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숨겨진 궁중의 비사들>
시모노세키 항구를 떠나 간몬 해협을 지나는 20척의 판옥선을 빠르게 현해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최인범이 왜에서 가지고 가는 것은 황, 후추, 구리, 은으로 특히 은괴가 상당히 많았다.
내기바둑을 두어 딴 은괴도 있고 4명의 대상인 재산을 몰수해 챙긴 은괴도 있다. 또한 요시타카로부터 받은 은괴가 포함되자 은괴는 모두 200짝이 넘었다.
은의 생산량이 많은 왜라고 하지만 거의 2년을 생산해야 되는 엄청난 양이다. 물론 앞으로 호랑이가 도망쳐 안전해진 오우치 가문의 영역인 서쪽 지역에서 은광이 다시 활발하게 개발되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현해탄에 들어서자 2개의 돛을 높이 올리고 바람의 힘으로 전진하자 격군들은 그제야 쉴 수 있었다. 격군장이 격군들에게 명령했다.
“조별로 갑판으로 올라가 쉬며 무기를 손질하도록.”
“넷!”
한 개의 노에 4명의 격군이 배치된 판옥선의 경우 해상 전투를 원활하게 하려면 예비로 격군이 더 필요했다. 왜의 경우는 주로 적선과 접촉해 백병전을 위주로 전투를 벌인다면 조선의 수군은 함포사격으로 적선을 격침시키는 전술을 채택하고 있었다.
물론 이제 봉황성 해군으로 변해 당연히 함포사격에 치중하는 전술을 채택하고 있었다. 규슈를 일주하고 수시로 해상훈련이나 지상 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해군들은 이제 완전히 정예화 되었다.
측풍을 타고 빠르게 부산포로 향하는 판옥선의 제일 위에서 최인범은 측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먼저 시종인 대마불에게 물었다.
“마불아, 너는 앞으로 뭐를 하면서 살고 싶냐? 내 옆에서 시중드는 일을 그만두면?”
“그야 해군에서 근무해야죠.”
“그렇다면 너는 힘들어도 함대와 같이 가라.”
“넷!”
본시 부모가 모두 탐라에서 해녀로 살았기 때문에 대마불은 바다와 친숙해 해군이 좋아 보이는 것 같았다. 이미 대마도주가 친아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굳이 그것을 서로 발설하지는 않았다.
철갑웅이 왜에서 쉽게 떠나는 것이 아쉬웠는지 슬며시 입을 열었다.
“태대장군님, 왜 규슈를 완전히 복속시키지 않고 떠나죠?”
“그야 우선 복속시키려면 봉황성의 군대가 규슈에 주둔해야 하니 그렇게 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렇지. 우리야 왜를 혼수모어 상태로 만들고 필요한 만큼의 이득만 취하면 되는 거지.”
혼수모어(混水摸漁)란 물을 흐리게 해서 물고기를 잡는 다는 뜻이다. 왜가 호랑이 때문에 혼란한 틈을 타서 필요한 재화나 또는 교역을 성사시켰으니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이런 정도에 만족한 것은 욕금고종(欲擒故縱)의 전술로 큰 이득을 위해 작은 것은 과감하게 내어주는 방법이다. 달리 생각하면 보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때로는 먼저 양보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최인범은 부하들에게 다시 강조했다.
“세상사란 너무 과한 욕심을 화를 불러오니 적당한 선에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해.”
“그렇군요. 앞으로 명심하겠습니다. 태대장군님.”
최인범은 부하들에게 앞으로 전하라는 호칭은 사용하지 말도록 했다. 그 이유는 정신병자에 불과한 가정제가 내린 군왕의 거창한 허명 보다는 실익을 택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공연히 조선의 까칠한 선비들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태대장군의 호칭은 이미 왜인들도 모두 사용했고 그런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산포에 도착하면 친위대대의 1중대는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가고 2중대는 죽령을 넘어서 한양으로 가도록해. 나는 추풍령을 넘어서 올라갈 것이니 그리 알고.”
“넷!”
“한양으로 올라가면 도성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모두 왕십리의 용호영 주둔지에서 대기해.”
