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임트레인-329화 (329/519)

329화

<난교 난국 사이의 선택>

만리장성의 끝인 발해 만에 있는 산해관(山海關)은 천하제일관으로 불리고 있다. 한족들은 동북방의 유목민들의 침입을 대비해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거대한 만리장성을 대륙의 북방에 쌓았고 그 동쪽의 끝에 요새지를 만들었다.

거대한 옹성으로 만들어 철옹성이라고 한족들은 자랑했다. 그러나 북방에서 일어난 강력한 힘에는 항상 힘없이 무너지는 만리장성이고 중요한 관문들이다.

더구나 이번에 판옥선 10척을 몰고 발해만을 통해 접근해 상륙하는 진국의 해군들에게는 산해관은 그저 단순한 석조 건물에 불과했다.

그래도 산해관은 복잡한 형태의 웅성으로 지어진 곳이라 함부로 움직이기는 곤란한 요새지다. 바다까지 뻗어와 높이 망루를 세운 노룡두 옆에 판옥선 10척이 조심스럽게 접안했다.

항구는 아니지만 그래도 작은 백사장이 있으니 평저선인 판옥선은 접안이 가능했다. 근접 경호원 300명은 판옥선에서 급하게 튀어나와 돌계단을 타고 노룡두의 망루에 올라갔다.

다다다다. 착! 착!

단창을 2개씩 든 근접경호원들이 10여보씩 떨어져 망루에 도열했다. 전진과 동시에 각자 위치에 서서 전방과 후방을 살폈다.

300명의 근접경호원이 망루를 완전히 장악하고 나서 이어서 웅금만리(雄襟萬里)라고 현판이 걸린 징해루(澄海樓)까지 완전히 장악했다.

착! 착!

“이상 없습니다.”

이곳에서 보초를 서던 명나라 병사들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징해루와 접한 약간 넓은 공간에 모여 수군거렸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진왕의 군대가 여길 찾아오고.”

“진왕께서 왕 왕비님을 만나러 오시나 봐.”

“그렇다면 저쪽의 포구로 가야지 왜 여기로 와? 이상하잖아.”

“그건 그러네.”

300명의 근접경호원들이 들이 닥쳐 망루의 끝에서부터 징해루까지 장악해도 병사들은 그저 무슨 일인가하는 호기심만 표했다. 지휘관인 군관이 경호실장인 이창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진왕께서 잠시 머물다 갈 것이니 그렇게 아시오.”

“알겠습니다.”

지휘관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징해루의 한쪽 구석에 모이도록 했다. 그리고 다들 한가한 표정들로 바닥에 앉았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진왕에 대한 반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병사들이나 군관들이 판단하기에는 진왕은 명나라의 충신 중에 한 사람이다. 명나라가 곤란한 처지에 있을 때마다 나서서 도와주고 또 큰 공을 여러 번 세웠다.

더구나 최근에는 산동반도의 제태국이 소금을 유통시키지 않아 상당히 곤란한 상황으로 처했을 때 많은 소금을 가져와 위기를 넘겼다.

그런 내용이야 모두 표면적인 이유다. 실제로 이들이 진왕에게 호의적인 진짜 이유는 이곳의 고려여각의 단골들이기 때문이다. 공짜로 술과 음식을 주지는 않지만 고려여각에서는 산해관의 병사들에게는 일반인보다 2할 정도 음식 값을 싸게 받고 있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변방에서 힘들게 나라를 지키는 애국자들이라며 왕미령 왕비가 아주 저렴한 가격에 음식을 제공한 것이다. 왕미령이 다른 나라 출신이면 의도를 의심하겠지만 그녀가 명나라 조정의 학자 가문 출신이라 다르게 판단하거나 해석하는 사람은 없었다.

5척의 판옥선은 여전히 해안에 접안해 있다. 나머지 판옥선은 해안을 떠나 약 1000보 정도의 해상에서 일자형으로 포진했다. 모두 산해관을 향해 함포를 방렬해 놓은 상태로 대기 중이다.

