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웃고 우는 여자. 비웃는 남자>
최인범이 한양으로 올라오는 가운데 이런 황당한 벽서가 나돌자 조선의 조정은 발칵 뒤집혀 버렸다. 벽서는 모조리 수거되어 자연히 주상에게 보내졌다.
도승지가 벽서를 주상께 바치며 보고했다.
“전하, 이런 벽사가 도성의 성벽에 나붇고 같은 내용의 작은 벽사가 살포되었사옵니다.”
주상은 벽서 내용을 읽어 보고 한숨을 토했다.
“허어! 태대장군이 한양으로 올라오는 중차대한 시기에 이런 벽서가 한양에서 나돌다니. 포도대장에게 빨리 연락해서 벽서를 살포한 범인들을 추포하시오.”
“예이.”
주상의 명을 받은 좌우포도청에서는 포청에 속한 포교나 포졸을 총동원해서 벽서를 붙이거나 살포한 범인을 잡기 위해 도성 안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주상은 아무래도 이간계를 쓰기 위해 벽서를 뿌린 것으로 판단했다. 자칫하면 자신이 그토록 살리려고 하는 윤임이 모함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문초해야 되는 상황이 올 수 있었다.
‘그렇지, 상대방이 이간계를 쓰면 고육계로 대응하라고 했어. 지금은 고육계를 쓸 때야.’
주상은 어쩔 수 없이 도승지에게 하명했다.
“즉시 좌상 대감에게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 빨리 멀리 낙향하도록 전하세요.”
“명을 받들겠나이다.”
주상은 외삼춘을 살리고 싶은 마음에 결국 사직시키고 낙향하게 조치를 취해 일종에 고육계를 쓰고 있었다. 또 어찌 생각하면 그렇게 해야 순리고 최인범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방편이다.
주상의 명을 받은 윤임은 명에 따라 좌의정에서 병 때문에 물러난다는 상소를 올리고 서둘러 식솔을 모조리 데리고 한양에서 떠났다.
주상은 그것으로 부족해 벽서를 살포한 범인을 잡기위해 사간원이나 사헌부 관리도 총동원했다. 그리고 여자수사관 역할을 하는 다모(茶母)까지 총동원해 범인을 찾게 되었다.
병조참판인 한정문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용호영의 병사들도 모두 동원해서 도성 밖을 포졸들과 같이 규찰해 보시오.”
“예이, 명을 받들겠나이다.”
이런 사건의 범인을 잡는 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주상은 최선을 다해 범인을 잡으려는 노력이라도 최인범에게 보여줄 심산으로 공권력을 총동원하는 것이다.
‘동생이 오해하면 안 되는데 정말 큰일이야.’
주상의 지엄한 명령이 떨어지자 사대 성문은 자연히 검문검색이 심해지고 저잣거리는 규찰이 심해졌다. 또한 한강의 모는 나루터에서도 규찰하는 포교나 포졸이 증가되어 검문검색을 강화했다.
길거리에서도 포졸들이 행인을 잡고 불심검문을 하고 있었다. 봇짐을 메고 가는 상인을 보자 붙잡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포졸이 다그치듯이 물었다.
“자네, 그 봇짐을 당장 풀어 봐.”
“왜요, 저는 잡상인으로 봇짐에는 면포뿐입니다.”
“빨리 풀지 뭐하나? 관아로 가서 불러 볼 것인가?”
“알았소. 보여 드리죠.”
기찰이 아주 심해지자 도성의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그런 가운데 서대문 밖의 주막에서는 백삼수가 김 상궁과 같이 있었다.
사내의 정이 그리워서 인지 단순한 욕정인지 모른다. 하지만 두 번 다시 사내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김 상궁은 또 다시 주막을 찾아왔다. 금지된 사랑을 나누는 짜릿함은 그녀에게 백삼수를 버릴 수 없다는 진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이 남자가 내 첫사랑이고 첫 남자야.’
김 상궁은 진하게 정사를 나누고 줄줄 흐르는 땀방울을 무명수건으로 대충 훔쳤다. 무명 치마저고리를 급하게 챙겨 입으며 여전히 아쉽다는 듯이 계속해서 허벅지를 더듬고 있는 백삼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리, 한양에서 떠나야죠. 벽서가 나돌아 포청의 규찰이 아주 심해졌는데요.”
