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또한 닌자들의 암살 방법은 이렇게 허술하지 않았다. 물론 닌자들도 같이 움직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기회를 노리다가 엉겁결에 참여한 것을 알아낸 것이다.
‘이번은 정말 너무 복잡한 사건이야.’
여기에서 근무하던 사무라이들이 모조리 달려든 사건도 매우 복잡해 보였다. 아무튼 검안하고 날이 밝으면 얼굴의 그림을 가지고 선원들에게 확인시킬 생각이다.
‘아직 조선에서 온 무역선이 그대로 있으니 확인이 가능해.’
이렇게 생각하고 최인범은 내기바둑을 마무리했다. 대국하는 상대가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못하니 내기바둑의 승부야 당연히 최인범의 일방적인 승리다. 아무튼 좋은 기회에 손쉽게 은과 5짝을 챙긴 최인범은 대상인들에게 말했다.
“분위기 너무 어수선해서 바둑을 정상으로 두지 못해 거둔 승리니 내일은 은괴 10짝을 걸고 두도록 합시다.”
이 소리에 12명의 대상인들은 입에서 거품이 품어 나올 정도로 크게 놀라고 말았다.
대상인들이 나가사키로 들어온 대장군에게 내기바둑을 두자고 제안한 것은 성품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세상에는 뇌물을 먹는 사람도 있고 안 먹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안 먹는 다고 명성이 자자한 사람도 알고 보면 어떤 명문이 생기면 받아먹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슬며시 은괴 2짝을 걸고 내기바둑을 두자고 제안하자 덥석 미끼를 물었다. 은괴 5짝을 걸고 내기바둑을 두자고 하자 대상인들의 판단에는 대장군이 명분만 주어지면 뇌물을 받아먹은 부류라고 생각했다.
‘뇌물은 만고의 진리야.’
아니나 다를까 도저히 바둑을 정상적으로 둘 분위기가 아닌 곳에서 대국해 잘도 뇌물을 받아먹었다. 그런데 덜컥 내기바둑의 금액을 배로 늘려 또 둔다고 하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더 먹겠다는 수작이 아니요?”
“대장군의 의중이야 그렇겠지만 우리 형편으로 거절할 수 없지 않소. 명분이야 우리가 미처 생각 못 한 분위기가 어수선해서 상대방이 불리할 때 둔 내기바둑이니 다시 두자는 데 거절할 명분이 없지 않소.”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다. 뇌물을 줄때는 주더라도 내기바둑은 두어서 이기고 나서 넘겨줘야 뭔가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된다고 판단했다.
자신들의 안전판이 모두 사라진 판국이라 그저 당분간은 시키거나 요구하는 데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일부로 사무라이를 모조리 척살한 것 같소.”
“그것도 그렇군요.”
세상이 너무 어수선한 전국시대에서 주위에 보호막인 사무라이가 없다는 것은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었다. 언제 어떤 영주가 쳐들어와서 자신들을 협박해 재물을 가져갈지 모르는 상황이다.
결국 대상인들은 은괴 10짝을 걸고 두는 내기바둑은 두겠다고 했다. 장소는 험지인 야지에서 두기는 무엇 해 최인범이 지내겠다고 정한 여각을 택했다.
신산(神算)이라고 불리는 여각에는 이런 결정으로 부산해졌다. 신산이란 명칭은 절대로 허수로 바가지요금을 물지 않도록 정확하게 계산하는 여각이라는 깊은 뜻이 담겨있다.
신산여각 이층의 제일 큰 방이 대국 장소로 정해지고 치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층과 아래층 사이에는 넓은 천이 늘어지고 위에는 바둑판이 그려졌다. 아래층에는 바둑판이 여러 개 준비되어 있었다.
대국진행 상황을 공개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검토실에 해당하는 아래층의 넓은 공간에는 원하면 입장해 진행 상항을 볼 수 있게 만들어 두었다.
“이런 것은 마음에 드는군.”
“그렇지. 이렇게 공개하면 바둑을 정상으로 두는지 알 수 있어.”
대상인들은 모두 바둑을 둘 줄 알고 어느 정도 실력이 된다. 그래도 고수들이 두는 바둑을 해설까지 곁들어 들을 수 있다니 그런대로 마음이 흡족했다.