이창수가 급하게 판옥선으로 돌아와서 보고했다.

“전하, 징해루까지 완전히 장악했사옵니다.”

“보초들은?”

“징해루 옆 광장에 모여 있사옵니다.”

“배에 있는 소주와 돼지고기를 좀 넉넉하게 가져다줘.”

“넷!”

나중에야 어떻게 되던 아직은 명나라의 신하이며 대부마도위인 진왕이라 명나라 병사들에게 후하게 베풀었다.

광장에 모여 있는 명나라 병사들은 진왕이 보내준 술과 고기를 먹으며 좋아했다.

“맛나네.”

“이게 고려주라는 거야.”

“나도 비사성으로 가서 진왕군의 해군이나 할까? 진왕군의 해군들은 육군들 보다 더 대우가 좋다던데.”

비사성과 비교적 가깝고 그곳에서 오는 무역선들이나 어선들이 산해관으로 자주 찾아오니 비사성의 소식은 다들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최인범은 판옥선에서 내려 징해루로 갔다. 도열한 경호원들이 너무 긴장해 표정이 굳어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지시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앉아서 쉬도록 해.”

“넷!”

명나라 병사나 지휘관도 바라보고 있으니 너무 삼엄한 경계태세를 보이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아 쉬라고 명령했다. 최인범은 징해루의 누각에 올라 바다 쪽을 향해 서서 멀리 보이는 함대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지시한 그대로 포진해 있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해군이 이제 진용을 잘 갖추는군.”

바다에서 전투를 벌이는 해군은 사실 육지보다 더 진법을 잘 운용해야 된다. 자칫 조금만 진용이 흐트러지면 육군보다 더 혼란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이때 산해관의 수비대장이 급하게 말을 타고 와서 광장에서 내리더니 징해루로 올라왔다.

“전하! 이제야 연락을 받았습니다.”

“북경에서 소식은 없나?”

“조금 전에 막 파발로 소식이 왔사옵니다. 폐하께서는 내일 오전에 도착할 예정이옵니다. 불편하신데 군영으로 가시는 것은 어떠신지?”

“상관없소. 밤에는 판옥선에서 지낼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군영으로 가지 않으면 당연히 왕 왕비가 있는 고려여각의 저택으로 가야하는데 이곳에서 지낸다고 하니 수비대장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칭해루 광장으로 왕미령이 가마를 타고 나타나자 수비대장은 급하게 누각에서 내려가 인사를 했다.

“왕비마마!”

“수고가 많군요. 여기 일은 신경 쓰지 마시고 고려여각으로 가서 술이나 드세요. 내일은 폐하께서 오시니 조금 바쁘지 않겠어요? 그러니 오늘은 술 한 잔 드시고 푹 쉬시는 것이 좋아요.”

“감사합니다.”

왕미령이 칭해루로 올라오자 경호원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오랜 만에 만난 부부라 어떤 대화나 행동을 하게 될지 몰라 자리를 피해준 것이다.

철갑웅이 커다란 호피를 바닥에 깔고 나서 다른 형제에게 눈짓을 했다. 둘만 있도록 하자는 뜻이다.

왕미령과 호피 위에 앉은 최인범은 그녀가 차분하게 설명하는 말을 들으며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대부분 왕 황후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고 가정제가 벌이는 기행이나 또는 마약에 절어서 사는 내용이다. 또한 북경의 조정 중신들의 성향에 대해서도 설명해주고 있었다.

“왕미미는 황후가 됐다고 하지만 미친 가정제의 행동이 그런 정도라면 고생이 너무 심하군.”

“전하, 그러 하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불쌍한 왕미미를 딱 한 번만 도와 주셨으면 하옵니다.”

“내가 딱히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소.”

“좋은 방법이 있사옵니다.”

