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파오나 또는 그 안에서 잠자던 기마병은 물론 일부 말들까지 휩쓸려 커다란 길이 난 형태로 쩍 갈라져 버렸다. 적진을 완전히 가르고 목표한 낮은 언덕에 먼저 도착한 최인범은 그제야 말머리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두두두두.
이때 이도백하 쪽에서 수많은 기마병들이 나타났다. 모두 검은 무명옷인 군복을 입은 흑풍대다.
“됐어. 이번 기회에 본진을 완전히 소탕하자.”
“넷!”
조금 시간이 지나자 흑풍대를 이끄는 금일여가 보이고 그는 빠르게 다가와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으로 꿇고 고개를 숙여 군례를 올렸다.
“칸! 늦었습니다. 무사하니 다행이군요.”
“몇 명이나 왔나?”
“동여진족과 대치중이라 흑풍대는 모두 2천명입니다.”
“빨리 전열을 갖추어 돌진할 준비를 해.”
“넷!”
흑풍대가 전열을 갖추는 동안 친위대대 기마병들도 쉴 수 있었다. 다행이 경상자는 있지만 중상자나 사망자는 없었다. 아무리 방심한 적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고 하지만 친위대대원들의 능력이 뛰어나다 보니 거둔 결과다.
최인범은 잠시 친위대대원들을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자신의 위치도 전과 다르고 많은 병사를 데리고 다녀도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지역에 와 있다.
“철 중령, 아무래도 친위대대원을 연대급으로 늘려야 되겠어.”
“그렇게 하시면 저야 좋죠. 사실 그동안 은근히 불안했었습니다.”
“왜? 불안해?”
“태대장군님, 친위대대원의 능력이나 태대장군님의 무술이 뛰어나도 너무 적은 병력으로는 사실 위험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만날 적은 지금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병력도 많고 화포로 무장된 정예병인 군사들이니까요.”
“알았어. 동여진만 소탕하면 바로 새롭게 친위연대를 구성하도록 하지.”
그저 후방에서 지휘만 하는 성격이 아니라 친위부대의 수가 많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복속시킨다고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 반란군이 생길지 모른다. 감히 그런 생각을 못하도록 친위부대는 제일 강하고 병력의 수가 가장 많아야 한다.
2천명의 기마병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공격할 준비를 하는 중에 동여진족 진영도 전열을 정비했다.
“저 녀석들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군.”
“태대장군님, 제가 보기에는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뭐가 아니야?”
“저들은 지금 항복할 준비를 하는 중입니다.”
“뭐?”
여진족의 경우 특별히 소부족들이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중에도 살아남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그것은 최후의 결전을 하기로 결정이 나면 단 한 번의 교전으로 끝낸다는 점이다.
물론 그 교전에서 소부족장들 중에 최고 우두머리를 내세워 그가 죽으면 전쟁을 끝내고 복종하는 방법이다. 그 우두머리가 죽음으로 전력의 우위를 입증한 셈이라 살아남기 위해 철저하게 복종하게 된다.
여진족이나 몽골족이 모두 유목민이다 보니 철갑웅은 이런 특징을 잘 알고 있었다. 전열을 가다듬은 동여진족들이 소부족 단위로 나뉘더니 백기를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제일 먼저 도착한 무리들은 모두 비통한 표정으로 20구의 시체를 가져왔다.
“뭔가?”
“부족장과 그의 아들과 참모들입니다. 저희들은 모두 항복합니다.”
최인범과 친위대대원들이 중앙을 돌파하면서 죽인 무리나 무너트린 큰 파오가 바로 이들의 대표인 동여진족의 우두머리였다.
‘음! 운이 좋았군. 공교롭게 지휘부를 타격해 몰살시켰어.’
물론 동여진족이 항복하게 된 이유야 추가로 도착한 흑풍대 병력이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다소 싱겁게 전투가 끝났지만 사실상 동여진족은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흑풍대의 병력이 자신들 보다 정예기마병들이고 더구나 수에서도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동여진족은 이번에 동원한 1만5천명이 총병력이다. 그것도 말을 탈 수 있는 남자는 모두 동원해서다.
그에 비해 흑풍대는 이미 총 2만명으로 기마병의 수가 늘어나 있었다. 동여진족에 비해서는 모두 정예기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군사들이다. 그러나 그 수의 1만명은 이미 건주총감부 우위나 좌위 그리고 봉황성에 주둔하는 총감부 본위나 또는 수군으로 1만명이 흡수되었다.