대상인들은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장담하며 다들 저택으로 돌아와 나름 뇌물을 건네주는 방법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번에 이기면 우리는 각자 1짝씩 내서 넘겨주도록 합시다.”
“그게 좋겠소.”
여유롭게 뇌물 공여 방법을 논의하고 있는 가운데 부하가 급하게 다가와 보고했다.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대국장으로 입장하지 못하게 생겼어요.”
“뭐라? 그건 왜?”
“대국 장소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표를 사야 한답니다. 1층은 모두 200석이라 200장이고 2층은 20장으로 한정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어요.”
“우리야 입회인 자격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나?”
“그렇지 않답니다. 암살 미수 사건도 벌어져 함부로 사람을 들이지 않기 위해 누구라도 표를 사야 입장이 가능하답니다.”
표를 사라니 분명 돈을 받는다고 판단해 급하게 물었다.
“표는 얼마나 하나?”
“1층은 은괴 2개씩이고. 2층은 은괴가 20개랍니다.”
“뭐라?”
여기서 칭하는 은괴는 부피가 커서 100개면 1짝이 된다. 그러니 엄청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대상인들은 입장료야 별것이 아니지만 이미 표를 사기 위해 늘어선 사람이 200명이 넘는다니 그게 큰 문제다.
“빨리 표를 구합시다.”
“그래야 되겠군요.”
다급해진 대상인들은 급하게 부하를 보내 확인해 보았다. 입장권 판매를 책임진 이창수 중위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답해 주었다.
“입장권은 매진됐습니다.”
“뭐요?”
급하게 알아보니 나가사키 영주가 자신의 부하들을 줄에 새워 이미 입장권을 반이나 독식해 버렸다. 나머지야 누가 사갔는지도 모르고 들리는 이야기로는 바둑에 미친 사람들이 사갔다고 했다.
별 수 없이 나가사키 영주에게 웃돈을 주고 입장권을 사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 우리는 2층에 들어가야 하니 입장권을 파세요.”
“그건 곤란합니다. 저도 제 가신들이 대국 장소를 꼭 들어가 보고 싶다고 해서 사게 된 입장권이라.”
“사정 좀 봐주세요. 은괴를 40개씩 계산해 드리지요.”
아무튼 못준다고 버티던 나가사키 영주는 나중에 결국 크게 인심을 쓰면서 나름 쏠쏠한 용돈벌이는 대장군 덕분에 하게 되었다. 물론 나가사키의 사무라이들도 1층의 입장권을 사서 되파는 암표 장사로 용돈 벌이를 했다.
본시 세상에는 돈이면 죽은 시체도 살리고 귀신도 부린다는 말이 있다. 나가사키 영주나 사무라이들은 이제는 대부분 타이다이쇼군이라 칭하는 태대장군에게 잘만 보이면 돈을 쉽게 벌게 되자 없었던 충성심이 팍팍 늘고 있었다.
“본시 윗분은 이렇게 부하를 잘 챙겨주는 분이 대단한 분인 거야.”
“당연하지. 앞으로 타이다이쇼군께서 우릴 자주 불러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
“우리도 그분 따라서 봉황성인가 하는 곳으로 갈까?”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
한편 내기 바둑에 미쳐 이제는 알거지가 된 허운(虛雲) 스님은 나가사키 영주의 시종과 같은 신세다. 그래서 소위 종군 스님으로 변했다. 항상 나가사키 영주를 졸졸 따라 다니며 수시로 불경을 외워야 된다.
수많은 시체들 때문에 날이 지세도록 불경을 외우고 나서 겨우 한 숨 자고 일어났다. 허운 스님에게 내기바둑의 해설을 담당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아고야, 내기바둑이라면 이가 갈리는 나인데. 죽을 맛이군.’
그래도 해설자에게 조금의 은괴인 1개를 준다니 감지덕지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은괴라면 좋아하는 술이나 여자를 사서 알거지로 변한 회한을 당분간은 충분히 삭일 수 있는 재물이다.
‘공짜로 염불 외운 것보다는 좋군.’