“알겠습니다.”
이렇게 지시하는 이유는 조선으로 들어가면 자신은 일정에 변화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인범은 부산포에 도착하면 면포와 자객들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으로 그들의 행적을 추적할 요량이다.
그러니 앞으로의 일정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 미리 친위부대원들의 행선지를 지시하고 나서 1함대장인 김신완 대위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되도록 먼 바다를 통해 추자도를 들려 보급을 받고 홍도를 지나서 봉황성으로 올라가도록 해. 남해안의 섬들과 가깝게 접근해서 공연히 조선을 시끄럽게 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이미 자신 때문에 역사가 너무 많이 변해 앞으로는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태로 변했다. 중종이 일찍 죽고 인종이 즉위해 건강한 몸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명나라의 임인궁변도 원 역사와는 다르게 엉뚱한 여자가 황후로 책봉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가정제의 수시로 가사상태에 빠지거나 정신 상태는 아주 심할 정도로 분열 증세를 보인다고 했다.
최인범은 아직 모르지만 왕미미도 전과는 다르게 많이 변했다. 가정제의 씨가 아닌 다른 남자의 씨를 받아서 후계자를 삼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으니 그녀도 정상은 아니었다.
가정제는 살아남기는 했지만 정상적으로 조정의 업무를 관여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래서 황제 대신해서 국정은 황후인 왕미미가 마음대로 요리하는 형국으로 변했다.
드디어 멀리 부산포가 보이자 친위대대원들은 하선 준비에 바빴다. 말에 안장도 올리고 무기들도 챙겨들고 배낭도 메는 등의 개인 장비를 챙겼다.
부두에 판옥선이 접안하자 최인범은 먼저 내려 하선하는 친위대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혹시 개인장비를 빠트린 것이 있나 눈으로 군장검사를 하는 것이다.
개인이 소지해야 하는 단창이 2자루인데 한 자루만 든 병사를 보자 물었다.
“왜 한 자루인가?”
“세워놓고 변을 보고 돌아와 보니 사라졌습니다.”
“군기가 너무 빠졌군.”
개별적으로 확인해 보니 의외로 많은 병사들이 개인장구를 분실했다. 팔아먹지는 않았지만 왜녀들에게 정표라고 무기를 준 녀석도 있고 분실한 경우가 많았다.
최인범은 중대장들에게 지시했다.
“다시 군장검사를 세밀하게 해서 하나라도 빠진 병사는 임시로 2중대에 속하게 재편성해서 풍기로 가서 개인장구를 모두 개별적으로 구입해 한양으로 가도록 해.”
“넷!”
풍기에는 이미 조정의 용호군에게 군 장비를 납품하는 공장이 있으니 그곳을 들리면 충분히 구입이 가능해 이런 지시를 내린 것이다. 친위부대원들이 모두 떠나고 나자 최인범은 함대장에게 다시 당부했다.
“절대로 해안에 접근하지 말도록 해.”
“넷!”
함대는 추자도, 홍도, 고군산열도, 백령도를 경유해 보급을 받고 압록강 하구인 단동으로 가게 된다. 그래서 지나는 섬에서 보급 받는 문제에 대해서도 지시했다.
“경유하는 섬들의 주민에게 사소한 것도 피해를 주지 말고 반드시 일반 보급품은 물론 식수도 은괴를 줘서 구입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식수까지 은괴를 주라고 명령하자 다소 황당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정도로 섬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대가를 치르고 보급을 받으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이윽고 부산포에서 보급을 받은 판옥선 20척은 봉황 깃발을 휘날리며 서쪽으로 떠났다. 많은 은괴를 싣고 가니 중간에 난파될 수도 있어 은근히 걱정이다.
부하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나자 최인범은 이창수에게 명령했다.
“그림을 가지고 부산포 근처의 주막이나 마방을 모조리 확인해.”
“넷!”
20명의 근접경호원들이 주막과 마방을 확인해 보니 얼굴에 칼자국 때문에 쉽게 그들의 행선지를 알아냈다.
“태대장군님, 주모의 말에 충청도 공주에서 말을 갈아탔다고 합니다.”