1만명으로 축소된 흑풍대에서 5천명이 아패록의 사망으로 설화가 통화로 데리고 가자 5천명만 남는 전력의 공백이 생긴 것이다. 이를 틈타 동여진족이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던 것이다.
이도백하에 남은 5천명의 흑풍대를 포위해 수로써 제압하려고 했다. 그런 와중에 기습적으로 조선쪽에서 다가온 최인범과 친위대대원들의 공격으로 대표로 내세운 수장이나 참모 그리고 아들들이 죽어버렸다. 그러자 군세에서 도저히 안 된다고 판단하고 소부족장들이 협의해 재빠르게 항복한 것이다.
넓은 개활지는 장례를 지를 준비로 무척 바빴다. 큰 무리의 부족장 경우는 묘를 쓰기도 하지만 대부분 화장하는 풍습이라 커다란 나무더미가 준비되었다.
“철 중령, 여기서 친위 대대를 새로 구성하자.”
“넷!”
항복한 부족이 살아남는 조건이 있었다. 부족장들의 아들을 포함해 부족의 모든 젊은 용사들은 복속된 무리의 우두머리 옆을 지키는 친위대로 합류해 별도의 조직으로 충성을 바쳐야 한다.
부족장의 아들이나 용사들은 일종에 인질인 셈이다. 그리고 이런 방법은 새로운 강자의 측근으로 합류해 부족의 세를 늘릴 수 있게 되고 개인적으로 높이 출세할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남자들도 인질로 합류해야 하지만 여자들도 그런 풍습을 따르고 있었다. 소부족장회의에서 많은 여자들이 추천되고 있었다. 어떤 소부족에 속한 여자가 새로운 강자에게 시집을 가느냐에 따라 앞으로 동여진족에서의 위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보고를 받은 최인범은 졸지에 아내를 또 한명 받아 들여야 된다니 어이가 없었다.
“거절하면 모욕으로 간주하니 안 받아 들이기도 곤란하군.”
“그렇습니다. 칸, 어차피 부인이 한분만 있는 것이 아니니 한 명 더 늘려도 상관없지 않아요?”
“모르는 소리 하는군. 부인이 너무 많으면 그건 행복이 아니야 불행을 평생 떠안고 사는 거야. 아무튼 나는 어린 여자가 좋으니 되도록 13살 이하의 소녀로 선발하라고 해.”
“아,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나이 어린 소녀가 좋다는 거야 물론 거짓이다. 그저 당장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말살해 놓고 나중에 적당히 파혼하는 형식이나 또는 다른 부하에게 시집을 보낼 요량이라 이런 지시를 하는 것이다.
승리자에게 소부족들이 선발해 여자를 준다고 해서 꼭 아내로 맞이하는 경우는 없었다. 자신의 거처에서 같이 살면서 혼인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다만 여자를 거처에서 내보낼 경우는 소부족들이 이해할 만한 위치인 남자와 혼인을 시켜줘야 된다는 점은 있었다.
사실 조선이나 명나라 또는 역대 왕조들이 궁궐에 많은 궁녀들을 보유한 시초는 지금처럼 충성을 맹세한 소부족들의 딸들이 같이 모여 살면서 생긴 것이다. 그것이 차츰 차츰 변질되어 이제는 왕실이나 황실에 속한 궁녀라는 신분을 지닌 여자로 제도화한 것이다.
어린 소녀로 선택한다고 통보하자 소부족장들은 좋아했다. 다수의 소녀를 보낼 기회가 생기자 소부족들 사이에서 협의가 쉬웠기 때문이다.
“태대장군님, 20명을 선발해 봉황성으로 보내겠답니다. 모두 아직 너무 어리니 나중에 미모가 어찌 변할지 몰라 13살 아래인 소녀들로 선발해 20명을 보내니 나중에 칸께서 선택하시랍니다.”
“알았어.”
이미 명나라에서 파란 눈을 지닌 고아인 소녀들을 데리고 와서 대공주부 옆에 거처를 마련해 놓고 지내고 있으니 20명이 더 들어 온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 이런 식이면 무한정 늘어날 여지가 많았다. 동여진을 복속시켰지만 아직도 흡수할 부족들이 북쪽에 많이 남았으니 조금 다부지게 철갑웅에게 지시했다.
