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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트레인-280화 (280/519)

280화

산동 반도에서 준동하는 반란군을 토벌한다고 갔다가 대패한 황제는 다소 의기소침해 있었다. 더구나 그곳에 턱하니 새로운 왕국이 생겨버렸으니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이때 왜구들의 소굴인 대마도를 자신의 명령대로 산동 왜 토벌평안 대장군인 최인범이 조선으로 합병했다는 보고를 듣게 되고 대마 도주를 북경으로 보냈다.

가정제는 실추된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충격적인 방법으로 자금성의 오문 앞에서 기름에 튀겨서 대마 도주를 처형했다. 권위야 명성으로도 생기고 악명으로도 생기는 법이다. 가정제는 악명으로 크게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런 처형 방식은 효과가 조금은 있었다. 함부로 기어오르려는 항의하던 대신들도 사라지고 동창도 이제 다시 수족으로 변했다. 다시 황제로의 자존심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고 판단했다.

가정제는 전과 같이 비약제조나 기타 아편을 흡입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자금성 내의 침소에서 생아편의 연기에 취해 잠들어 있던 가정제는 기겁했다. 갑자기 자신의 목을 밧줄로 감고 잡아당기는 여지들 때문에 사지를 바동거렸다.

“으으윽!”

목을 강하게 조여 오는 밧줄을 손으로 잡고 바동거려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처음에는 눈앞에 별똥별이 보이더니 이어서 깊은 어둠만 가득했다. 정신이 흐릿해지며 가정제는 그 순간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고 그저 자신이 ‘이렇게 죽는 구나.’ 하는 느낌만 들었다.

‘너무 허무한 인생.’

그리고 보잘것없는 궁녀들에게 죽어가는 자신이 처량하고 너무 한심했다. 상대적으로 강해만 보이던 건장한 덩치인 부마도위의 모습이 떠올랐다. 죽음에 이르게 되자 그가 그래도 제일 충신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추락하던 황제의 권위를 그만이 세워줬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마도위가 보고 싶네.’

스스로 약하기 때문에 강한사람에게 의탁하려는 심리가 크게 작용한 것이다. 더구나 평소 벌레나 진배없다고 판단하던 궁녀들에게 목이 졸려 죽음에 이르자 그런 마음은 더욱 간절했다.

‘그가 내 옆에 있었으면 이년들이 겁나서 감히 이런 짓도 못할 건데.’

많은 미련들이 수없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야 이제 하나 마나한 과거의 일이다.

“크르륵! 크르륵!”

가정제의 입에서는 거품이 품어 나왔다. 이어서 목이 더욱 강하게 조여지자 숨이 멈추어지며 사지가 축 늘어졌다. 그러자 방안에는 구린내와 지린내가 진동했다. 가정제는 오줌도 지리고 똥도 품어내 버린 것이다. 오래 묵은 숙변까지 있어서 그런지 구린 냄새가 너무 독했다. 밧줄을 조이던 궁녀들은 구린내가 너무 심해 조이던 밧줄을 다소 느슨하게 놓았다.

이때 귀비인 왕미미가 달려와 시녀들에게 추상같이 호통을 쳤다.

“이게 무슨 짓들인가?”

그녀는 황제의 목을 조이는 시녀들을 강하게 옆으로 밀치고 이미 빈사상태로 빠진 황제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본래의 역사에서는 황후인 방씨가 달려와서 구하지만 다른 사람인 귀비인 왕미미가 시녀들을 밀쳐내서 구했다.

황제가 좋아서도 아니고 다만 자신의 야심찬 꿈이 있으니 지금 죽으면 안 되니 살린 것이다. 그리고 옆에서 도와주는 조비도 마찬가지다.

“빨리 어의를 불러!”

왕 귀비는 아주 신속하게 자금성을 봉문 하는 조치를 신속하게 취하고 황제를 보호했다. 정신을 잃고 혼수상태이던 가정제는 깨어나자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태감, 연루자는 모두 죽여!”

대륙의 역사에서 처음 일어난 궁녀들이 황제를 교살하려던 임인궁변(壬寅宮變)이 터진 것이다.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황후인 방씨(方氏)를 비롯해 그녀의 소생인 자녀들과 양금영등 16명의 궁녀는 교살 형이나 능지처참을 당했다. 영비(寧妃) 왕씨(王氏) 또한 이 일에 연루되어 죽어버렸다.

자금성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여러 가지를 고려해 밖으로는 알리지 않고 쉬쉬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이 죽고 추국을 당하게 되자 결국 일반 백성들도 알게 되었다.

본시 정신이 이상하던 가정제는 저승의 문턱을 경험하고 나자 더욱 심하게 변해버렸다. 자신의 혈육을 얻으려고 별짓을 다하던 그가 방 황후는 물론 자신의 자식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것이다. 자신을 죽이고 아들을 섭정으로 올리려고 황후인 방씨가 모의했다는 죄를 물어 처형한 것이다.

