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최인범은 어느 정도 혼잡은 벗어났다고 판단했다. 넓은 마당 구석에 있는 우물로 가서 물을 길어 갑옷 위에 들이부었다. 손으로 닦는 것보다 이런 방법이 좋아 보였다.
쫘아악! 쫘아악!
몇 번을 우물물을 부어 갑옷에 묻은 붉은 피를 씻었다. 그러자 백두가 달려와 짖었다.
컹! 컹!
백두의 갑옷에도 붉은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물을 퍼서 백두에게 부어 주자 백두가 몸을 부르르 떨어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다. 몸의 피를 닥아 내고 나자 백두가 코를 벌름거리더니 다시 짖었다.
컹! 컹!
피 냄새가 가시자 다시 코가 예민해져서 그런지 새로운 냄새를 탐지한 것 같았다. 힘차게 짖고 난 백두는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 깊숙한 곳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의 한쪽 벽을 향해 다시 크게 짖었다. 안에 뭔가 들어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뭐가 숨겨져 있군.”
최인범은 벽을 자세히 살피다가 드디어 고리를 잡아당기는 문이 열리는 것을 알아내고 잡아당겨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안에는 커다란 밀실이 있고 30명 정도의 처녀들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보아하니 대마도주의 어린 애첩들 같았다.
‘오나가나. 권력만 있으면 여자들을 탐하는군.’
백두가 여자들을 발견해 찾은 것은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여자들이 앉아 있는 방에 들어 있는 나무상자에 있었다. 커다란 나무상자에는 의외로 많은 생아편이 들어 있었다. 대충 보아도 분명 대마도에서 재배한 양귀비에서 채취한 생아편이 틀림없었다. 이번에도 백두가 크게 한 건 했다.
‘이것 봐라. 여기서 아편을 제조했군.’
전에 포르투갈 상선에서 찾은 아편보다 더 많은 수가 보관되어 있었다. 보아하니 대마도주는 생아편을 생산해 조선이나 왜로 판매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등신 같은 놈일세. 이런 생아편으로 무장이나 잘하고 있지.’
생아편을 명나라로 가져가면 엄청난 재물이 되니 태워서 버릴 수는 없었다. 사실 아편은 부상자 치료에 필요한 의약품도 되니 활용하기에 따라 유용한 물건일 수도 있었다.
최인범은 일단 여자들만 데리고 밖으로 나오고 마약인 생아편은 그대로 두었다. 나중에 봉황성 소속 판옥선으로 운반할 생각이다.
그가 처녀들과 밖으로 나오자 대마 도주는 그만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생아편까지 빼앗기게 되자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모두 포박해.”
“넷!”
최인범의 명령에 대마 도주나 생포된 그의 측근인 무사들은 모두 기마병들이 포박했다. 도주 일가는 모두 멀리 한양이나 또는 북경으로 압송할 생각이다.
이번에 대마도를 정벌하게 된 이유는 명나라 가정제의 명령 때문이다. 아무리 명나라에 복종할 마음이 없더라도 아직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힘이 미약한 봉황성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가정제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하기는 아직은 힘들다.
‘정신병자 기질이 다분한 가정제에게 지금 반발하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 아직은 적당히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유리해.’
더구나 조선은 여전히 명나라에 사대하는 사상들이 많았다. 지금은 명나라를 배척하는 행동을 의식적으로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자칫하면 조선군이 자길 잡아 명나라에 넘길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저 놈들은 한양으로 보내서 조선의 국왕의 손에서 처리하도록 해야 되겠어.’
자신이 북경으로 직접 보내기 보다는 조선 국왕이 종씨 무리를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어찌 되었건 그들의 조상이 한반도 출신이라는 점도 작용해 자신이 직접 명나라의 가정제에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조선으로 넘기면 주상께서 알아서 결정하겠지.’
전쟁 포로가 주된 전리품인 시대라 이렇게 판단했다. 분명 대마도로 출병을 명령한 가정제도 외부에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최인범은 보기에 가정제는 종씨인 대마도주를 북경으로 보내라고 조선에게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조선의 국왕도 무리하게 출병한 효과를 백성들에게 보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나야 그런 명분보다는 아직은 실리가 더 좋아.’
