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격렬비열도 해상에 도착한 10척의 소금 배들은 일단 한곳에 모여들었다. 배의 우두머리 사공인 선장들이 모여 뭔가 수군 거렸다.
조금 지나자 그들은 모두 합의가 끝났다는 듯이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다. 서해 해상의 외딴 섬들이 모여 있는 해역에서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으아악! 살려주세요.”
탐욕으로 이성을 잃어버린 인간이란 때로는 상상하기 힘든 잔악한 짓을 저지른다. 이미 악심을 단단히 품고 있던 사공들은 격렬비열도에 도착하자 정난정을 비롯한 여종 5명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먼저 우두머리인 선장이 지나가면 다음에는 사공들이 덮쳤다. 소금 배를 몰고 한양으로 향하던 사공들의 천인공노한 악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재물이 뭐고 소금이 뭐 길래 이들은 탐욕으로 눈이 뒤집혀 버렸다. 결국 여자들을 잔인하게 유린하고 포대자루에 넣어 깊은 바닷물 속으로 던져 버렸다.
풍덩! 풍덩!
그들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6명의 여자들을 죄의식이 전혀 없이 바다에 던져버리고 소금 배를 끌고 서쪽으로 향했다.
선두에 있는 소금 배의 선장이 다른 배의 선장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산동 반도로 가자.”
“그럽시다.”
도망칠 장소로 봉황성도 대상으로 떠올랐으나 조선과 봉황성의 관계가 좋으니 결국 산동 지역을 택했다. 사공들은 합심해서 고향과 처자식도 버리고 소금 배를 끌고 산동 반도로 도망치는 것이다.
“그곳으로 가서 소금을 팔아서 제태국 사람으로 떵떵거리고 사는 거야.”
“암! 이만한 소금이면 부자로 산다고.”
앞날이 밝아 졌다고 판단하는 사공들이 6명의 여자들을 수장한 격렬비열도 해역은 잔잔한 파도만 일렁이고 매우 고요했다.
끼륵, 끼륵.
여전히 갈매기와 이곳에 서식하는 매만 하늘 높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조금 지나서 깊은 바닷물 속으로 빠졌던 여자들 중에 한 명이 물위에 불숙 떠올랐다. 죽은 것 같은 여자의 몸은 파도에 떠밀며 섬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사방이 절벽으로 된 섬이라 여자의 몸은 파도에 떠밀려 이리저리 떠돌다 드디어 작은 백사장으로 가서 멈추었다. 파도의 힘으로 여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죽은 시체와 같았던 여자는 아주 미세하게 꼼지락거렸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단검이 들려 있었다. 포대자루를 찢고 빠져 나온 것이다.
“으으윽!”
가늘게 신음을 토하던 여자는 산발된 머리를 슬며시 쳐들고 힘들게 엉금엉금 기어갔다. 드디어 파도가 미치지 못하는 바위틈에 있는 작은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덜덜덜.
깊은 바닷물에 빠지는 죽음의 길에서 겨우 살아난 여자는 정난정이다. 맺힌 한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지독해서 그러지 정난정을 아직은 살아남았다. 그녀는 무인도인 격렬비열도의 바위에서 주워서 떨리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와들와들 떨었다.
‘너무 추워!’
참으로 질긴 목숨이고 또 곡절이 많은 인생을 사는 여자다.
그녀는 무인도인 작은 동굴에서 떨면서 밤을 지세고 아침이 되자 서서히 몸을 움직여 바위틈을 뒤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많이 있는 갈매기 알을 찾는 것이다.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놈들에 대한 복수심도 모두 잊었다.
그런 것은 여기서 살아 난 뒤에 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일이다. 그저 이 순간 무인도인 섬에서 살아야 한다는 집념 하나로 움직이고 있었다.
흐느적흐느적.
나무도 없고 풀만 보이는 무인도인 섬에서 살아남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정난정은 눈에 파란 독기를 품고 살아남기 위해 힘들지만 부지런히 움직였다.
추운 겨울의 밤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정난정은 우선 갈매기 알로 요기를 면해 약간 기운을 차렸다. 마른 풀을 모아서 새끼처럼 꼬고 단단히 뭉쳐 등에 짊어지고 동굴로 갔다. 동굴의 입구를 마른 풀로 틀어막아 바닷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조금은 피할 수 있었다.
정난정은 잘 돌아가는 머리로 혼자서 살아남는 방법을 연구했다.