그 바람에 목숨을 구해준 귀비인 왕미미가 황후에 오르고 그녀와 친한 단비이던 조씨가 귀비로 올랐다. 이 사건으로 자금성 내의 모든 권력은 황후에 오른 왕미미와 귀비인 조씨 손아귀로 들어갔다.

“황후마마 감축 드리옵니다.”

“고맙소. 태감들 덕분이오. 앞으로도 나를 잘 도와주시오.”

황제의 수족인 환관들은 물론 동창까지도 두 여자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게 된 것이다. 임인궁변의 주범들은 모두 죽었지만 사실 그녀들이 그런 일을 저지른 진짜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천진에 있는 소피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그의 수족으로 변한 백삼수가 그의 정인으로 변한 궁녀들이 다른 궁녀들을 충동질해 저지른 사건이기 때문이다.

소피아는 임인궁변에 대한 정보를 듣자 백삼수를 소환해 무시무시한 고문도구가 가득한 지하 창고로 끌고 왔다.

백삼수는 이름 그대로 입에서도 피를 토하고 코피도 나고 오줌도 지리고 똥도 지리도록 가죽 몽둥이찜을 당했다. 전신이 피멍이 든 상태에서 소피아의 매서운 문초가 시작되었다.

“삼수, 무슨 일을 그 따위로 하나? 내가 하는 일은 방해하는 왕 귀비를 제거하라고 지시했더니 일을 이런 지경으로 만들어?”

“죄송합니다. 그래도 소 부인께는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뭐야? 나에게 오히려 잘 되다니. 왕미미가 황후가 되었으니 이제 산해관의 왕 부인이 전보다 더 설칠 것이 아닌가? 불을 보듯이 훤한데 무슨 헛소리야.”

소피아의 이런 추궁에 백삼수는 찍 소리도 못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쩝! 또 꼬여 버렸어.’

어째 자신이 고심해서 추진하는 일마다 약간 씩 틀어져서 항상 자신만 당하는지 모른다. 아무튼 백삼수는 최인범을 알고 나서 모두 잘 되다가 그를 배신하고부터는 매번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내가 너무 큰 죄를 지었어.’

천진과 산해관에서 거점으로 잡고 사업체를 운영하는 소피아와 왕미령 사이에서 자금성으로 납품하는 문제로 약간 분란이 생겼다. 그런 와중에 왕미미 즉 왕 귀비의 영향력으로 소피아가 아닌 산해관의 왕미령과 관계가 깊은 연경상단에서 납품하게 되었다.

본래 최인범은 명나라를 떠나면서 상단사업은 발해상단으로 통합해 소피아가 실권을 가지고 왕미령의 오빠인 왕도정을 책임자로 운영하게 지시했다.

그런데 대상인인 왕담보가 운영하는 연경상단의 뒤를 왕 귀비가 봐주어 납품했다. 이에 열을 받은 소피아는 귀비인 왕미미를 제거해 버리라고 지시했다.

제거하라던 왕 귀비가 임인궁변으로 오히려 황후에 올랐으니 모든 잘못은 백삼수가 뒤집어쓰고 있었다.

“너, 아무래도 여기에 있어 봐야 걸림돌만 되니 이제 그만 조선으로 돌아가.”

“예? 빈 몸으로 조선으로 가라고요?”

“그럼, 여기 있다가 동창의 조사를 받다가 살가죽 벗겨져 죽을래?”

어찌 되었던 자신이 사주했던 궁녀들이 살아 있다. 언제 비밀이 탄로나 자기에게까지 동창의 매서운 수사망이 뻗어 올지 모르니 명나라를 영원히 떠나는 것이 좋았다.

그동안 명나라에서 벌어 모았던 재물은 이미 소피아에게 넘어갔다. 그러니 소피아가 마련해준 배편을 타고 빈털터리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책봉사가 조선에서 온 무역선을 타고 간다니 그 배편으로 너도 한양으로 돌아 가.”

“마님, 책봉사가 요동을 지나서 안전한 육로로 가지 않고 무역선으로 가다니요? 더구나 산동 반도에는 반란군인 제태국의 수군들이 있는데요.”

그러자 소피아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설명해 주었다.

“너는 정보를 수집한다는 놈이 그런 상식도 몰라? 조선으로 가는 사신들은 봉황성을 거치기만 하면 누구고 알거지가 되고 그것도 모자라 거액의 차용증을 써준 빚쟁이가 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군. 그래서 이번에 책봉사로 가는 사신은 차라리 위험할지 몰라도 빚은 지지 않겠다고 배편을 이용해 조선으로 간다니 그렇게 알아.”

“알겠습니다. 봉황성의 정향대공주님이 성깔이 보통은 넘나 봅니다.”

천진에서 사신들이 탄 무역선에 올라 명나라를 떠나며 백삼수는 마음속으로 각오를 단단히 했다.