이제는 전과 달리 상당히 정치적으로 변한 최인범은 여러 가지를 고려해 대마도주를 조선군에게 넘기기로 했다. 대마 도주나 그의 가족들이 모조리 포로로 잡히자 저택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산발적으로 날렸던 많은 화살들도 기마병들이 빠르게 회수했다. 부러진 화살은 촉만 회수하거나 또는 짧은 화살인 편전으로 재활용하기 위해 수거되었다.
조선에서 많은 배를 동원해 군수품을 조달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건 추후에 일이다. 당장에 필요한 군수품은 최대한 아끼고 자체적으로 해결할 필요성이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저택에는 시체들이 한 곳에 모여졌다. 그들이 흘린 붉은 피들도 어느 정도 지웠다. 저택의 방안에 묻은 붉은 피들은 포로로 잡힌 여자들을 동원해 청소하고 마당의 피는 흙으로 덮었다.
전투 흔적이 어느 정도 지워지자 그제야 한정문이 저택으로 들어왔다.
“장군, 대마 도주는 조선으로 데리고 가시오.”
“총병관님, 도주를 그냥 조선으로 넘기겠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빨리 대마도주를 한양으로 압송하세요. 도주나 그의 가족들이 여기에 한 명도 없어야 대마도가 빨리 안정되니 서둘러야 합니다.”
인구의 반이 사는 항구를 점령했다고 하지만 도망친 왜구들이 많았다. 그들이 뭉치는 구심점을 대마도에서 빨리 떠나보내는 것이 좋았다. 구심점이 없으면 산속으로 도망친 왜구들은 배가 고파서 결국 견디지 못하고 투항할 것으로 판단했다.
대마도주를 아무 조건 없이 넘겨준다고 하자 한정문이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총병관님.”
대마도주를 잡은 공이 제일 큰데 그 공을 혼자서 차지하지 않고 포로를 조선군에게 넘겨주니 너무 고마웠다. 한정문은 힘들게 밖에서 전투를 벌여 포로를 잡았지만 모두 그저 그런 왜구의 두목들만 잡았다.
최인범은 한정문에게 넌지시 제안했다.
“마당의 쌓인 재물도 반으로 나누지요.”
이미 귀한 금괴나 은괴, 보석들은 모조리 챙긴 상황이라 남아 있는 것은 비단, 무명, 인삼에 불과했다. 창고에는 별도로 소금이나 쌀 그리고 잡곡들이 많았다. 그것까지 모조리 혼자 독식하기는 조금 미안해 공평하게 반으로 나누자고 제안했다.
두 세력이 공동작전을 펼칠 경우 항상 말썽이 생기는 것이 바로 전리품 분배다. 그래서 최인범은 가장 빠른 방법으로 전리품을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해 반으로 나누자고 제안한 것이다.
어찌되었건 최인범이 기마병과 같이 단독으로 탈취한 재물에서 반으로 나누자는 제안이라 거절할 명분이 없으니 한정문은 순순히 인정했다.
“좋습니다. 그런 그렇게 하죠.”
마당이 쌓인 물건들은 숫자를 파악해 둘로 나누었다. 그리고 창고에 들어 있는 곡물은 그대로 봉황성 군사들의 군량미로 사용하기로 했다.
이런 결정이 끝나자 최인범은 봉황성 몫으로 남은 전리품에 대해 처리 방법을 지시했다.
“모두 부두로 가져가서 수군에게 넘겨서 공평하게 나누도록 해.”
“넷!”
“그 대신 상륙해서 일체의 약탈을 금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별로 부유하지도 못한 민가를 털어 재물을 취하려다 공격당할 위험성이 높았다. 그리되면 자칫 급조된 수군의 허접한 군기만 노출될 위험성이 많아 이렇게 지시했다.
약탈 전쟁에서는 포로가 아주 중요한 전리품이다. 그중에 특히 여자의 경우는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 일단 재물을 공평하게 나누자 다음에는 저택에서 잡은 포로들에 대한 처리가 남았다.
