! 해가 뜨기 전에 준비를 끝내야 하니까.”
“예. 마마님.”
소피아 왕비의 호위대장과 시녀장인 타말과 후세트는 비사성으로 오면서 이름을 대진국 방식으로 연타발과 허후화로 바꾸었다.
연타발은 고구려시절의 유명한 장군인 연개소문의 성을 따고 이름은 음차해서 지었다. 시녀장인 허후화도 약간 음차를 했고 항상 소피아 왕비의 뒤를 따라다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전에는 벼슬이 필요 없었으나 이제는 대진국 영토 안에서 지내니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정5품에 해당하는 해군소령과 침방상궁으로 임명했다.
최인범은 그동안 어떤 거처고 오래 머물지 않고 자주 여행이나 외유를 다니고 있었다. 그 때문에 조상님께 올리는 제사나 차례 음식을 잘 차리지 못했다. 그런 점 때문에 소피아 왕비는 이번에 자신과 같이 새해를 맞이하는 것을 기회로 푸짐하게 상을 차렸다.
‘환영 잔치를 겸해서 한다니 상관없어.’
웅성웅성.
영일루에는 근접경호원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최인범을 비롯해 이곳에 와있는 각료는 물론 지역의 관료나 지휘관들도 모였다. 해맞이를 겸해 하늘과 조상님들께 합동으로 차례를 올리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올해는 갑진(甲辰: 1544)년으로 용의 해다.
드디어 어둡던 주변이 점점 환해지며 동쪽에서는 붉은 태양이 바다에서 서서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제사는 시작되었다.
올해는 거북이와 용으로 상징되는 해다가 보니 갑진년에 태어나는 사내는 무병장수하고 장차 큰 인물이 된다는 속설이 있었다. 누각에서는 이제 막 떠오른 붉은 해를 향해 최인범이 먼저 술을 올리고 큰절을 했다.
그가 떠오르는 붉은 해를 향해 큰절을 올리자 뒤에서는 부하들이 따라서 큰절을 올리고 있었다. 이황 내무장관이 큰 소리로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축문을 크게 읽고 있었다.
그가 읽은 축문 내용은 단순하지가 않았다.
축문은 천손인 대진국의 태왕이 하늘과 조상님들께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니 하늘과 조상님들께서는 알아달라는 뜻이다. 그리고 앞으로 대진국이 만만년 자손들이 대를 이어 번영하게 도와주고 만백성을 평온하게 잘살게 해달라는 글이다.
황제만이 할 수 있다는 하늘에 대한 제사인 제천의식을 처음으로 바다에서 떠오르는 붉은 해를 향해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진국의 성산인 백두산을 향해 지내는 엄숙한 의식이다.
의례를 갖추어 제천의식으로 차례를 지내다 보니 시간도 오래 걸렸다. 마지막에는 태왕인 최인범을 향해 부하들이 축언했다.
“대진국, 만만세! 만세! 만만세!”
“태왕폐하 만세! 만만세!”
만만세를 크게 외치는 소리들은 모두 감격에 겨운 표정들이다. 동양에서는 대륙의 패자인 황제에게만 만만세를 외치기 때문에 지금 부하들은 최인범을 황제와 똑같이 축원하는 것이다.
너무 감격에 겨워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동안 가슴 깊은 곳에 감추어 두고 꽉 막혀 있던 답답한 응어리가 팍 터져서 나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출신들은 대부분 감격으로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제 잃어버린 고토를 찾게 됐어.’
일시적으로 고토(故土)를 찾았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님을 길고 긴 역사의 경험으로 너무 잘 안다. 그러니 과거 어떤 왕조보다 더욱 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된다는 각오들을 다지고 있었다.
‘내 몸이 부서지더라도 꼭 해내야 돼.’
이황 내무장관은 자신이 태어난 조선국을 버렸지만 이제는 대진국의 행정을 책임지는 수장으로 막중한 임무의 무게감을 느끼고 있었다.
