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하카타의 신산여각에 찾아온 사가라를 만나 오우치 가문의 요시타카 영주가 만나자는 말에 최인범은 가볍게 응수했다.
“기왕에 만나서 협상하고 싶으면 그대의 영주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전하시오. 나는 이곳에서 바로 떠날 예정이니 여기서 만나고 싶소.”
“떠나신다면 어디로 가시나요?”
“그야 당연히 조선을 거쳐 봉황성으로 돌아가야죠.”
이렇게 답하자 사가라는 요시타카가 백제의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강조하며 회담을 하기 위해 고쿠라 성에서 만날 것을 다시 권했다.
“전하, 고쿠라 성이 멀지 않으니 그곳이 회담 장소로는 좋지요.”
“그렇지 않소. 이미 아시다시피 이곳에서 암살 시도가 있었으니 그것은 불가하오. 그러니 나를 만나고 싶으면 이곳으로 와서 만나도록 하시오.”
결국 만나기는 하지만 고쿠라 성이 아닌 이곳 신산여각에서 만나기로 결정되었다. 왜의 혼슈로 넘어가서 착호 활동을 한다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너무 복잡하게 엮긴 혼슈로 가서 누구를 특별히 돕고 싶지도 않고 여기서 더 이상 시간을 소모할 여유가 없었다.
자신이 없어도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봉황성이 돌아가겠지만 직접 챙기는 것과 전혀 다르다. 산동 반도의 반란군 문제도 빨리 처리해야 발해나 황해에서의 해상무역 항로가 안전하니 마음이 급했다.
‘여기서 한가하게 남이나 도와주고 있을 필요가 없어.’
최인범은 왜의 하카타 항구와 나가사키를 공략해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해 자신이 왜에서 필요한 황이나 구리는 충분히 공급받은 근거지는 마련했다. 그러니 시간을 소비하며 왜의 혼슈로 넘어가 복잡해지기 싫은 것이다.
‘마침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더 터에 요시타카를 만나고 떠나면 체면도 서니 적당해.’
백제의 임성태자를 내세우지만 사실 왜의 많은 가문이 백제 출신이 아닌 사람은 드물다. 역사적으로 어떤 연결 고리는 있다지만 그것이 그리 큰 의미는 없다고 판단했다.
최인범은 철갑웅에게 지시했다.
“화담만 하면 바로 떠날 것이니 그러게 알고 모두 떠날 준비를 해.”
“넷!”
이미 많은 기마병이 이곳에서 주둔해 있으니 그들도 떠나려면 준비할 것이 있었다. 명령을 받자 기마병들은 서둘러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주변의 정리란 대부분 여자문제다. 그동안 왜의 여자와 같이 지내던 기마병들은 대로는 완전히 해어지기도 하고 같이 가지는 못하지만 하카타를 출발하는 주인선을 타고 봉황성으로 오도록 약속하는 경우가 있었다.
조선의 부산포를 거쳐서 봉황성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여자들을 데리고 같이 떠날 수는 없었다.
떠나기로 결심한 최인범은 대상인들을 만나 그들에게 약속한 그대로 96장의 주인장을 발급해 주었다. 사실 아직 정식으로 발급되는 주인장은 아니다.
“조선의 주상이나 관아도 연명해야 되니 부산포나 대마항의 경우는 대마항과 부산포에 도착과 동시에 조선 관아의 인장을 받아 정식으로 발급해 놓겠소.”
“봉황성으로 가는 단동 항구는 어쩌죠?”
“봉황성에 도착하면 정식으로 인장을 찍은 주안장을 보내 줄 것이니 지급 발급한 주인장은 모두 봉황성으로 가지고 오시오.”
“알겠습니다.”
조선의 인장도 받아야 하는 이유는 하카타에서 봉황성으로 가려면 반드시 조선의 해역인 남해와 서해를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주도 남쪽을 통과하는 항로를 택해야 되니 너무 먼 거리를 돌아야 하고 남해를 지나는 항로보다 위험했다.
