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정난정은 구사일생으로 월녀에게 구출 받게 되자 재빠르게 이름을 바꾸는 변신을 시도했다. 이제부터는 보다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감출생각이다.
그래서 약간은 정신이상의 증상도 있는 터라 당분간은 아무런 자각 능력이 없다는 듯이 행동할 생각이다. 너무 긴장했다가 구출을 받아 몸이 축 늘어져 버렸다.
“아씨! 저 잘게요.”
이말 한마디만 던지고 짐이 쌓인 구석에 끼어 잠이 들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월녀가 측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여자의 팔자도 참으로 기구하군.’
지금은 호강하고 살지만 자신도 어려서는 매우 힘든 생활을 해서 그런지 만감이 교차되고 있었다.
‘세상에 그런 일을 겪고도 아직도 살아 있다니 목숨이 질기긴 질겨.’
문뜩 산다는 것이 뭔가 하고 다소는 허무함까지 느껴졌다. 월녀는 잠시 상념에 잠기다 즉시 선장에게 지시했다.
“출발해요.”
“넷!”
정난정을 구하기 위해 격렬비열도 해상에서 잠시 머물던 40척의 조운선들은 빠른 속도로 백령도로 향했다. 날씨도 좋고 가을 하늘에는 새털구름만 보였다.
“비가 올지 모르니 빨리 가야 되겠네요.”
“넷!”
아무리 잔잔한 내해라고 하지만 바다에서 만나는 폭풍은 그야말로 저승사자와 같았다. 그러니 서둘러 목적지로 가야한다. 빠르게 이동하던 배는 멀리 섬이 보이자 다들 반가워 외쳤다.
“백령도다!”
“이제 가야하는 뱃길의 반을 넘었군.”
백령도는 황해도 서쪽 끝에 위치한 섬으로 건너편에 웅진 반도와 장산곶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흔히 널리 알려진 효녀 심청이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라는 해역이다.
백령도 동쪽에 있는 포구로 많은 배들이 들어서자 섬사람들이 손에 나무 물동이 들고 빠르게 산으로 내달렸다. 이곳에서 보급을 받는 것은 계곡에 있는 맑은 물을 식수를 가져다주면 쌀을 주기 때문에 물을 길어오는 것이다.
“빨리 날라야 한 동이라도 더 줘서 한 되라도 더 챙기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린 아이들도 작은 물동이인 나무통을 들고 뛰었다. 이곳 백령도는 전에 비해 살기가 조금 좋아졌다. 전에는 식량을 무조건 육지에서만 사다가 먹었지만 이곳에 감자와 고구마가 공급되자 전과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벼농사를 지을 수 없어 여전히 쌀은 이곳에서는 귀한 식량이다. 월녀는 선원들에게 보급을 지시하고 이곳에 있는 작은 초가를 찾아갔다.
경기도에서 명나라나 봉황성으로 가는 중요한 해로인 이곳에는 월녀가 특별히 이주시켰다. 그는 백령도로 들어오는 모든 배들이 싣고 있는 화물을 파악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표면으로는 백두 상단 소속으로 행동하지만 실상은 봉황성의 정보부 소속의 정보원이다.
“백 중위님, 특별한 소식이 있어요?”
“넷! 얼마 전에 진국의 제3함대의 2전대가 이곳에 왔다가 갔사옵니다. 앞으로는 산동반도의 위해 항구를 거쳐서 명나라로 가시면 된답니다.”
“그렇군요. 오라버니께서 결국 거기에 해군기지를 만들었군요.”
이제는 경기 만에서 얼마든지 명나라로 쉽게 가는 최단거리 항로가 확보되자 조금은 편하게 운항이 가능하다.
“다른 문제는 없고요?”
“있습니다. 그곳 위해의 해군기지에 식량이 많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소금도 필요하지만 소금은 염창 시에서 공급 받으니 문제가 없답니다.”
“그럼 마침 잘 됐네요. 우선 쌀을 실은 조운선 10척은 그쪽으로 보내면 되겠군요.”
결국 미곡을 실은 조운선 10척을 산동반도의 위해 항구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월녀는 선장들에게 당부했다.
“선장님들은 조심해서 운반하시고. 그곳에서 화물을 싣고 단동으로 오세요. 그래야 단동에서 화물을 계속해서 나르던 저와 같이 다시 제물포로 내려와 목포로 화물을 싣고 내려가니까요.”
“알겠습니다.”