조상이나 조국을 버렸다는 오명이 자신에게 흔적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소리에 뒤돌아볼 필요는 없게 되었다. 당당하게 거대한 제국을 이룰 앞으로의 미래만 보이는 것이다.
이황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조선을 합병하고픈 충동이 생겼다. 대제국을 이루는 주체세력은 반드시 한반도의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이 많겠어.’
황궁 건설도 그렇고 황후도 누구로 정하느냐가 아주 중요했다. 이황 내무장관은 되도록 조선 출신 여자를 황후로 올리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황은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앞으로 조선에서 더 많은 이주민을 받아야 해. 늦으면 안 돼.’
이미 나라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외교적으로만 나라라고 선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대진국이라고 실질적으로 선포식을 하게 된 것이다. 이미 요동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북진을 시작했으니 더 이상 선포식을 뒤로 미룰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단 하늘과 조상께 하게 되는 제천의식이 모두 끝나자 영일루는 잔치 분위기로 바뀌었다. 신하들은 단순한 제사에 불과한 오늘의 일을 거창하게 생각해 흥분된 표정들이다.
이황 내무장관이 제사 도중에 태세를 말하며 흥무(興武)이라고 칭한 내용을 두고 철갑웅이 한마디 던지고 있었다.
“내무장관님, 이제부터는 흥무 1년이라고 불러야 되는군요.”
“그렇소, 앞으로는 모든 문서에는 흥무원년으로 기록하고 대진국의 흥무태왕폐하로 기록하고 칭해야 되는 거요.”
“내무장관님, 정식으로 즉위식은 언제 하는 거요? 아직 봉황성의 황궁 건설 공사는 기초만 다지지 않았소? 도대체 건설부 장관은 뭐하는 건가요?”
“걱정하지 마시오. 이제부터는 서두르게 될 거요.”
나라로 선포함과 동시에 황제국이라고 발표해버렸으니 이제는 뒤돌아 갈 길은 없었다. 그러니 황제국에 어울릴 정치나 행정조직, 외교 관계 그리고 군사들도 체계를 잡아가야 한다.
차례 상을 거창하게 차리더니 결국 이런 사태가 벌어지자 최인범은 속으로 약간 당황했다.
‘허! 이거야 원 너무 이른 감이 있는데. 다들 서두르는군.’
기왕에 가정제에게 허리를 숙인 입장이라 우려먹을 것은 철저하게 우려먹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짓도 못하게 생겼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일은 여기까지 진행되어 버렸으니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묵인하기로 했다.
“내무장관, 앞으로 외교문서에는 되도록 주변국으로 보내지 마시오.”
“넷!”
그저 안방에서 패거리끼리 황제라고 칭해 일단 진정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명나라를 심하게 자극하지 않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미친놈이 날뛰면 골치가 아파.’
더구나 왕 황후가 독기를 품고 뭔가 계획할 것이 분명하니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왕미미가 독기를 품었을 거야.’
여자가 한을 품으면 사실 상상하기 힘든 일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도 꼴에 자존심이 있는데 그것을 모두 버리고 벌거벗고 덤볐다. 그런 여자를 그냥 쓰레기 취급을 해서 냉전하게 거절했으니 가을의 살모사처럼 독기가 잔뜩 서렸을 것이 분명했다.
‘어휴! 눈 딱 감고 한 번 해주겠다고 했으면 왕미령도 살고 이렇게 머리는 아프지 않았을 건데.’
앞으로 미친 가정제를 상대하려니 골이 아파서 잠시 이런 생각까지 떠올랐다. 정상인이 미친 사람을 상대하기는 정말 힘들다. 어떤 쪽으로 튈지 전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왕 황후가 제시한 내용은 가정제도 거의 묵인해 벌어진 치밀한 음모 같았다. 하긴 조선에서도 가문을 잊기 위해 씨내리하는 풍습이 있으니 정신 이상자인 가정제는 그런 짓을 꿈꿀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정사에는 기록되지 않는 야사의 기록에는 역대 왕조에는 그런 일이 수없이 벌어지기도 한다. 대륙을 일통한 진시황제도 그렇고 고려시절도 의문점이 많은 후계자가 왕위에 오른 경우가 있었다.