물론 술도 술 나름이고 여자도 여자 나름이다. 하지만 아무튼 빈털터리는 면할 기회가 생겼다. 신산이란 여각은 돈벌이라면 지독한 최인범 때문에 앞으로 상당히 유명한 여각으로 변하게 된다. 본래의 작명한 의미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로 유명해졌다.
한편 최인범은 닌자들 중에 조선 출신으로 의심이 가는 얼굴을 그린 그림을 부두로 가져가 선원에게 보여주며 확인했다.
“아! 잘 압니다. 부산포에서 너무 급하다고 사정해 뱃삯을 조금 넉넉하게 받고 태워다 줬습니다.”
“신분을 확인하는 호패가 있었을 건데 보지 못했소?”
이런 지적에 선원은 급히 땅에 납작 엎어져 애원했다.
“대장군님, 죽을죄를 졌습니다. 밀항인지 알면서 재물에 눈이 어두워.”
사색으로 변하는 선원에게 최인범은 부드럽게 말했다.
“너무 겁내지 마시오. 나야 조선의 관원이 아니니 그것을 추궁하고 싶지는 않소. 하지만 사실 대로 말해야 하오. 특별한 점은 없었소? 무슨 이상한 말을 하던가?”
잠시 깊이 생각하던 선원은 기억이 떠오른 듯이 말했다.
“계속해서 말을 타고 이동해 엉덩이가 너무 아프다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들이 낸 뱃삯은?”
“면포입니다.”
“그들이 넘겨준 면포를 한번 봅시다.”
“대장군님, 이미 왜인에게 팔았는데요.”
결국 최인범은 선원에게서는 다른 단서는 듣지 못했다.
면포를 팔았다는 왜인을 만나 그에게 은자를 넘겨주고 다시 면포를 회수했다. 면포는 똑 같은 질로 최상품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수량도 10명이 동시에 밀항했기 때문에 상당히 많았다.
‘이런 정도의 상품 면포를 가지고 다녔으면 반드시 놈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어.’
“내가 이 면포를 모조리 살 테니 파시오.”
“태대장군님이 필요하다면 팔아야죠. 구입가격에 드리겠습니다.”
시체를 끌고 조선까지 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제 면포와 용모를 그린 그림이나 그들의 얼굴에 난 상처들이 유일한 단서다. 조선으로 돌아가서 조사해야 되니 더 이상은 다른 방법은 없었다.
날을 지새우고 계속해서 사건의 배후 조사를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니 오후가 되었다. 신산여각으로 돌아와 한숨 자고 드디어 2층의 대국장으로 들어갔다. 대국장으로 들어가자 기다리던 사가키가 황급히 엎어져 인사했다.
“태대장군님, 영광입니다.”
“거창한 인사는 그만 두고 바둑이나 둡시다.”
뒷돈을 댄 대상인들은 사가키의 이런 태도를 보자 다들 얼굴이 누렇게 뜨고 말았다. 이미 자기편 선수인 사가키는 잔뜩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고야. 둬보나 마나 내기바둑은 졌어.”
“그렇군.”
대상인들의 예측대로 바둑은 너무 싱겁게 끝나가고 있었다. 본시 실력에서 접바둑을 둬야 하는 정도인데 맞바둑을 두자 차이가 날수밖에 없었다. 대국이 결국 자신의 승리로 끝나자 최인범은 다시 제안했다.
“아직도 진정한 서로의 실력으로 두는 것 같지 않으니 우선 푹 쉬고 내일 모래에는 은괴 40짝을 걸고 둬 봅시다.”
이런 제안에 대상인들은 너무 기가 막혔다. 이건 뇌물을 먹어도 너무 많이 달라는 소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인범은 이들이 조선의 남쪽을 침탈해 약탈해서 모은 재산도 많다는 점 때문에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이놈들 너희들의 본성을 뿌리 채 뽑아주지.’
노략질보다야 이런 내기 바둑이 더 깔끔하고 명성에 흠이 가지는 않았다.
“더 이상 내기바둑을 둘 일이 없으면 사무라이들이 집단으로 나를 습격한 사건이나 같이 조사합시다.”
이러니 대상인들의 얼굴은 이제 누렇게 뜬 똥색을 벗고 흑색으로 변했다. 내기바둑을 안둔다면 자신들 관할에서 일어난 암살 미수 사건을 조사한다니 완전히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