선장들이야 화물만 날라다 주고 운임을 받아 수익을 올리는 입장이다. 그러니 쉬지 않고 계속해서 날라야 하는 화물이 있으면 좋으니 다들 좋아했다.
새로운 인생을 살 생각인 정난정은 아무래도 월녀에 빌붙어 자신도 상업을 해보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조선도 싫고 봉황성으로 가기도 싫어 슬며시 말했다.
“아씨, 저도 위해라는 곳에서 살면 안 될까요? 그곳에서 장사해보고 싶네요.”
“그러세요. 원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월녀는 나름 진국에서는 공주로 대접을 받고 있는 입장이라 힘이 있어 서찰을 써주게 되었다. 그곳의 해군 지휘관에게 정난정이 앞으로 살 대책을 마련해 주라는 부탁이다.
“서찰을 가지고 그곳으로 가서 병사에게 넘겨주면 됩니다. 그러면 새로운 신분증을 만들어 줄 것이니 그곳에서 조용히 사세요.”
“고맙습니다. 아씨.”
서로 과거의 신분을 모른 척 하기로 이미 이심전심으로 통해 서찰에는 그녀의 가명인 현난풍(玄難風)이고 충청도 보령출신이라고 적어 주었다. 상단은 둘로 갈라져 결국 정난정은 산동 반도로 떠나게 되고 월녀는 바로 봉황성으로 가는 북쪽으로 향했다.
이 무렵 봉황성에서는 약간 소란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말을 타고 봉황성에 도착한 소피아는 진유향이 감찰 상궁을 지휘하는 행동에 당장 이의를 걸었다.
“왕후가 없으면 다음에는 왕비가 권한을 행사해야 하는 내명부의 감찰업무를 감히 빈의 신분인 후궁에게 권한이 있다면 그건 크게 잘 못됐어요. 그러니 자순 태감은 이를 바로 잡으세요.”
“넷! 왕비마마.”
졸지에 자신의 중요한 권한을 박탈해도 진유향은 그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항의도 못하는 것은 이미 겁에 질려 있기 때문이다.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해 보여 겁나는 표범 두 마리를 고양이 다루듯이 하는 소피아에게 만나자마자 주눅이 들어 버렸다. 겁에 질려 숨도 크게 내쉬지 못하고 소피아가 내리는 명령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진유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자순 태감은 신이 나서 한술 더 뜨고 있었다.
“왕비마마. 그렇다면 앞으로 누가 감찰 상궁을 지휘하죠?”
“당연히 아 왕비께서 지휘해야 하지만 그분이 따로 사니 힘들고 다음에는 내가 지휘해야 하나 그도 역시 힘든 상황이니 그 다음은 당연히 주 왕비가 지휘하는 것이 옳죠.”
마음 같아서야 왕비 서열 중에 자신을 제일 위로 놓고 싶지만 모든 정황상 그건 아니다 싶었다. 인구 분포로 보나 군세로 보나 군단장도 겸하는 아설화를 자신이 압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4명의 왕비를 두고 자신이 멋대로 턱하니 서열을 정해 두 번째로 정해 버렸다. 명나라에서 서로 다소 경쟁심이 있는 산해관의 왕 왕비의 경우 마지막인 넷째로 정했다. 진 빈에게 은근히 눌려 살던 정향 대공주 입장에서는 불만이 있어도 말할 수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지만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녀 역시 표범 두 마리가 옆에서 어슬렁거리니 몸이 얼어버리고 입이 막혀 버렸다.
더구나 비사성에서 대부마도위인 진왕을 만나고 와서 이런 식으로 왕비들의 서열을 정하니 사전에 언질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소피아는 단단히 벼르고 왔기 때문에 왕궁의 재물을 관리하는 내수사(內需司) 수장인 태일 태감을 불렀다.
“태일 태감은 내수사의 장부를 모조리 가져와요. 그리고 감사원의 직원들도 오라고 하고요.”
“넷!”
혼자서는 짧은 기간에 내수사의 재물에 대해 감사하기가 곤란해 감사원의 직원들도 불러 본격적으로 감사를 시작했다. 장사를 오래해 수리에 밝은 소피아의 감사는 매서웠다.
“왜? 이 비단의 수가 2필이 틀리죠?”
“그건 제가 그냥 가져다 쓴 거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내수사 재물이 어디 태감 개인이 사사롭게 쓰는 재물인 줄 아세요? 이건 분명 횡령입니다. 그러니 당장 채워놓으세요.”
