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임트레인-273화 (273/519)

273화

“어떤 바둑?”

“은괴 두 짝씩 걸고 단판승부로 대국해 보자는 도전입니다.”

이런 제안에 최인범은 쉽게 응하려다 망설였다. 자신이 주장하던 그대로 세상이란 넓고 인재는 많았다. 혹시 하카타에 자신의 바둑 실력보다 고수가 있다면 큰 재물을 잃을 수 있었다.

‘돈을 벌어보려 왔다가 날리면 무슨 개망신이야.’

그러나 본시 승부사 기질도 많고 은괴 두 짝이면 새롭게 창업하는 봉황성에서 많은 일을 벌일 자금이라는 생각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기왕에 내기바둑을 두려면 은괴 5짝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항상 그렇듯이 판돈을 최대한으로 늘려 다소 무리한 내기바둑을 두기로 결정했다. 이런 큰 내기를 할 수 있는 것은 기마병들과 같이 호랑이 사냥을 부지런히 하면 충분히 벌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무슨 일이 봉황성에서 터지는 것도 아니니 우선 여기서 최대한 챙겨서 떠나자고.’

하카타는 이곳 나가사키보다 더 번성한 영지다. 그러니 먹거리가 더 많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나가사키가 번창한 것은 나중에 포르트갈 상인들이 들어와 개항한 이후다.

최인범은 즉시 대마불에게 지시했다.

“마불, 너는 함대로 연락해서 이키 섬에서 하카타 만으로 이동하라고 전해.”

“넷!”

이미 거래해서 챙겨 놓은 물건은 모두 판옥선에 적재한 상태다. 1함대가 이키 섬까지 나르면 이키 섬에 포진되어 있던 2함대는 무역품을 대마항으로 날라다 놓았다. 왜에서 황은 싸게 거래되니 부피가 너무 많아 일단 안전한 대마항까지 운반해 놓은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싹수가 없어 보이던 나가사키 영주는 한번 기가 완전히 꺾이자 그 후로는 두 번 다시 허튼 수작을 부리지 못했다. 그러니 하카타까지 가는 길이나 그곳으로 가서도 어느 정도의 안전은 보장된다.

나가사키나 하카타는 경쟁관계지만 심하게 전투를 벌이는 정도로 대립하고 있지는 않은 우호적인 관계다. 나가사키 영주는 500명의 군사를 내서 호위한다고 제안했다.

“다이쇼군님, 호위병사인 사무라이들과 같이 가시게 됩니다.”

“알았소. 그렇다면 나는 육로로 하카타로 가겠소. 시간을 정해 가는 길이 아니니 가다가 호랑이 사냥도 하겠소.”

최인범이 호랑이 사냥을 하며 천천히 이동하려는 이유가 있었다. 후쿠오카에서 자신과 거액을 놓고 내기바둑을 둘 선수의 실력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전에 바둑을 두자는 스님과 대국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는 심복부하로 잔심부름을 잘하는 마불에게 명령했다.

“마불. 전에 바둑 두자고 찾아온 스님을 불러 와! 떠나기 전에 한판 두자고 전하며 미곡은 형편에 따라 성의 것 가져오면 그것만 받는다고 해.”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마불은 재빨리 말을 타고 사라졌다.

최인범은 스님이 자신에게 정보를 제공해줄 사람이라고 판단해 다소 후하게 지도 대국을 두기로 했다. 어떤 명성이나 형편에 따라 지도 대국의 금액을 차등으로 받기로 정한 것이다.

기마병들이 이동하기 위해 그간 정들었던 아니면 필요 때문에 처녀들을 만나 뜨거운 작별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별채에서는 최인범이 지도대국비로 미곡 50가마를 가지고 찾아온 스님과 바둑을 두었다.

“여기는 뭐가 맛있죠?”

“그야 생선회죠.”

처음에는 왜의 풍물에 대해 말하다가 스님이 명나라 풍물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자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말해주었다. 대운하나 만리장성 자금성이나 남경에 대해 말하자 스님은 바둑 보다는 그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필요한 정보를 얻어야 하니 가볍게 명나라 풍물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아주 천천히 대국했다.

왜의 바둑은 자유롭게 두는 포석 방식이라 최인범은 바둑을 두는 재미도 솔솔 했다. 일단 먼저 2점 접바둑으로 두기 시작해서 속기로 몇 판을 두었다. 스님의 까는 바둑돌의 수는 이미 4점까지 올라가 있었다.

‘흠! 아마추어 고수급 수준이야.’

이런 정도를 두고 부터 슬슬 하카타의 바둑고수에 대한 실력을 물어보았다.

“스님과 사가키와 바둑은 두어 봤나요?”