‘이번에 한양으로 돌아가면 돈 많은 수절과부나 멋지게 후려서 편안하게 살아야 하겠어.’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마음은 바뀌었다. 명나라에서도 감히 자금성의 궁녀들을 10명씩이나 찍어 눌러 마음껏 요리해 수족처럼 부리던 처지다.

백삼수는 지금 마음먹은 그대로 평범한 수절과부로는 도저히 양이 차질 않았다.

‘큰물에서 놀던 내가 작은 개울물에서 놀 수는 없어.’

자신이 한양으로 돌아가 찍어 눌러 요리해 버릴 대상자를 혼자서 물색하던 백삼수는 실로 엄청난 발상을 했다.

공략대상이야 당연히 나이가 좀 많은 과부가 제일 만만했다. 공략하기가 매우 어렵겠지만 이미 사내 맛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여자가 쉽다고 판단했다. 또한 지위가 다다 높을수록 여자의 사회적인 체면 때문에 자신과 관계한 비밀은 유지된다는 이점이 있었다.

‘기왕이면 크게 놀아야 한 방에 회복하는 거야.’

전에 최인범과 사이가 좋을 때 그가 들려주던 미래에 벌어질 가상세계의 이야기를 굳게 믿었다. 그래서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계획을 착수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여자만 내가 찍어 눌러서 잡으면 반드시 내 미래는 밝다고.’

매우 위험하고 실현하기 어려운 계획이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자신은 또 다시 큰 부를 너무 손쉽게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상인이자 선장에게 슬며시 물었다.

“주상전하의 건강은 요즈음 어떠시오?”

“우리야 그런 것을 알 수가 있나? 주상전하께서는 전보다 건강하신 것은 틀림이 없다네. 이번에 중전마마께서 왕자님만 낳으시면 되네.”

이런 소리를 듣자 백삼수는 자신의 계획이 여기서부터 약간 틀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어라? 이게 아닌데. 주상전하께서는 자식이 없었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변한 것이지?’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포기하기가 너무 이르다. 중전께서 전에는 임신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소리도 있었으니 자식을 낳다가 졸지에 죽을 수도 있고 공주를 낳을 수도 있다.

‘아직은 포기하기는 일러. 한양으로 가서 잘 조사해 봐야 되겠어.’

백삼수는 명나라로 와서 임인궁변을 약간 변화시켜 버리고 드디어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란 아주 작은 차이라지만 그 때문에 파생되는 여파는 아주 심할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뻐꾸기와 같이 최인범의 아이를 낳아 황제의 후계자로 삼아 결국 황제로 밀어 올릴 거창한 꿈을 지녔던 황후인 왕미미와 조 귀비가 자금성의 권력을 장악했으니 그 파장은 이후 엄청나게 큰 형태로 나타날 여지가 많았다.

백삼수는 고급 정보를 지니고 있을 명나라의 사신에게 접근해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가정제가 드디어 완전히 돌아서 그런지 아니면 왕 황후가 필요에 따라서 조정한 것인지 모르지만 최인범을 턱하니 산동해왕 태대장군 (山東海王 太大長軍)으로 책봉해 버렸다.

‘산동해왕으로 책봉되다니. 왕을 하게 됐어.’

가정제는 전공을 세운 최인범에게 뭔가 해주기는 해야 되는 입장이다.

산동성은 어차피 반란군이 점령해 제태국을 건국해 자신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래서 산동성을 최인범의 봉토지라고 선심을 써서 그가 반란군을 빨리 물리치길 원해 이렇게 책봉해버린 것이다.

백삼수는 한때 같이 생활하던 최인범이 이렇게 높이 성장하자 은근히 열불이 났다.

‘나도 같은 사람인데 거지같이 살기는 너무 억울해.’

이렇게 판단하고 한번 사는 인생 자신도 뭔가 크게 일을 꾸며볼 결심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찍어 누르기 주특기를 최대한 살리는 길 밖에 없었다.

결국 백삼수는 한양으로 들어오자 서대문 근처에 있는 반야사 근방의 주막으로 가서 주모부터 공략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만의 길을 가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실천해 나가고 있었다.

한편 왜의 규슈에 있는 최인범에게 추가로 판옥선 10척과 여진출신인 기마병 100명이 왔다. 그들을 통해 봉황성에서 전해진 소식을 듣게 되었다. 별도로 천진과 산해관의 부인들로부터 연락도 왔다. 북경의 정보나 기타 주변의 상황에 대한 정보가 적힌 서찰을 받은 것이다.

‘사람 일이란 정말 한치 앞을 모르겠군. 내 시녀이던 왕미미가 황후로 변하고 백삼수가 한양으로 돌아오다니. 그 자식이 또 무슨 음흉한 음모를 꾸밀지 모르겠군.’

자신을 산동해왕으로 책봉하는 책봉사는 육로를 통해 봉황성으로 갔다는 것도 알았다. 최인범은 기존의 벼슬 명칭에서 조금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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