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이황이 머무는 여각을 찾아간 최인범은 불문곡직하고 무조건 큰 절부터 했다.
“퇴계선생님, 여기서 만나 너무 영광입니다.”
그러자 이황은 당황해서 얼른 엎으려 같이 절했다. 주자학을 평생 공부한 이황은 군왕인 최인범의 이런 파격적인 행동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런.’
일단 최대한 예의를 표해 인사를 마친 최인범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봉황성을 돌아 보셨는지요.”
“예, 놀라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여긴 조선과 다르면서도 또 같은 곳이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 보셨다니 천만다행입니다.”
일단 여행이 목적이라니 최인범은 이황을 봉황성의 비밀창고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 쌓여 있는 고대 유물들을 보여 주었다.
“이건 백제시대 유물이고 이건 신라, 이건 고려 그리고 이건 왜의 규슈에 있던 백제인의 유물입니다. 그리고 발해와 고구려 그리고 금나라 유물도 있고요.”
“그렇군요.”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목적이야 이황을 내무장관으로 영입할 생각이 있지만 고집불통일 수도 있으니 다른 방법으로 설득시킬 요량이다.
그동안 새로 건물을 짓거나 또는 지방에서 관료들이 봉황성으로 보낸 유물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 지금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물건들도 있지만 훗날을 생각해서 모아두었다.
다소 여유가 생긴다면 박물관을 만들어 전시할 요량이다. 국민들이 조선, 여진, 몽골, 명나라 출신으로 나뉘어 있으니 하나라는 인식을 심어 주지 위해 북방민족의 역사서 이외에 고대 유물을 전시해볼 생각이다.
최인범은 비밀창고에 있는 유물들을 보여주고 나자 이황에게 권했다.
“우리 고구려 유적지를 가보죠.”
“고구려 유적지라면?”
“환인과 집안으로 가시면 그곳에 고구려 유적들이 아주 많습니다.”
최인범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여러 말을 해서 설득하기 보다는 이황에게 고구려 유적을 보여 줌으로 마음이 돌아서길 기대했다.
그러자 이황은 최인범이 권하기도 하지만 과거 조상들이 큰 나라를 세워 호령하던 발자취를 돌아보는 것도 좋다고 판단해 따라 나섰다.
봉황성과 연결되는 압록강 북쪽 강변 쪽에 있는 도로는 그런대로 대로로 정비되어 있었다. 물론 환인이나 통화에 있는 주력군이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만든 도로라 계속 압록강 강변에 도로가 있지는 않았다.
의주와 마주하는 지역만 강변에 있고 이후로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아무튼 압록강의 강변도로에는 가끔 기마병이 순찰을 도는 모습이 보였다.
“상인들이 가끔 저지르고 있는 밀 교역을 단속하기 위해서 순찰을 도는 겁니다.”
“그렇군요.”
최인범은 이황에게 어떤 학문이라 논리 그리고 역사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저 한가하게 여행을 가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한편 최인범이 이황과 함께 봉황성을 떠나자 왕궁의 후원에서는 갑자기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쨍그랑!
성깔이 보통은 넘는 정향 대공주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남경에서 가져온 대형 도자기를 깨트려 버린 것이다. 홀로 독수공방을 시켜도 유분수지 여전히 자신과 마주하려고 하지 않으니 열불이 나서 집기를 부수고 있었다.
“왕비마마, 고정하옵소서.”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시는 거야? 또 아 왕비를 만나러 퉁화로 가시고.”
부마도위인 남편이 계속해서 다른 여자만 접하고 자신을 완전히 도외시하니 분한 마음에 화풀이 대상으로 명나라에서 생산된 도자기만 깨고 있었다.
드디어 명나라 도자기를 모두 깨고 나서 고려청자를 집어 들어 내리치려고 했다. 그러자 기겁한 상궁은 급하게 만류하며 애원했다.
“마마, 만약 그 도자기를 깨면 저의들은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그러니 그만 고정하옵소서.”
“창고에 많은 도자기인데?”
“그렇지 않사옵니다. 도자기를 함부로 다루던 관료가 도자기에 약간 흠이 가자 참수형에 처한다고 큰 소리를 치실 정도 아끼시는 도자기인데요. 그런 도자기를 실수도 아니고 화가 나서 일부러 깨시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사옵니다.”
상궁은 안 되겠다 싶어 도자기를 얼른 궁녀에게 넘겨주며 지시했다.
“빨리 창고에 넣어 둬.”
“예.”
정향 대공주는 자식도 없지 그렇다고 내명부라고 해서 딱히 할 일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비밀 창고에 들어 있던 도자기를 반들반들하게 닦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화사한 비단옷을 입은 진유향이 나타나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나! 저런 귀한 도자기를 5개나 깨트리다니·······. 전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상궁이나 궁녀의 목이 달아나게 생겼네. 하긴 너무 귀하신 몸이니 어쩌면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진유향은 품속에서 작은 장부책을 꺼내 들고 파손된 물건의 목록을 자세하게 적었다.
“이게 다 왕실 재산인데 나중에 보고해야 되겠어. 그러니 누가 깬 것인지 이름을 적어야 하는데 누굴 적지?”
“소녀가 깼습니다.”
눈치를 보던 궁녀가 나서서 대답하자 진유향이 코웃음을 치며 호통 쳤다.
“나보고 전하께 허위로 보고 하라는 건가? 감히 앞으로 나서고 그래.”
결국 상궁이 나서서 자기가 깼다고 말하고 장부에 수결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만족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가며 한마디 던졌다.
“고의적으로 기물을 파손한 죄는 곤장 형이니 상궁은 연락하면 오도록 해.”
“예!”
