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뛰어난 것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지만 척계광이 나중에도 충성심을 보이느냐가 관건이다. 지금은 엄연히 명나라 대부마도위로 왕이란 작위를 받은 입장이지만 독립국가라고 선포하면 전혀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선 출신이야 이미 왕국이나 황제국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척계광은 그것은 아직 생각하고 있지 않을 것이니 지켜봐야 해.’
최인범이 주변에 인재가 없다고 느끼는 점은 바로 이런 문제 때문이다. 조선 출신은 나중에 조선과 진국(眞國)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면 전혀 다른 태도로 돌변할 위험성이 있었다.
최인범은 잠시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떨쳐버렸다.
‘너무 미래에 집착하면 사서 속을 썩는 거야.’
최인범은 교도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큰 파오를 치고 머물면서 염창 시의 업무를 살폈다. 염전 사업이 활발해진 염창 시에는 아주 큰 부두가 건설되고 있었다.
‘다시 올 때마다 빠르게 변하는군.’
넓은 해안 지대의 평지에 건설되는 도시라 도로도 넓고 완전히 바둑판처럼 신도시가 건설되었다.
천일염이나 또는 요동 지역에서 생산되는 곡물들이 이곳 염창 시로 모이게 된다. 그래서 선박을 이용해 필요한 곳으로 이동되기 때문에 항구 시설을 확장하는 것이다.
봄이 되자 직할 봉토지인 이곳에 있는 넓은 들판은 각종 작물들을 심었다. 주로 감자나 고추, 호밀 등을 심고 있었다. 호밀의 경우는 모두 건초를 만들어 군마의 먹이로 쓸 생각이다.
해변에는 새로운 시설인 풍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바람의 힘을 이용하는 풍차는 일부는 염전에서도 사용하고 주로 곡물을 정미하는 용도로 쓰게 된다.
황해에서 부는 바람이 비교적 일정하게 불기 때문에 항상 풍차는 서서히 돌아가고 있었다. 최인범은 풍차시설이 준공되는 것을 기점으로 삼아 고추를 바수어 고춧가루를 만드는 기계시설도 고안해 제작했다.
핵심참모인 홍성철과 장주환이 같이 협력하고 많은 기술자들이 모여서 이룬 결과다. 농산부 장관인 장주한이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전하, 이제 고춧가루를 천진으로 보낼 수 있게 되었네요.”
“장관들이 그동안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 이제 풍차가 개발되었으니 여건이 좋은 곳에는 계속해서 풍차시설을 늘리도록 해.”
“넷!”
누구보다도 기술력이 뛰어난 두 사람을 장관으로 두는 것이 참으로 아까웠다. 적당한 인물이 있다면 장관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두 사람은 새로운 시설이나 신무기를 개발하는 국방과학연구원으로 보내야 된다.
그러나 장관을 함부로 아무나 시킬 수도 없어 두 사람은 여전히 밤을 낮 삼아 일하고 있었다. 노비출신인 두 사람은 그저 자신들을 귀하게 써주는 것이 너무 고마워 죽기를 각오하고 힘들게 근무했다.
항상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라 안타까워 물었다.
“연구도 같이 하자니 힘들지 않나? 조금만 기다려 봐. 적당한 인물이 나타나면 장관 업무는 다른 사람이 보도록 해줄 거니까.”
“전하, 걱정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옵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럭저럭 버틸만하옵니다.”
“괴인이 보기에 보약으로 버티는 것 같은데. 보약 냄새가 내 코를 찌를 정도야.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말고 연구는 쉬엄쉬엄하도록 해.”
“넷! 건강에 유념하겠나이다.”
최인범은 두 사람에게 나름 건강을 유지하는 가벼운 운동에 대해 말해주었다. 쉽게 할 수 있는 전신 늘이기나 맨손체조에 말해주면서 너무 보약에 의존하지 말도록 충고했다.
“보약보다 더 좋은 것이 운동이니 항상 운동을 해.”
“넷!”
그러나 그런 충고도 잠시 스치는 걱정에 불과하고 세 사람은 모두 국정운영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부분 새로운 작물의 보급 확대와 광산 개발이나 신무기인 소총이나 화포의 개량사업을 논의했다.