“예, 제가 찾아가 지도대국을 몇 번 두었습니다. 제가 2점을 까는 접바둑입니다.”

“그렇군요.”

왜 즉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유명한 기보도 모두 한참 뒤에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된 에도 시절부터다. 아직은 왜의 포석식 바둑도 최인범의 실력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왜의 바둑에서 장점이라고 하는 포석에서 최인범은 이미 수많은 검증을 거친 정석이나 기타 정석에서 파생되는 신수를 대부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도 그렇지만 왜도 바둑 고수는 멀어도 바둑 고수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일부러 찾아가서 대국하는 경향이 있었다. 더구나 신분이 스님이다 보니 자유롭게 다른 영지를 여행할 수 있어 주변의 바둑고수들과 많은 대국을 나눈 경험이 있었다.

‘사가키도 별것 아니군.’

하카타의 고수라는 사가키도 스님과 2점 접바둑 실력이라니 크게 염려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내기 바둑에서 치수 그대로 놓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의 바둑은 최인범이 연패를 당하고 있었다.

“어라! 대마가 죽었어.”

연패하다가 후반에는 연승을 거두자 스님은 속도 모르고 무척 아쉬운 표정이다. 아마도 빚을 내서라도 미곡 200가마의 내기 바둑을 둬도 승산이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스님의 표정을 보아 속마음을 읽은 최인범은 ‘때는 이때다.’ 하고 바람을 잡았다.

“이거 고수를 몰라보고 지도 대국을 둔다고 했군요. 아무래도 맞바둑으로 미곡 내기를 하는 것이 좋겠소.”

“그렇군요.”

이미 입으로 들어온 미곡 50가마를 돌려줄 후한 마음자세가 아니다. 결국 맞바둑으로 자신이 흑을 잡고 내기바둑을 두는 형태로 겨우 두 집 차이로 미곡 50가마는 기어이 챙겼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위인은 뭘 알고 더 이상 도전을 안 하는데 이미 자신의 바둑 실력을 과신한 스님은 또 다시 제안했다.

“제게 사찰에 딸린 농토가 있으니 그것을 걸고 크게 한판 합시다. 대신 제가 마지막 판에서 졌으니 흑을 잡겠습니다.”

이 시절은 흑백 간에 몇 점을 접어 두는 돌이 있는 계가 방식이 아니다. 그저 쌍방이 차지한 집의 수로 승부는 갈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래도 먼저 선수를 두는 흑을 잡으면 약간의 차이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스님은 자신이 흑을 잡고 두는 바둑이면 반드시 이긴다고 판단한 것이다.

탐욕스럽게 다시 더 큰 내기를 두자는 스님의 말에 최인범은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속세를 떠나서 불도를 닦아야할 스님이 너무 물욕이 앞서는 것을 보자 넌지시 충고했다.

“부처님이 본시 물욕은 큰 화를 부르니 항상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라고 했는데 스님은 너무 욕심이 많군요. 그러다 큰 화를 부르는 수가 있으니 그만 두기로 하죠.”

“내기 바둑에서 한 판 두어 따고 그만 두는 법은 없지요. 그러니 한판 더 두죠.”

조선에서는 노름판 벗은 30명이라고 하고 객지 벗은 10년이라는 소리가 있었다. 특히 노름판 벗이 30년이라는 뜻은 내기에 깊이 빠지면 물욕이 넘쳐 위아래가 없고 그저 재물만 보인다는 뜻이다.

최인범은 굳이 자신의 권위를 앞세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감히 명나라 부마도위인 자신에게 도발하듯이 토하는 스님의 이런 무리한 요구를 듣자 괘씸할 수밖에 없었다.

‘겁도 없이 땡땡 중이 감히 나를 능멸해!’

속으로 ‘너는 죽었어!’하며 얼굴 표정을 살폈다. 스님의 눈은 기어이 내기를 두어 많은 재물을 따 보겠다는 의지가 투철해 보였다. 스님의 눈은 노름꾼들이 노름에 미처 아내나 딸을 팔아먹기 직전의 눈빛이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정도로는 너무 약하니 사찰은 물론 딸린 토지며 노비가 있으면 그것들도 모두 거시죠. 그리고 여자들이 있으면 그것도 모두 거세요.”

“좋습니다. 하겠습니다.”

“가치는 모두 은괴로 계산해서 증서를 쓰세요.”

그저 정보나 알아내려던 대국은 새벽이 되자 결국 엄청난 큰 금액의 내기바둑으로 변했다.

왜는 사찰과 비슷한 신사가 있고 그곳은 개인이나 영주도 함부로 어떻게 하지 못하는 공공의 재산이다. 그러나 왜의 사찰들은 한 결 같이 주지스님의 개인소유인 사찰들이라 이런 내기가 가능했다.