“벽서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한양을 떠나? 더구나 며칠 전부터 주모가 안보이던데. 그 여자도 없어서 여비도 타가지 못하니 한양을 떠나기도 힘들어.”
백삼수는 속으로야 매우 불안하지만 은근히 배 째라는 듯이 버티겠다고 했다. 그러자 김 상궁은 다급한 목소리로 사정했다.
“나리, 제가 떠날 여비와 장사 밑천을 만들어 드리죠. 내일 만나서 드릴 것이니 한양에서 당분간 떠나세요.”
“소개해 준다는 윤 과부는 어쩌고?”
“그 분은 다음에 꼭 소개해 드릴 것이니 나리께서는 일단 한양을 떠나세요.”
김 상궁은 뭔가 몹시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백삼수에게 한양을 떠나 있으라고 권했다. 백삼수는 김 상궁이 무슨 짓을 저질렀다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이 여자가 벽서를?’
이런 생각이 들자 겁이 많은 백삼수는 한양을 떠나 있기로 마음먹었다. 병법에 세가 너무 불리하면 주위상(走爲上)이라고 멀리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좋은 계책이다.
‘한양이 너무 뒤숭숭하니 잠시 수원으로 가서 지내야 되겠어.’
주모가 갑자기 사라진 뒤로 나타나지 않은 것도 찜찜했다. 꾸물거리다가 최인범이 한양으로 올라와 월녀에게 함부로 수작을 걸었다는 사실을 알면 또 어찌 될지 모른다.
기본이 멍석말이고 자칫하면 자신의 최고 무기가 톱날달린 대검에 삭둑 잘릴 수 있다. 전에 월녀에게 수작을 걸다가 치도곤을 당하고 또 다시 수작을 걸면 물건을 대검으로 잘라 버리겠다고 엄중하게 경고를 했었다.
아무리 겁나도 허약한 맨몸으로는 도저히 한양을 떠날 수 없어 부드럽게 물었다.
“여비는 어떻게 마련하려고.”
“제가, 마님의 패물을 가져다주죠. 그리고 상평통보도 드릴 겁니다.”
“알았어. 나는 내일 떠날 것이니 꼭 약속 지켜.”
다음날 점심때가 되자 주막으로 다시 찾아 온 김 상궁은 백삼수에게 많은 패물과 상평통보까지 넘겨주었다.
“다음에 어디서 만나지?”
“나리, 다음에는 동대문 쪽이 좋겠네요.”
“알았어. 내가 이 돈으로 재물을 모아서 동대문 밖에 주막을 차려놓지. 항상 주막 문 옆에 꽃을 꽂아 놓지. 그대를 애모하는 마음을 담아서.”
“알았어요. 내년 봄에는 오셔도 될 것 같으니 그때 개나리꽃이나 항상 꽂아 놓으세요.
“좋은 생각이야. 봄소식과 함께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는 연인이 만나게 되니 좋지.”
백삼수는 재물을 주자 기분이 너무 좋아서 전에는 전혀 안하던 달짝지근한 말을 마구 토해냈다. 서로 만날 약속을 굳게 하고 나자 두 사람은 헤어졌다.
한편 왕십리에서 지내는 책사인 자순 태감은 한양에서 기찰이 심해지며 갑자기 윤임이 사라지자 슬며시 병조참판을 만나 물었다.
“갑자기 좌상을 멀리 떠나보낸 이유가 뭐요?”
“건강이 나빠져서 낙향한 겁니다.”
“무슨 소립니까? 제가 며칠 전에 말을 타고 펄펄 날라 다니는 것을 봤는데요.”
그러자 한정문은 곤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구차한 변명을 토했다.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그렇습니다.”
“아, 그런 불상사가 있었군요.”
이렇게 응수하고 나서 자순은 조용히 물었다.
“제가 환관인 것은 아실 일이니 대궐로 들어가서 대비마마를 만날 수 있나 주선 좀 해주세요. 전에 공주님과 혼담 이야기가 있었으니 제가 한 번 만나서 대비마마의 의중을 알아보고 싶군요.”
“알겠소. 그럼 나를 따라 오시오.”