“동여진족이야 본래 같은 민족이니까 이렇게 수가 많아도 되지만 다음에는 지금 같이 많은 수를 받아들인다고 통보하지 말도록 해.”
“넷!”
장례식도 끝나자 최인범은 동여진족과 같이 이도백하로 가게 되었다. 외곽을 포위하고 있던 동여진족들은 이미 본진이 항복했다는 소식에 속속 이도백하로 모이고 있었다.
동여진이 복속되자 새롭게 군대를 개편할 필요성이 있었다. 연해주 쪽에는 조선 이외에는 어떤 위협을 줄만한 세력이 없었다. 그래도 만약을 생각해 군대를 주둔해둘 필요는 있었다.
‘만주와 연해주 전체를 놓고 새로 판을 짜야 되겠어.’
고심하던 최인범은 현재 큰 무리가 모여 사는 지역을 감안해 결정했다.
“동여진 지역은 앞으로 3개 예비 연대를 조직해 두도록 해. 총병력은 5천명으로 결정하고 기마병은 1천명 씩을 인솔해 데리고 가서 나중에 2천명까지 만들면 된다.”
“칸! 예비 연대는 어디에 주둔하죠?”
“우선 용정에 31연대, 훈춘에 32연대, 무단장에 33연대를 두도록 하고 금팔여, 금구여, 금십여가 소령으로 연대장을 해.”
“명을 따르겠나이다.”
앞에서부터 일련번호를 주는 방식이 아니라 나중을 생각해 30이후의 수를 예비연대의 부대 명칭으로 부여하는 것이다.
무단장의 경우는 북쪽에 사는 다른 부족과 접적지역이라 병력이 적을 수 있지만 그런 문제는 중앙군에서 지원해줄 생각이라 이렇게 정했다.
워낙 넓고 사람은 적은 땅이라 사실 큰 무리를 이루는 우두머리만 잡으면 소부족이야 저절로 흡수되니 굳이 많은 부대를 상주시킬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만주의 패자를 결정하는 것은 동쪽이나 북쪽이 아니라 요하 근처에 있는 심양에 있는 건주 본위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지금은 명나라에서 심양을 관리하기 때문에 어찌 되었건 허약해진 명나라지만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새로운 강자로 확실하게 결정되자 동여진의 소부족들도 축제를 즐기며 무술 겨루기가 있었다. 유목민이다 보니 기마술이나 궁술 경기가 대부분이다.
최인범은 무술 경기를 바라보며 철갑웅에게 물었다.
“동여진에서 5천명은 용사들 같군.”
“그렇습니다. 그들은 젊기도 하고 당장 전투에 내 보내도 전사로 활동할 정도가 됩니다.”
“그렇다면 5천명은 같이 봉황성으로 데리고 가야겠어.”
“넷!”
이어서 이도백하, 통화, 환인도 모두 30, 29, 28 예비연대를 두고 그곳에는 금오여, 금육여, 금칠여를 소령인 연대장으로 배치하기로 결정되었다. 어떤 규모나 어떤 부족을 상주시킬지는 통화로 가서 설화와 협의해 최종적으로 결정할 사안이다.
“칸, 나머지 기마병들은 모두 어찌하죠?”
“그야 서쪽으로 가서 새로 연대를 구성해야지.”
“알겠습니다.”
“두만강이나 압록강 북쪽도 기마부대는 항상 상주해야 되니 고향을 떠나기 싫다는 기마병을 강제로 데리고 가지 말고 본인이 원하면 데리고 가도록 해.”
“넷!”
동여진족들도 고향으로 돌아갈 사람은 떠나고 있었다. 그들은 3명의 연대장들과 같이 이동했다. 흑풍대에 속했던 기마병들은 1천명만 데리고 가게 된다. 그 때문에 남게 되는 2천명과 동여진 출신 5천명은 최인범을 따라 통화를 향해 이동했다.
어린 부족장인 아진태와 설화가 있는 통화로 이동하며 최인범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꼭 그래야 하나?’
건주 우위라고 불리는 아패록이 이끄는 무리를 완전히 장악하려면 하기 싫어도 반드시 그런 절차가 필요하다니 매우 심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