“알았어. 그럼 본래 계획대로 추풍령을 넘어서 지난번과 같이 이동하면 되겠네.”
그러자 철갑웅이 즉시 물었다.
“금산에 가서 춘향아씨를 만나려고요?”
이런 물음에 최인범은 빙그래 웃으며 답해 주었다.
“이놈아, 춘향이는 남원에 가야 있지. 아직도 금산에 춘향이가 있냐? 있으면 인삼아가씨가 있는 거지.”
옆에서 이런 농담을 듣는 이창수 중위는 도통 알아듣기 힘든 대화다. 근접경호원들은 개인장구가 부족하지 않아 주막에서 소주만 사서 호리병에 담고 빠르게 북쪽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가 북쪽으로 올라가는 가운데 한양에서는 이미 파발을 통해 최인범이 왜에서의 군사 활동을 끝내고 한양을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양은 얼마 전에 국상이 나서 슬픔에 잠겼다가 다시 새로운 활기 넘지는 큰 변화가 있었다.
국상이란 어렵게 잉태한 왕후가 출산을 앞두고 돌연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모 자리는 하시도 비워둘 수 없다고 해 간택령이 발표되어 새로운 중전으로 대마도호부사인 민천복의 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역사에는 없는 민비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사실 민천복은 최인범에게 시집보내려던 딸을 왕비로 보내게 되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노릇을 어쩌나. 딸을 시집보내 은혜를 갚으려고 했더니 일이 틀어졌어.’
은혜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북방의 맹주로 떠오르는 최인범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왕비는 첫날밤에 바로 임신을 해서 왕실이나 조정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런 가운데 드디어 최인범이 한양을 향해 올라온다는 소식에 조정은 술렁이고 있었다. 그는 누가 뭐라던 명나라 황제로부터 군왕으로 책봉을 받은 인물이다.
의례를 담당하는 예조에서는 이 때문에 연일 격론이 오가고 있었다.
“한양으로 올라오면 어찌 맞아야 한단 말이오?”
“주상께서 최소한 마포 나루까지는 마중을 가야 되지 않겠소.”
“그건 너무 과합니다. 그러니 남대문 정도에서 맞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의견에 다른 신하는 이의를 걸었다.
“그건 명나라 시신을 맞이하는 방법과 같지 않소. 군왕인데 그런 정도로는 예가 아니라고 봅니다.”
조선이 전보다 경제가 좋아져서 그런지 아니면 할 일이 너무 없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조정은 매일 같이 ‘마포나루다 또는 남대문이다.’를 놓고 격론이 오가고 있었다.
소윤은 마포나루가 좋다고 주장하고 대윤파는 남대문이 적당하다고 서로 다른 의견을 내세우는 정파 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조용하던 조정이 시끄러워진 이유는 뒤로 물러나 있던 윤대비가 새로운 중전을 맞아들이는 것을 계기로 슬며시 조정의 일을 간섭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전의 간택은 대비가 영향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기회에 서서히 자신의 오랜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무당의 비방으로 중전과 왕자가 죽었다고 판단한 그녀는 이제는 자신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주상의 효심이 깊다는 것을 빙자해 매번 대궐 밖으로 평복 차림에 출입이 잦았다.
한양 도성이 사소하다면 사고하고 크다면 큰 최인범에 대한 예우 문제로 소란스러울 때 서대문 밖의 반야사와 가까운 주막에는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비의 심복인 김 상궁이 양반집 아녀자와 같이 옷을 입고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더니 주막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미 주모와 밀착된 사이라 서슴없이 주막의 안채로 향하고 있었다.
부엌에 있던 곱상하게 생긴 30대인 주모가 나와서 화사하게 웃으며 반겼다. 그러자 김상궁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분은 오셨어?”
“응! 벌써 오셨어. 빨리 안으로 들어가 봐. 나도 조금 있다가 문 닫고 들어 갈 태니까.”
구중궁궐에서 지내야 하는 상궁의 몸으로 주막에서 밤을 지낸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보아하니 사내를 만나려는 것 같으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더구나 주모와 같이 사내를 만나니 너무도 황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