주인장을 회수하고 새로 발급한다는 것은 2중으로 발급되거나 또는 폐기될 주인장으로 하카타 상인들이 밀무역할 염려가 많기 때문이다.
하카타 항구에서 봉황성의 단동 항구로 가져올 주된 무역품은 은괴. 구리, 주석, 황, 후추로 정해졌다.
최인범이 구리와 주석을 포함시킨 이유는 모두 청동대포를 주조하거나 또는 화폐를 발행할 생각 때문이다. 구하기 쉬운 철로 화폐를 제조하는 것이 좋았다. 구리와 주석의 용도다 다양하다고 판단해 화폐주조에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좋습니다. 최대한 구해서 보내도록 하죠.”
“그곳에서 구입하고 싶은 품목은 그곳에 도착해 정해도 되고 또 내가 떠나기 전에 정해서 수량을 말해주면 미리 준비해 놓도록 하겠소.”
“알겠습니다.”
수입품은 정했지만 수출품을 정하지 않은 이유는 봉황성에서 현재 뭐가 많이 생산되고 있는지 자신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드디어 신산 여각으로 요시타카 영주가 찾아왔다. 최인범은 굳이 명나라에서 봉한 군왕이나 태대장군이란 권위를 내세우고 싶지 않아 평범하게 대했다.
“어서 오세요. 여기서 백제의 후손을 만나니 너무 반갑군요.”
“반갑습니다.”
백제 후손이라고 하지만 뭐 다른 왜인이나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하긴 이곳 규슈나 야마구치의 영지야 한반도에서 넘어온 이주민들이 많으니 모습이 같을 수밖에 없었다.
회담 장소는 그저 평범한 탁자가 3개가 길게 나란히 놓이고 의자만 몇 개 놓였다. 그런 모습을 보자 요시타카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인범은 회담 장소를 이렇게 만든 이유에 대해 조용히 설명했다.
“회담을 쉽게 끝내기 위해 필요한 참모들도 옆에 앉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마련했으니 그렇게 아세요.”
그거야 최인범의 생각이고 권위를 중시하는 터라 요시타카 참모는 의자를 뒤로 빼서 앉았다. 이것으로 보아 그의 평소 생활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최인범은 옆에 대상인 대표 1명과 철갑웅 그리고 나가사키 영주와 문관을 앉게 했다.
문관을 옆에 앉게 한 이유는 회담 결과를 서류로 만들기 위해서다. 이미 규슈로 넘어가 착호 활동은 못한다고 했기 때문에 주된 회담 내용은 주인장 발급에 관한 내용이다.
최인범은 하카타로 물건을 가져와 거래해서 수출하는 방법을 주장했다.
“주인장을 따로 발급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영지내의 생산품을 이곳으로 운반해 팔면 되니 그렇게 하세요.”
그러자 요시타카는 고집을 피웠다.
“우리 영지의 시모노세키에서 직접 운항이 가능한 배들이 많으니 부산포나 또는 봉황성으로 가는 주인장을 별도로 발행해 주시오.”
회담이 항상 그러하듯이 서로 ‘해 달라. 못 해준다.’로 시간만 소비하고 있었다. 그러자 결국 기왕에 준비된 은괴 60짝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주인장을 발급받기로 약속했다.
“좋습니다. 그런 정도로 꼭 직접 무역을 하고 싶다면 발급해 드리죠. 시모노세키에서 부산포로 직항하는 주인장은 6장을 드리고 봉황성으로 가는 주인장은 12장을 발급해 주겠습니다. 더 이상은 곤란합니다.”
최인범은 즉석에서 주인장 18장을 발급해 넘겨주고 대상인들과 똑 같이 무역품이나 또는 배에 표시하는 방법과 적재량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허! 그렇다면 배를 새로 건조해야 되겠군.”
“더 이상 크지만 않으면 상관은 없습니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회담은 무사히 끝내고 요시타카는 고쿠라 성으로 돌아갔다.
최인범은 나가사키 영주에게 유구국으로 가는 주인장을 발급해 주며 당부했다.