탁! 탁!
단단한 돌과 단검을 부딪쳐 동굴 안에 작은 모닥불도 피웠다. 살려고 노력하다 보니 섬에는 의외로 많은 물건들이 있었다. 하나하나가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모두 그녀의 소중한 삶의 도구들이다.
‘좋은 것들이 많아.’
육지에서 떠밀려 왔는지 아니면 난파선 잔해 인지는 모르지만 각목이나 판자도 있었다. 너덜너덜한 헌 옷인 무명이나 삼베옷도 있었다.
“어머나, 명나라 옷이야.”
어미가 관비 출신이니 어려서 천민으로 살았다.
제법 개구리헤엄도 칠 줄 알아 바다가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물론 평소 같으면 깊은 바닷물이 너무 무서워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겠지만 뭐든 먹어야 하니 자맥질하는 수밖에 없었다.
‘갈매기 알로는 버틸 수 없어.’
바위틈에 있는 이끼와 같은 것도 말리고 또는 미역도 거두었다. 여럿이 살기는 힘들지만 부지런만 하면 먹은 것은 의외로 많았다. 정난정은 이곳에 물고기가 많다는 것을 알자 희망이 생겼다.
“분명히 어부들이 이곳으로 올 거야. 언젠가는 올 거야.”
정난정은 어부들이 이곳으로 오길 기다리며 추운 겨울을 무인도에서 외롭고 힘들게 보내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독해진 정난정의 독심 때문에 겨울의 추운 바닷물이 오히려 따듯하게 느껴질 정도다.
한편 최인범은 함경도로 이동하다가 여진의 족장인 아패록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급하게 서찰을 써서 근접경호원들에게 왜에서 가져온 면포를 비롯해 부산포와 공주에서 획득한 면포의 일부를 넘겨주며 지시했다.
“이 소위, 이 서찰과 증거인 면포를 한양의 한정문 참판에게 전해.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고 바로 주상전하께 비밀리에 전하라고 해.”
“넷! 바로 떠나겠습니다.”
다른 근접경호원인 소위에게도 서찰을 넘겨주며 명령했다.
“장 소위는 바로 봉황성으로 가서 서찰을 자순 태감에게 전하고 총감부 좌위 연대장인 장익덕에게 휘하의 기마병을 모두 이끌고 우위가 주둔하고 있는 환인으로 오라고 전해.”
“명을 따르겠나이다.”
전에는 어찌 되었는지 모르지만 명나라에서는 압록강과 접해서 사는 건주 여진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건주 본위. 좌위. 우위가 있었다. 건주 본위는 멀리 심양에 있다. 직책으로는 최인범이 위에 있지만 별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입장이 아니다. 그리고 요동의 철령위에는 조선 출신인 이씨들이 지휘첨사를 세습하고 있었다.
건주 좌위는 전에 최인범을 암살하려다가 족장이 죽어버리고 신분패인 반월도를 탈취 당했다. 그 사건으로 사분오열로 나뉘어 다투다가 완전히 와해되어 최인범이 이끄는 봉황성의 군사나 또는 건주총감부 소속의 좌위로 흡수되었다.
죽었다고 소식이 들어온 아패록은 설화의 양부로 건주 우위의 수장이다. 비록 지금은 군세가 약해져서 설화가 이끄는 흑풍족에게 뒤진다고 하지만 그가 지닌 여진족에서의 권위는 굳건하게 남아 있었다.
‘빨리 가서 건주 우위를 완전히 흡수해야 돼.’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서는 전투만이 능사가 아니다. 싸우지 않고 건주 좌위를 완전히 흡수할 수 있다면 군세가 대폭 확장될 수 있었다.
‘주상이 내가 보낸 편지를 받으면 야속하다고 하겠지만 나를 도울 수밖에 없어.’
주상의 큰 약점은 효심이 너무 깊다는데 있었다. 평화로운 시절에야 군왕으로 머리도 좋고 합리적이라 좋은 성품이지만 지금은 명나라, 왜, 여진이 모두 난세로 접어들었다.
자신이 알아낸 비밀은 조선의 주상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기도 안차게 윤 대비가 나를 노리고 한양의 검귀 조직을 왜로 보냈어.’