사찰로 찾아가서 오래 불공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그저 부처님의 영험만을 뜻하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여자가 마음만 먹으면 다른 남자의 자식을 남편의 자식으로 키워야 되는 음모야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사실 남자들 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여자들이 더 음흉한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하면 남자들은 멍청하거나 매우 순진하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좋게 말해 그것 여성들의 모성애라고도 하지만 아주 원초적인 본능인 자손을 널리 퍼트리려는 자연현상이다.
‘미친 가정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
사실 왕 황후나 조 귀비의 목표대로 성공했다면 자신은 아들을 아들이라고 부르지도 못한다. 자금성에서 낳으면 가정제의 아들로 살게 된다. 그렇다고 모자를 죽여 버릴 수도 없는 아주 고약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그러니 최인범은 자금성에 도사리고 있는 왕미미가 제일 두렵고 변수가 많은 존재다. 그녀가 가정제를 어떻게 유도해서 분풀이하기 위해 일을 크게 벌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독종들과 심하게 엮였어.’
심란한 표정으로 이런 생각을 하자 철갑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 혹시 돌아가신 왕 왕비님이 생각나서 그러시나요? 얼굴이 너무 어두워 보이옵니다.”
“아니, 그보다 철 대령도 이제 소장으로 진급을 해야 되겠어. 안산에 있는 사단들을 통괄해서 지휘해야 하니까.”
“폐하, 폐하께서는 그곳으로 가시지 않으려고요?”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음식이나 먹어.”
“넷!”
잘 차려진 음식이나 모인 부하들은 오랜 만에 푸짐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떡국도 먹고 밥도 먹는 철씨 삼형제를 보며 최인범은 속으로 생각했다.
‘앞으로 저 놈들 먹여 살리는 것도 장난이 아니겠어.’
단순히 철씨 삼형제의 먹성이 좋아서 하는 생각이 아니다. 그들이 보유한 3개 정예 사단의 병사와 군마를 포함해 군비의 소요를 의미하고 있었다.
그들의 경우 3만명의 3개 사단 병력들 중에 18000명 정도인 기마병은 모두 준사관 이상이라 급료만 따져도 엄청나다. 그러니 조금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심양의 건주본위 병력이 약 2만명이라니 특별한 사건만 없으면 충분히 수비는 가능했다. 그래서 최인범은 철갑웅에게 지시했다.
“군단장, 안산으로 가서 목책만 설치해 방어 시설을 해놓고 건주본위를 정탐만 하도록 해. 아직은 건주 본위를 공격할 때는 아니니까.”
“넷!”
약세라고 판단해 건주본위를 함부로 공격하다가는 주변에 있는 해서여진이나 야인여진에게 협공당할 수 있어 이런 지시를 내리는 것이다.
최인범은 이곳에서 제천의식을 치루고 부하들과 음식을 같이 먹으며 그들에게 많은 지시를 내렸다. 최인범은 준비가 끝나는 대로 산동의 위해 항구로 떠나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군대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재물이 필요하니 재물을 모으기 위해 움직이려는 것이다.
‘아무래도 산동의 위해 항구를 통해 제태국으로 보내는 물자를 더 늘려야 되겠어.’
그렇게 하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운선을 이용해 직접 제태국에게 물품을 넘겨주는 방식을 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넘겨줄 물자를 선택하기 위해 우선 위해 항구로 가볼 생각이다.
최인범이 제태국으로 떠나는 중에 북경이나 주변국에서도 제천의식이 알려지고 있었다. 이미 다른 나라들도 대진국에 많은 간자들을 보내놓고 있으니 빠르게 알려진 것이다. 그리고 제천의식으로 주변국들은 심하게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그 행사가 주는 의미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