한동안 이런 대화를 나누던 홍성철은 뭔가 떠오른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전하, 드디어 안경을 왜로 수출할 정도의 물량이 충분히 확보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진족들도 사간다고 아우성이니 어찌 처리하옵죠?”
“허! 아직도 여진이니 조선이니 뭐니 하며 출신지를 구분하나? 이미 다 같은 국민인데.”
“전하, 그게 아니오라 멀리 북쪽의 송화강 쪽에 있는 해서여진을 말하는 겁니다. 그들도 안경을 접하자 사가겠다고 아우성이옵니다.”
“그래? 그들이 왜 안경을 그렇게 좋아하는 건가?”
“소신은 그쪽의 사정에 대해 잘은 모르오나 눈이 좋은 사람도 아마 귀한 물건이라 소유하고 싶어 사려는 경향들이 많사옵니다.”
안경의 태를 합금인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 고가로 판매했다. 그러다 보니 부유층에서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보다는 소장하고 싶어 사가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으로는 이미 백두 상단을 통해 한양이나 주요 도시로 팔려나가고 있었다. 최인범은 북쪽의 해서여진족들이 도대체 뭐를 주고 사가겠다고 하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물물 교환인데 뭐를 가져온다고 하나?”
“금과 은이옵니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주석이나 구리도 가져오겠다고 하고요.”
“알았어. 그렇다면 판매하도록 해.”
“넷!”
여진족들은 금나라를 이어 대륙을 통일한 원나라 때는 완전히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족들이 세운 명나라는 여진족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최북방의 흑룡강에서 사는 야인여진(野人女眞)과 송화강 근처에서 거주하던 해서여진(海西女眞), 그리고 길림이나 남쪽에서 사는 건주여진(建洲女眞)으로 나뉘어 서로 견제하며 살도록 하는 이간정책을 쓰고 있었다.
장주한이 북쪽의 여진족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전하, 북쪽의 여진족들은 언제 흡수하실 생각이신지요?”
“아직 시기가 너무 빠르다고 보는데. 과인 생각에는 굳이 통합하고 말 것도 없다고 봐. 안경을 파는 것처럼 교역을 통해서 서서히 같은 문화권으로 흡수하는 것이 더 좋다고 보는데.”
“그래도 언젠가는 해야 되지 않나요?”
“그야 당연한 이야기지. 하지만 너무 빨리 통합하려면 무리가 가고 희생도 많아서 지금은 함부로 군사를 움직일 수 없어. 그리고 우리가 여진을 통합하면 북원이나 명나라를 자극할 위험성이 높아. 그러니 꼭 필요한 거점을 확실하게 장악한 다음에 통합을 생각해 보자고.”
“잘 알겠습니다.”
명나라는 여진족들에게 군단명인 건주위, 야인위, 모련위 등을 붙여주었다. 그들의 우두머리에게는 명나라의 벼슬을 주었다. 이런 방법은 각 소부족 단위로 위소를 설치해 서로 대립상태로 만들어 통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실 최인범이 건주위를 통합했다고 하나 여전히 건주 본위가 심양에 있으니 건주위도 완전히 흡수한 상태는 아니다. 특히 명나라의 가정제가 방심하고 있는 지금 비사성을 차지해서 거점을 확보해 둬야 한다. 그래서 자순의 임무가 잘 되었는지 궁금했다.
“자순이 북경에서 협상을 잘 했는지 모르겠군.”
“전하, 이제 태감이 돌아올 때가 됐는데요.”
“그렇군. 올 때가 됐어.”
말이 씨가 되었는지 염창 부두에 많은 배들이 도착했다. 명나라로 떠났던 판옥선 10척으로 구성된 해군전대와 조운선 20척들이다.
최인범은 너무 멀어 정확하지 않아 망원경을 꺼내 살폈다.
자순이 판옥선에서 부두의 관리에게 뭔가 묻던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배에서 뛰어 내렸다. 아마도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빨리 보고하기 위해 배에서 내리는 것 같았다.
자순 태감은 급하게 말에 올라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손에 황금빛 비단 두루마기를 들고 힘차게 흔들고 있었다. 신이 난 표정으로 보아 분명 황제의 교지가 틀림없었다,
‘흠! 성공했군.’
급하게 달려온 자순은 말에서 뛰어내림과 동시에 크게 외쳤다.