“넷!”
태일 태감은 물론 내수사의 재물을 합부로 쓰던 진 빈도 된서리를 맡고 장부를 정확하게 기록하지 못한 상궁이나 궁녀들까지 혼쭐이 나고 있었다.
“감히 함부로 창고를 열어 재물을 도적질하다니.”
내놓을 별도의 재물이 없는 상궁이나 궁녀들은 엉덩이가 불이 나도록 두들겨 맞았다. 그리고 창고 열쇠는 모조리 회수되어 버렸다.
그동안 허술하고 방만하게 내수사의 물건을 관리하던 태일 태감이나 기타 관련자들은 호되게 혼내고 나서 가져다 쓴 재물들을 모조리 토하고 감사는 끝났다. 태일 태감은 그나마 따로 챙겨둔 재물도 있고 급료를 받아 모아둔 재물이 있어 볼기를 맞지 않았다.
결국 내수사 업무에 대해서는 수리에 밝은 내시부의 수장인 자순태감이 겸직하게 되었다. 태일 태감은 다시 염전만 관리하는 책임자로 추락했다.
소피아는 감사원장인 이지함에게 명령했다.
“앞으로 내수사는 연간 1회씩 감사해서 결과를 전하게 직접 보고하세요.”
“넷!”
이런 일을 계기로 내명부의 여자들에 대한 직급도 확실하게 정해지고 그녀들이 쓸 수 있는 재물도 확실하게 정해졌다.
잠정적으로 확정된 내명부의 품계는 황후, 황비, 귀비(정1품), 비(종1품), 빈(정2품), 귀인(정3품), 소의(종3품), 숙의(정4품), 소용(종4품)이다.
그래서 상궁은 자연이 그 아래인 정5품부터 정해지게 되었다. 제조 상궁만 직급이 높지 그 아래야 점점 내려가게 되니 여유로운 생활을 하기는 어렵다. 물론 왕궁에 살기 때문에 별도로 연간 비단 몇 필이나 또는 무명을 주어 옷을 해 입도록 하는 규정도 정해졌다.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든데.’
이렇게 되고 보니 종2품인 진 빈이나 또는 정1품으로 왕비인 정향 대공주는 문제가 생겼다. 정해진 규정대로 실행하면 화려한 비단옷을 마음대로 해서 입기는 완전히 틀렸기 때문이다.
‘어머머, 앞으로 벌거벗고 살라고 하네.’
그런 지경은 아니지만 지금에 비해서는 3할 정도만 사용이 가능하니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두 여자나 그녀들의 측근인 상궁들은 그동안 방만하게 비단 옷을 해 입고 재물을 사용했었다.
소피아가 조금 짜게 규정을 정한 이유는 자신이나 다른 두 여자인 왕미령이나 아설화는 별도의 상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설화의 경우 퉁화에서 조선이나 봉황성과 그리고 해서 여진과 교역하는 상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왕궁에서 지내지 않으니 굳이 격식을 갖추어 화려한 비단옷을 입을 필요성이 없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소피아는 이런 조치를 급하게 내리고 나서 서둘러 천진으로 떠나게 되었다.
“비사성으로 가자!”
“넷!”
이런 일이 왕궁에서 벌어지자 감사원도 바빠지게 되었다. 권력의 최고 심장부에서 더구나 내명부를 감사하게 되었으니 다음 순서는 어디를 감사하라는 뜻인 줄 정확하게 이해했다.
“흠! 돈줄부터 감사하라는 뜻이야.”
“원장님, 아무래도 어사를 지방으로 보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자고.”
국세청을 비롯해 재무부나 조폐청 그리고 조달청이 감사원의 감사를 받고 도청들도 파견된 어사들에 의해 감사를 받게 되었다. 소피아가 와서 진유향을 잡자고 시작한 일이 진국의 전체로 번지게 된 것이다.
소피아가 비사성으로 가서 최인범에게 보고하니 빙그레 웃다가 조용히 응수했다.
“소피아에게 그런 조치를 내리라는 권한을 준 기억은 없는데?”
“전하, 제가 잘못했으면 저도 볼기를 치시면 되죠.”
“알았소. 그럼 그렇게 하지.”
밤에 볼기를 얻어맞으며 크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소피아는 다음날 멀쩡하게 커다란 엉덩이를 묘하게 흔들며 무역선을 타고 천진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