“물소 뿔이나 그곳에서 나는 특산품을 사서 하카타로 가지고 오시오.”
“알겠습니다.”
최인범은 유구와의 교역은 일단 나가사키 영주에게 떠넘긴 것이다.
이번에 오우치 가문과 최인범과의 무역 회담은 왜에서는 매우 중대한 문제다. 지금까지는 주인장의 경우 막부의 수장이 발급했는데 그것이 변한 것이다.
대외수출은 이제 요시타카 가문만이 조선과 봉황성과 할 수 있다. 다른 가문은 어쩔 수 없이 요시타카 가문이나 하카타 항구의 대상인들에게 무역품을 판매할 수밖에 없게 변한 것이다.
전에도 그렇게 했다지만 지금처럼 수출 길이 완전히 막히는 방식은 아니었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면 동쪽에서 대대적으로 공격해 올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영주는 떠났지만 회담을 주선한 사가라는 남아 있었다. 그는 은괴를 넘겨주고 대상인을 만나 언제 봉황성으로 떠날지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 남아 있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끝내고 나자 다시 신산여각으로 찾아 왔다.
“전하, 작별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 왔습니다.”
“고맙소.”
인사를 하러 왔다고 하며 돌아갈 생각을 안 하고 뭉그적거렸다. 뭔가 부탁할 것이 있어 찾아 왔으나 이미 회담이 끝나 말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이다.
그러자 최인범이 빙그래 웃으며 물었다.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소?”
이런 물음에 사가라는 얼굴이 한해지며 솔직하게 오우치 가문이 처한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전하, 저희 오우치 영지는 호랑이 때문에 광산들이 모조리 폐광될 지경입니다. 주인장이 있어도 광물을 생산하기 곤란합니다.”
“그렇군요.”
전에도 피해가 심했지만 규슈에서 지진이 발생하자 떼로 호랑이가 넘어와 피해가 더 심하다고 했다. 더구나 호랑이를 탄 여자 때문에 더 공포감이 생겨 도저히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최인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에서 더 이상 머물며 복잡하게 엮기기는 싫었다. 그러나 혼슈의 서부로 가서 조금은 도와주고 떠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그곳에서 생산되는 구리나 은의 수가 많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대체 어떤 여자 길래 호랑이를 타고 다니는지도 궁금했다.
‘신기한 일이야. 여자가 겁도 없이 호랑이를 말처럼 타고 다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질 않았다. 그래서 그것도 어찌된 일인지 알아볼 요량으로 쉽게 답해 주었다.
“좋습니다. 서로 좋게 앞으로 지내야 되는 사이가 됐으니 제가 조금만 호랑이 소탕을 해서 도와드리지요.”
“감사합니다.”
“기마병들이 호랑이를 잡는 방법을 옆에서 잘 지켜보고 배우시면 됩니다. 그러면 앞으로 호랑이를 완전히 소탕하기는 힘들어도 광산이 폐광될 정도는 아니게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사가라는 연신 굽실거리며 저자세로 인사를 했다.
어차피 호랑이 가죽은 매우 중요한 수출품이다.
‘좋았어, 한반도에서 구하기 힘든 호랑이 가죽 좀 챙겨 가는 것도 좋아.’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몇 마리를 잡아서 봉황성으로 가져가 부하들에게 주던 왜를 다녀왔다는 표적으로 북경의 가정제에게 보낼 심산이다.
최인범은 사가라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곳을 아시오?”
“넷!”
최인범은 혼슈의 지도를 크게 그려 놓고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보고 받았던 지점들을 빨간 색으로 찍어갔다. 그러자 결국 호랑이들이 대략 어디를 기점으로 모여 있는지 알 수 있는 생태 지도가 완성되었다.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군요.”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산다는 것은 사실 낭설입니다. 대부분 먹이 때문에 해안이나 강의 갈대밭이나 야산에 사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새끼를 낳을 경우는 안전을 위해 조금 깊이 들어가 삽니다.”
결국 호랑이가 집단으로 모여 사는 곳만 공격해 주고 떠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