한정문의 뒤를 따라 대궐로 들어가는 자순은 묘한 웃음을 흘렸다.
‘말은 무슨 말. 가마만 타고 거드름 피우고 다니던데.’
주군을 비난하는 벽사가 붇자 주상이 윤임을 살리려고 급하게 사직 시키고 낙향하게 지시했다는 것이 명확했다. 자순은 문뜩 이런 것도 고육계인가 생각했다.
‘역시 주군과는 병법을 쓰는 차원이 달라. 주군께서는 옥체를 상하게 하는 정도로 고육계를 쓰는데 수준이 너무 애들처럼 낮아.’
아무리 환관이라도 대비를 함부로 만날 수는 없으니 절차가 필요했다. 그래서 서성이다가 결국 대비전의 허락이 떨어지자 자순은 김 상궁의 뒤를 따라 대비전으로 가게 되었다.
조금 앞서가는 김 상궁의 뒤태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흠! 사내의 큰 물건 맛을 보더니 걸음걸이가 약간 어기적거리고 다르군.’
자순은 여기로 오면서 많은 정보원을 데리고 왔다. 물론 모두 한양의 왈짜패나 또는 무당이나 기생과 연결된 무뢰배들이다. 개똥도 잘만 쓰면 약이 된다고 한다. 자순을 그들을 이용해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더구나 한양의 정보에 밝은 최월녀를 만나서 수많은 고급 정보를 알아냈다. 그래서 백삼수가 대비전의 김 상궁과 놀아난 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윤 대비를 만나자 그녀는 시종일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진심으로 좋은 일이 많아 웃음을 감출 수가 없다는 표정이다.
자순은 공주와 혼담이야기를 하며 지금 주군께서 거둔 여자를 모조리 나열했다. 자순은 혼사가 목적이 아니라 윤 대비의 태도를 직접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정작 혼사야 거론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대화를 나누고 밖으로 나왔다.
‘흠! 기회에 윤임을 내쳤으니 어부지리를 얻었다고 윤 대비가 너무 좋아하는군.’
책사인 자순 태감은 조선을 가상의 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조선의 조정을 상대로 고육계(股肉計)를 펼쳐 혼수모어(混水摸魚) 상태로 만들어서 소리장도(笑裏藏刀) 수법을 펼치고 있었다.
한편 기찰이 심해진 마포나루에 백삼수가 젊은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양에서 뭔가 큰일을 꾸며 보려던 백삼수는 도성에서 갑자기 벽서가 나돌며 규찰이 너무 심해지자 변장하고 도망치는 중이다.
종종거리는 걸음걸이는 누가 보더라도 젊은 여자다.
‘여자로 변장하면 충분히 도강할 수 있어.’
아무리 규찰이 심해도 조선은 예를 숭상하니 여자로 변장하면 마포나루를 넘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품에 안고 있는 보따리에는 김 상궁을 은근히 협박해 탈취한 고급 폐물들이나 상평통보가 들어 있었다. 그동안 죽을 고생하고 세월이 지났으나 도로 여장한 방물장수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규찰 제도가 있어 한강을 넘기가 쉬울 수 없었다.
더구나 자신은 이미 새끼줄이 길게 처진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줄을 서고 있다. 주변에는 포졸들이 힐끗거리며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여장한 백삼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마포나루에는 다모(茶母)가 면으로 포장이 처진 장소에서 여인들의 몸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삐릴리. 삐릴리.
요란하게 음악이 울리며 남대문 쪽에서 많은 군사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소리를 자세하게 들어보니 아무래도 주상께서 대궐을 급하게 나와 마포나루로 다가오는 것이 분명했다.
‘헉! 그럼!’
문뜩 뭔가 떠올라 급하게 한강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룻배를 타고 마포나루로 건너오고 있는 무시무시한 최인범이 보였다. 더구나 그의 옆에는 언월도를 든 더 무섭게 생긴 호위병들이 있었다.
‘헉! 꼼짝없이 죽었어.’
이거야 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로 완전히 독안에 든 쥐의 신세가 되었다. 백삼수는 순간 여기가 자신이 죽을 자리라는 느낌이 오자 다리가 심하게 저려와 도저히 서있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달달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