이어지는 왕미령의 말에 최인범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더구나 이번에 가정제가 자신에게 새로운 작위를 내리게 된 배경에는 왕 황후의 요구 조건도 포함되어 있다는 소리에 혀를 차고 말았다.

“부인,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이요? 무슨 이상한 마약이라도 먹었소? 그런 황당한 요구를 황후와 이미 합의했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이요?”

“전하! 딱 한번이옵니다. 그리되면 온 천하는 전하의 손안에 저절로 굴러 들어옵니다.”

왕미령이 황후인 왕미미와 합의했다는 이야기는 세 사람이 하룻밤만 같이 동침하자는 내용이다. 그리해서 어떤 여자의 몸에 아이가 생기던 그 아이는 가정제의 아이로 명나라의 황제에 오르게 만든다는 계획이다. 실로 경천동지할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니 왕미령의 입에서는 더 놀라운 말이 튀어 나왔다.

“전하, 그것으로 안심이 안 되면 조 귀비도 같이 동참해 동침할 수 있사옵니다. 그러니 딱 하룻밤만 같이 지내시면 되옵니다.”

“뭐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황후 하나로도 부족하면 조 귀비까지 동참해 난교를 벌여 세 여자 중에 누구라도 아이를 낳게 되면 가정제의 아들로 만들어 나중에 황제로 올린다는 뜻이다.

‘허! 왕미령도 드디어 미쳤어.’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너무 어이가 없어 혹시 농담으로 하나 싶어 왕미미의 눈을 똑 바로 바라보던 최인범은 순간 머리가 멍해지고 말았다.

‘헉!’

대충 볼 때는 몰랐지만 자세하게 보니 왕미령의 눈동자가 총기가 사라지고 매우 탁한 기운이 끼어 있었다. 이건 분명히 마약이나 어떤 독에 중독된 것이 분명했다.

최인범은 무술고수라 사람의 눈이나 행동거지를 잘 살피면 대체적으로 몸이나 정신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알 정도는 된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육감이나 본능으로 아는 정도지 의술에 깊은 조예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방치하는 바람에 아내가 마약이나 어떤 독에 중독됐다는 느낌을 받자 너무 놀랐다. 그래서 다소 떨어져서 서성이는 철갑웅을 향해 크게 외쳤다.

“철 대령, 빨리 군의관을 오라고 해.”

“넷!”

명령을 받은 철갑웅이 판옥선에 타고 있던 군의관을 데리고 왔다. 함대에는 3척에 1명씩의 군의관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해군들의 건강을 살피는 역할도 하고 지금은 최인범의 주치의처럼 업무를 보고 있었다.

“보약을 지어 먹을 생각이니. 진맥을 잘 해보게.”

“넷!”

군의관은 왕미령의 손목을 잡고 바들바들 떨면서 맥을 집어보고 있었다. 그가 떠는 이유는 진왕의 눈에서 강한 살기가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잘못도 없지만 진맥을 잘 못하면 죽이게 생긴 눈빛이라 너무 두려운 것이다.

달달달.

손이 마구 떨리니 정확한 진맥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똑 바로 못해!”

최인범은 아내가 마약 장이가 됐다고 생각되자 열불이 나서 군의관에게 호통을 치고 말았다. 정신이 번쩍 든 군의관은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잡고 진맥하고 한 참 지나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뭔가 말을 하려고 하자 최인범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했다.

“판옥선으로 돌아가. 거기서 보고 받지.”

“넷!”

최인범은 군의관의 표정으로 보아 상당히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더 이상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저 다 내 잘못이지 싶어 부드럽게 말했다.

“부인! 그런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고 어서 여각으로 돌아가시오. 여긴 여자가 머물지 못하는 군영이요.”

“알았어요.”

왕미령은 최인범의 지시에 별다른 말없이 순순히 칭해루를 떠났다. 그녀의 생각에는 남편이 자신에게 보약을 지어 먹인다고 하니 너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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