보기 싫은 여자가 나타나 은근히 속을 뒤집는 소리를 하고 떠나니 정향 대공주는 열나서 거품이 품어 나오게 생겼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이 품계가 높아도 진유향에게 벌을 줄 권한은 없었다.
최인범은 진유향이 비록 직급은 낮지만 내명부에서 필요한 물품은 그녀를 통해 조달하도록 조치를 취해 놓아 진 빈의 위상은 오히려 정향 대공주보다 높은 셈이다.
‘빈인 주제인 자기가 뭔데 감히 내가 부리는 상궁을 불러서 볼기를 친다는 거야?’
하지만 진유향은 감찰 상궁을 부릴 권한이 주어져 있으니 그냥 넘어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자기 처소로 돌아 가자 감찰 상궁에게 즉시 명령했다.
“빨리 대공주궁으로 가서 상궁을 데리고 와.”
“예.”
졸지에 감찰 상궁과 그녀의 부하들인 궁녀들이 대공주 처소로 들이 닥쳤다. 대공주 대신 수결한 상궁을 끌고 가 걸음을 걷지도 못할 정도로 심하게 볼기를 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자 왕궁의 모든 힘은 진 빈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자순 태감은 급하게 서찰을 쓰고 있었다.
그는 천진에 있는 소피아 왕비에게 서찰을 보내 빨리 귀국하길 간청하고 있었다. 산해관의 왕 왕비는 대가 약해 아무래도 진 빈의 위세를 꺾기가 힘들어 보여 기가 센 소피아에게 연락하는 것이다.
‘주군께서는 이런 일을 왜 방치하는지 모르겠군.’
매사 철저한 주군이지만 여자들에 관해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 행동을 보일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러다 보니 왕실이 다소 무질서해 보였다.
한편 환인의 오녀 산성에 도착한 최인범은 가파른 산을 타고 정상으로 올라갔다. 이황도 건강해서 그런지 가쁜하게 df라오고 있었다. 산 정상에 도착하자 이곳에 주둔 중인 관측중대의 지휘관에게 망원경을 넘겨주며 지시했다.
“앞으로 이것을 이용해 관측해 봐. 그러면 더 멀리 관측이 가능하니까.”
“넷!”
“망원경은 중요한 군수품이자 비밀 병기니 이런 장비를 우리가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비밀로 하고. 분실하거나 적에게 노출 하면 군법재판 감이니 잘 관리하고.”
“명을 따르겠습니다.
최인법은 먼저 군부대를 방문해 그들에게 필요한 군수품을 전달하고 나자 다시 이황과 합류했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환인 시가지의 모습을 손으로 지적하며 슬며시 물었다.
“퇴계선생님, 저기 보이는 환인 시에서 사는 저들이 과연 고구려인들의 후손일까요?”
“그야 모르죠.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저들을 흔히 조선에서 여진이라고 부르지만 제가 보기에 저들은 모두 고구려 후손이라고 봅니다. 대부분 조선과 풍습이 같은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가요?”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저 고구려 유적들을 보여 주는 정도고 틈틈이 근처에 있는 소부대들을 잠깐 방문하는 정도다.
드디어 집안에 도착한 최인범은 이곳에 있는 거대한 석비인 호태왕비를 보여주었다.
“비문을 정확하게 읽기가 조금 힘들죠?”
“그렇군요.”
“여기 탁본이 있으니 비교해 보며 읽어 보세요.”
“예.”
한학에 밝은 이황이라 비문을 빠르게 해석하며 읽었다. 물론 일부는 난해해 즉각적인 해석이 불가능한 부분도 있지만 그럭저럭 해석이 가능했다.
막상 거대한 비석과 비문 내용을 보던 이황은 서서히 가슴 속에 뜨거운 불길이 일어났다.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던 고구려의 기상이 자신의 가슴속에서도 치밀었다. 그러다 보니 한반도의 조선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조선은 너무 좁아.’
뭔가 치밀어 오는 표정을 보이는 이황을 바라보며 최인범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런 느낌이 안 생길 수 없지.’
자신의 목적이 어느 정도 성사된다고 느끼고 있었다. 최인범은 집안 군수가 찾아오자 명령을 내렸다.
“호태왕비가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크게 보호각을 세우도록 하시오.”
“넷!”
최인범은 집안에 있는 많은 고구려 유적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군수에게 명령을 내렸다.
집안에 들려 다시 압록강을 배로 이동해 드디어 위화도에 도착하자 최인범은 이황에게 슬며시 제안했다.
“퇴계 선생님. 여기가 위화도이시니 남쪽으로 회군하시던 아니면 봉황성으로 와서 저를 돕던 결정하세요. 긴 역사로 볼 때 과연 어떤 결정이 옳았는지 평가야 후손들이 하는 것이니까요.”
조선으로 돌아갈 마음이 있으면 다시 압록강을 넘어서 봉황성으로 오지마라는 축객령이다.
사실 이황정도 되는 인물이 작심하고 살피면 봉황성의 약점이 모조리 드러날 수 있었다. 결국 봉황성에서 유능한 첩자가 마음대로 활동하게 방치하는 일이라 이런 특단의 조치를 내리는 것이다.
“저는 봉황성으로 오며 성리학이니 주자학이니 하는 구학인 유학을 버렸습니다. 그러니 넘어오실 때는 반드시 저처럼 그런 것도 버리고 넘어오세요.”
커다란 술 항아리와 고기나 나물 무침 등 안주를 푸짐하게 차려 놓고 최인범은 인사도 없이 압록강을 넘어 사라져 버렸다.
“허어! 회군이냐 북진이냐의 선택이라.”
이황은 위화도에서 앉아서 항아리에 들어 있는 술을 마시며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평생을 배운 학문을 버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이 태어난 조국과 조상을 버리는 길을 가야하니 더욱 고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