남자들의 경우 모조리 한양으로 압송하기로 이미 정했고 여자들 처리가 남았다.
“여자들도 둘로 나누죠.”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등급을 나눈 여자들이다. 조선에게 넘겨준 여자들의 경우는 하급이라고 판정된 나이가 많거나 자식이 있거나 또는 못생긴 여자들을 넘겨줬다.
숫자는 공평하게 나눈다고 했지만 질에서는 천지차이가 나는 것이다. 100명의 처녀를 조선군에게 남기자 철갑웅이 호기심을 표하며 슬며시 물었다.
“총병관님, 조선군으로 넘겨진 여자들은 조선에서 어찌 처리할까요?”
“조선으로 데리고 가던지 아니면 여기서 노비로 부리던 또는 방면하던 알아서 처리하겠지.”
“남은 여자는 어찌 하고요?”
“그건 추후에 내가 봉황성으로 데려가 결정할 것이고.”
대답이야 명확해 보이지만 다소 애매하게 했다. 하지만 조선군으로 넘겨진 여자들은 조선으로 이동되어 모두 관노비가 될 처참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인범이 굳이 젊고 예쁘다고 보는 처녀인 여자들만 차지한 이유는 봉황성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다.
‘충성하는 부하들에게 나누어 줘서 혼인시키자고.’
봉황성은 이미 다민족 국가로 독자적이 세력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 왜인이면서 한민족의 피를 이은 여자들을 그곳에 정착시킨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여자들을 나누어 준다면 죽자 살자 충성할 놈들이 많을 거야.’
결국 여자들도 나뉘어 조선군이 반인 100명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저택에는 100명의 기마병과 100명의 처녀인 여자들만 남게 되었다.
“으악!”
“악!”
“으아앙! 으앙!”
저택의 밖에서는 남녀노소가 외치는 비명 소리도 들리고 간간히 어린아이들이 우는 소리도 들렸다. 아마도 조선군들이 민가를 수색해 대마도 사람들을 포로로 잡는 것 같았다.
최인범은 20명의 기마병과 철갑웅을 대동하고 저택에서 나와 수군들이 있는 부두로 향했다. 저택 밖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부둣가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빠르게 배에 오르고 있었다.
‘모두 조선으로 끌고 갈 생각 같군.’
조선에서는 대마도의 주민을 일부만 교체하려던 계획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그러니 이런 조치는 분명 자신도 모르게 조선 조정에서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이미 계획해 둔 것 같았다.
‘아예, 섬 주민을 완전히 교체할 생각이군.’
그래서 왜구들이 사용하던 배들을 무자비하게 격침시킨 것 같았다. 종전과는 전혀 다른 대외 정책이라 최인범은 약간 놀랐다.
‘오호! 조선이 조금 생각이 달라졌어.’
만약 섬 주민을 모두 관노비로 만든다면 이번 출병의 전비는 충분히 충당할 정도는 된다. 포로들의 신세가 이제부터 처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5대의 판옥선이 정박한 부두에 도착한 최인범은 선장들을 모아놓고 지시했다.
“지금부터 대마도를 일주하는 해상훈련을 실시해.”
“넷!”
“너무 먼 바다에서 훈련하지 말고 해안에서 어느 정도만 떨어져 훈련하도록 해. 잘하는지는 내가 섬을 돌면서 수시로 살필 것이니 그리 알고.”
“알겠습니다.”
“해안에 붉은 깃발이 보이면 그곳을 목표로 함포 사격을 하고.”
“넷!”
최인범이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것은 봉황성의 수군이 너무 허접하기 때문이다. 조선군들이 약탈하니 옆에 같이 있다가 보면 견물생심이라 수군들도 약탈행위에 동참할 염려가 많았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대마도 주민들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아 내리는 조치가 아니다. 봉황성 소속인 수군의 해양훈련이 너무 부족하니 훈련을 겸해 섬을 일주하며 산으로 도망친 왜구들의 잔당에게 무력시위를 벌이려는 것이다.
‘규슈로 넘어가도 비슷한 방법으로 착호 활동을 해야 되니 여기서 충분히 연습해 두는 것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