하카타의 대국이 아니면 완전히 초전박살을 내서 세상 무서운 줄 알라는 교훈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뒤에 더 큰 내기가 있으니 그저 비슷비슷한 형태로 대국을 오래 진행했다. 치수를 올바르게 하고 내기바둑을 두어 승부를 오리무중하게 할 필요성이 없었다.

아침에 시작된 대국은 주변에 영주나 바둑을 두는 상급 사무라이들이 모여들어 구경했다. 영주는 큰 행사라고 해서 화공을 불러 대국 장면을 그리게 하고 또한 기념이라며 최인범의 얼굴을 그리게 지시했다.

그래서 방안에는 화공들이 무려 10명이나 모여서 힐끗거리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내기 바둑은 진행되고 결국 후반에 장고를 거듭하는 스님 때문에 이틀이나 걸리는 대국으로 변했다.

드디어 밤이 어둑할 무렵에 내기 대국은 끝났다. 더도 덜도 아니고 딱 한 집 차이로 백이 이기고 승부는 끝나게 되었다. 계산력이 좋은 최인범은 나중에 자꾸만 뒤로 물러나 집 차이를 줄여서 거둔 완벽한 승리다.

최인범은 바둑이 끝나자 증서들을 들고 대마불에게 지시했다.

“농토도 팔고 사찰에 딸린 농노나 모든 재산을 은괴를 받고 팔아 버려. 급매몰이니 조금 싸게 내놓도록 하고.”

“넷!”

그러자 옆에서 대국을 지켜보던 영주가 급하게 나서며 제안했다.

“다이쇼군님. 제가 은괴 5짝으로 모조리 사겠습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사찰에 달린 재산이 그런 정도까지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은괴 5짝을 자신이 내서 내기바둑을 두게 된다고 판단한 영주는 패할 때를 대비해 후하게 가격을 주고 사는 것이다. 그래야 반이라도 은괴를 날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주는 사찰을 사서 나름 자신의 영달만을 빌어줄 개인 사찰을 소유할 욕심도 있고 최인범의 초상화나 그가 사용한 기물을 전시하면 쉽게 유명한 사찰로 변한다고 판단해 다양한 목적으로 투자한 셈이다.

최인범도 은괴 5짝을 내놓고 산다는 영주의 말에 쉽게 그의 의중을 알고 이내 판다고 답한 것이다.

‘만약의 경우 손해를 덜 보겠다는 뜻이군.’

시간이 다소 지체는 됐지만 이렇게 해서 후쿠오카로 가서 내기바둑을 둘 자금을 마련했다. 최인범은 마음이 무척 가벼웠다. 이제는 내기바둑에서 지던 이기던 부담감이 사라졌다.

그런 여유로움 때문에 최인범은 철을웅에게 지시했다.

“철 소령! 기마병 80명을 모조리 이끌고 구마모토(웅본:熊本)로 가서 착호 활동을 해주고 하카타로 와.”

“넷!”

“호랑이 가죽이나 뼈는 하나도 팔지 말고.”

“대장군님, 명을 따르겠습니다.”

최인범은 이제까지 사용하던 총병관 대신에 대장군으로 호칭을 통일하기로 했다.

사실 총병관이란 직책에는 왜를 정벌하라는 가정제의 명령이 담겨 있으니 굳이 왜인들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왜인들이 대장군인 다이쇼군으로 칭하니 똑 같은 호칭이 어울린다고 봤다.

최인범이 구마모토의 호랑이를 잡아 주라는 이유는 구마모토는 웅본(熊本)이라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백제 사람들이 이주해 사는 곳이다. 왜의 대부분이 그렇지만 구마모토는 특히 백제 시대의 유적이 많은 곳이다.

또한 구마모토 근처의 아소 산에서 질 좋은 황이 생산된다. 그 때문에 황을 그곳에서 직접 거래할 수도 있어 일단 호의를 베풀기 위해 기마병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이제 호랑이 사냥은 허접한 잡일에 불과했다.

“구마모토로 가서 영주에게 황을 가지고 단동으로 와서 봉황성과 거래가 가능한지도 잘 알아보고.”

“알겠습니다.”

최인범이 근접 경호원인 소위들과 같이 하카타로 이동하는 동안. 해상에서 지내던 해군들도 서서히 하카다 만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해군함대는 하카다 만의 입구에 위치한 시카노 섬으로 가서 판옥선 10척이 포진하고 있었다. 시카노 섬은 밀물 때는 바다고 썰물 때는 연결되는 섬이라 전략적으로 유리해 이곳에 포진한 것이다.

해군들도 함포사격 위주로 해상훈련을 했지만 이제는 다양한 진용으로 운항하거나 포진하는 훈련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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