암살범들이 충남 공주에서 말을 사기위해 넘겨준 면포에는 왕실에서 찍은 인장들이 있었다. 하카타에서 증거로 가져온 면포와 같은 면포를 부산포에서도 발견했었다. 하지만 그 면포에는 인장을 찍은 부위를 잘라내서 없었다.
공주로 와서 확인하니 그 마방에서 검귀들이 넘겨준 면포에는 인장이 찍혀 있었다. 더구나 내수사(內需司)에서 대비 전으로 보낸 표시가 있었다.
‘마방 주인이 딸의 혼수로 쓴다고 팔지 않아 쉽게 증거를 수집했으니 운이 너무 좋았어.’
궁중의 물건을 함부로 외부로 반출하지 못하게 취하는 조치로 내수사 인장과 더불어 언제 대비 전으로 면포를 보냈는지 인장이 찍혀 있었다.
‘갑자기 내가 왜로 넘어가자 너무 급해서 그것까지 감출 생각을 미처 못 해서 다른 면포와 바꾸지 못하고 검귀 조직에게 면포를 넘긴 거야.’
효심이 깊은 주상은 왜까지 검귀를 보내 암살을 시도한 윤 대비를 어찌 처리할지 훤했다. 그저 감추려고만 할 것이 분명했다.
‘어려서 키워준 정도 있으니 폐서인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고 아마 고심하겠지.’
외삼촌도 2번이나 암살을 시도하고 윤 대비도 왜로 검귀를 보내 암살을 시도했으니 조선 왕실은 최인범에게 큰 약점이 잡힌 것이다.
다른 어떤 명분만 더 추가되면 그런 내용을 발표하고 조선 땅으로 군대를 밀고 내려올 명분은 축적된 것이다.
‘이런 비밀은 감춰둘수록 효과가 더 크고 이용가치가 높아.’
자신이 힘을 지니기 전까지는 이 비밀은 숨겨 놓을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아패록이 죽자 상황이 급해져서 서둘러 주상에게 알린 것이다.
최인범은 덕원부(원산) 도착하자 친위대대원들에게 명령했다.
“이제부터는 강행군을 하게 되니 비상식량을 단단히 챙기고 모두 소주들을 챙겨.”
“넷!”
개마고원으로 가는 길은 산악 지역이고 앞으로 최대한 빨리 이동할 생각이라 개인장구를 다시 점검하도록 지시했다. 명령을 받은 친위대원들은 다소 여유롭던 태도를 바꾸어 긴장한 상태로 장비들을 챙겼다. 이들은 반 이상이 전에는 아패록 휘하에 있던 여진족이라 자칫하면 같은 종족끼리 전투가 벌어질까 걱정이다.
“설마 전투는 벌이지 않겠지?”
“그렇겠지만 그것은 그곳으로 가봐야 알지. 칸께서 도착하기 전에 설화 아씨께서 완전히 장악했으면 싸우지 않을 수도 있고."
이들이 걱정하는 문제는 최인범은 이미 대비해 놓은 상태다. 그것이 걱정이 아니라 얼마나 빨리 그곳으로 가서 설화가 지휘하는 흑풍대와 건주 좌위와 함께 군세를 이루어 동여진을 굴복시키느냐가 관건이다.
동여진은 조선과 친하다. 그들이 조선을 믿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것 같아서 주상에게 서찰을 보낸 것이다.
‘결국 동여진을 협조해서 우리에게 대적하지는 못할 거야.’
물론 그것만이 아니다. 최인범은 조선에게 상당히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었다.
한편 한양에서 최인범이 기마병을 이끌고 떠나 다소 조용했었다. 그러나 주상의 근무처인 편전(便殿)에서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으음! 이럴 수가. 어마마마께서 기어이 이런 사건까지 벌이시다니.”
편전에는 한정문 참판이 독대하고 있었다.
“전하, 어찌 처리하옵죠. 이런 사실을 그대로 인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없던 일로 덮을 수도 없으니 실로 난감하옵니다.”
“동여진이 협조해달라고 요구해도 거절하도록 함경북도 병마사에게 파발을 보내시오. 그리고 의주로 연락해 소금과 벼를 싣고 간 대맹선 50척은 모두 봉황성으로 넘기도록 하시오.”
“폐하, 그리되면 세곡의 운반에도 차질이 생기옵니다.”
주상은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하교를 내렸다.
“그렇다고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지 않소. 더구나 대맹선의 가격은 모두 정상적으로 값을 쳐준다고 하니 좋게 생각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