“전하! 비사성이옵니다. 드디어 비사성을 전하의 봉토지로 만들었사옵니다.”
“뭐? 봉토지로?”
“그렇사옵니다. 비사성을 중심으로 사방 100리까지 모두 전하의 봉토지옵니다.”
어떤 구역에 대한 단순한 행정력이나 또는 군사권을 가진다는 것과 봉토지와는 전혀 다르다. 봉토지의 경우는 완전히 그곳 주민부터 관아, 토지, 그리고 모든 시설이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봉황성의 경우는 지금 서있는 염창 시 지역을 비롯해 100리가 봉토지로 정해져 있다. 봉황성이나 단동 시 자체는 사실상 봉토지는 아니다. 조세를 마음대로 조정하거나 관리를 임명하고 행정과 군권을 행사하지 토지 자체가 개인 소유는 아니다.
그러나 비사성에서 사방 100리가 봉토지로 정해졌다면 산동 반도의 끝자락이 모두 최인범 개인 소유라는 것이다.
‘가정제가 드디어 돌았어.’
가정제야 본시 돌아 버린 마약장이라 그렇다고 해도 주변의 대신들이 가만히 놔뒀다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항상 명심하고 있는 것은 세상에는 공짜가 없으니 슬며시 물었다.
“그 토지 대신에 뭐를 준다고 했나?”
“조건은 없었사옵니다. 하지만 분위기로 봐서는 빨리 산동의 반란군을 공략해 주길 원하고 있사옵니다.”
“그거야 기본이고. 또 다른 조건은 없나?”
“전하, 소금만 충분히 보내주면 되옵니다. 공짜로 보내는 것은 아니고 비싼 가격으로 소금을 사겠다는 겁니다. 산동성의 제태국이 아마도 소금으로 북경을 상당히 압박하는 모양입니다.”
“알았어. 따로 뭘 주는 조건이 아니라니 협상을 잘 끝냈군.”
이렇게 말하지만 속으로야 춤이라도 추라면 추고 싶을 만큼이나 좋았다. 그러나 군주로써 채신머리없이 그리 할 수도 없고 또 해서도 안 된다.
더구나 자순의 공로를 너무 치하하면 나중에 그것이 큰 부담감으로 돌아올 수가 있어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차분하게 응수했다.
“황제가 쓸모도 없는 땅덩어리 집어 던져 주고 대신 목숨 걸고 싸워 달라는 뜻이군. 같이 협력해 군사를 동원해 합동 작전을 펴자는 것도 아니고.”
“아, 그렇군요. 소신이 미처 그 문제를 협의하지 않았네요.”
사실 합동작전을 펼치면 그야말로 힘들게 죽 쑤어서 미친개에게 주는 격이다. 그러니 가정제가 합동 작전을 하겠다고 요구해도 거절할 사안이다.
“자순 태감, 아무튼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 아주 큰일을 무사히 성사시켰군. 당분간은 푹 쉬도록 해.”
“넷!”
대답을 하고 나서 자순은 그제야 떠오른 표정으로 보고했다.
“전하, 건주 본위에서 군마 5000필을 보내주게 될 것입니다. 조건은 산동 반도의 반군 퇴치고요.”
“알았어. 군비 지원도 그런 정도로 끝낼 생각이군.”
이렇게 답하자 자순은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딴에는 큰일을 성사시켰다고 판단했으나 주군의 답을 들으면 결국 반쪽짜리 협상을 했다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후우! 나는 아직도 멀었어. 그렇게 중요한 내용을 협상하지 않고 그저 좋아서 돌아오기에 급급했으니.’
산동 반도는 이미 나라로 칭할 정도로 큰 세력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 제태국과 전쟁을 벌이면 엄청난 재화가 소모된다. 그런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튼 이외에 소금을 주고 2배가치 있는 비단을 가져 왔으니 이래저래 자순을 명나라로 보낸 외교술을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국제 관계에서 사실 싸우지 않고 필요한 것을 얻어낼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필요하면 전쟁을 결행해야 되겠지만 가급적 전쟁을 줄이는 것이 나중에 후유증이 적어.’
이제 비사성이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빨리 움직일 필요성이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최인범은 두 장관에게 지시했다.
“빨리 국무회의를 소집하라고 연락해. 장소는 단동의 남항에 있는 해군기지로 정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