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드디어 많은 사건들이 벌어질 임인(壬寅)(1542년)의 새해가 되었다.
부소산 남쪽에 위치한 군청의 객사에서 머물던 최인범은 날이 밝기 전에 부소산으로 올랐다. 부소산 나성 터의 동쪽에 위치한 영일루(迎日樓)에서 새해의 해맞이를 하고 있었다.
“철을웅! 아직 상주에서 소식이 없나?”
“넷! 아무래도 부산포로 가서 만나야 될 것 같습니다.”
“갑옷으로 만들기 힘든 모양이군.”
왜로 떠나기로 했으니 이제 부여에서 부산포로 이동해야 된다. 그 때문에 상주에서 철갑웅이 갑옷제작을 끝내고 빨리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이다.
아직 누각은 세우지 않고 그저 터만 다듬어 놓은 곳이다. 왕세자가 부여로 찾아오자 그 때문에 많은 곳에서 기금을 보내와 부소산에는 추가로 몇 개의 누각이 더 건립하게 되었다.
또한 낙화암의 백화정이 훤하게 보이는 부소산에서 제일 높은 장소에는 사비루(泗泌樓)라는 누각을 건립하기로 했다. 왕세자가 자신도 기념으로 뭔가 남기고자 하자 영일루와 사비루 등을 건립하도록 권했다.
부소산 일대를 모두 당분간 특별한 행사나 장소에만 입산이 가능한 봉산으로 정해 송목벌금(松木伐禁)을 강력히 시행하도록 했다.
부소산의 소나무는 조선의 왕실애서 관리하는 나무라 함부로 벌채를 못하도록 조치를 내렸다.
최인범은 영일루가 들어서는 터에서 떠오르는 붉은 해를 바라보며 올해가 임인년임을 감안해 문뜩 자금성의 가정제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놈이 올해 진짜로 궁녀들에게 목이 졸릴라나?’
자신이 명나라를 떠났으니 어쩌면 원 역사 그대로 자금성에서 그 사건이 터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가정제의 잔악한 행위들은 궁녀들로는 견디기 힘든 고통들이 너무 많았다.
‘조금 위험하더라도 자금성으로 가서 가정제를 만나 더 많이 우려냈어야 했는데.’
위험을 감지해 빨리 조선으로 돌아오고 보니 그래도 큰 나라인 명이 재물을 벌기는 좋은 곳이었다. 관료들이 너무 엉망이라 쉽게 돈을 벌 수 있던 허술한 구멍들도 많았다.
최인범은 거의 민둥산인 부소산에 가끔 듬성듬성 서있는 큰 소나무를 자세하게 살폈다.
“별로 쓸모가 없는 소나무군. 구불구불해 조경에나 어울리지 선박건조에는 써먹기 힘들게 생겼어.”
“총병관님, 여기서도 배를 건조하시려고요?”
“아니야. 그저 배를 건조할 재료가 소나무라 관심이 가는 거야.”
해맞이 행사를 겸해 부소산을 돌아 보고나서 최인범은 떠나기로 했다.
“짐을 꾸려.”
“넷!”
부여에서 새해 해맞이를 끝나고 나자 최인범은 부하들을 데리고 부산포로 향해 떠나기로 했다. 이제 10명에 불과한 호위병을 대동하고 떠나는 그를 향해 사람들은 아쉬운 마음에 환송했다.
부여군수가 대표로 나서며 많은 선물들을 넘겨주며 말했다.
“총병관 또 오세요.”
“글쎄요. 다시 오게 될지 모르겠군요.”
“나중에 부산포에서 올라오시며 한번은 들리셔서 준공된 정자들을 직접 돌아 봐야죠.”
“되도록 다시 들리도록 해보죠.”
많은 재물을 풀어 부여에 여러 개의 누각이나 정자를 건축하도록 하던 그가 부여를 떠나게 되자 주민들은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기왕이면 공주님과 같이 오세요.”
최인범은 노인의 말에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여전히 조선의 공주도 정혼한 상태로 그대로 있어 어떤 공주와 같이 오라는 뜻인지 애매했다.
‘조선 공주와 정혼한 문제는 자순이 한양에서 잘 처리 했을 거야.’
선물의 수량은 아주 많았다. 가면서 먹으라고 육포도 있고 떡과 과일도 많았다. 최인범이 군밤을 좋아하자 일대에 밤나무가 많아서 그런지 큰 자루로 여러 개를 담아 주었다. 아무튼 자신도 나름 최선을 다해 도와줬지만 부여사람들은 순박하고 인심이 좋았다.
군수와 주민들이 최인범에게 특별히 보답이라고 넘겨준 선물은 인근의 한산 현에서 생산되는 세모시다. 더운 지방인 왜로 떠난다고 하자 그나 그의 부하들이 입으라고 모시로 바지저고리도 200벌을 만들어주고 별도로 모시를 400필이나 선물로 주었다.
“총병관님, 더위를 피하기는 모시옷이 최고입니다. 그리고 모시로 모기장도 따로 만들었어요.”
“고마워요.”
최인범은 한산의 세모시를 생산하는 마을에 거액을 기부했다. 그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형태다.
부여 양화의 유왕산은 나당연합군에게 백제가 멸망하고 당나라로 끌려가던 의자왕이나 대신들 그리고 포로로 끌려간 1만2천명이 유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제가 열리는 곳이다.
특별히 유왕산을 들렸던 이유는 전에 명나라의 보타도에서 만난 어민들 중에 자신은 백제 출신으로 사비성에서 끌려온 유민의 후손이라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는 유왕산에 대해 잘 알고 전에 한번 유왕산까지 밀 무역선으로 와본 경험이 있다고 했었다.
조선의 의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시 중에서 한산모시가 제일 유명했다. 그래서 생산지를 직접 방문하고 그곳에 공동작업장으로 사용될 건물을 세우도록 해주었다. 그 보답으로 한산에서 많은 모시를 보내준 것이다.
‘여기 사람들은 거저먹는 법이 없군. 은근히 자존심이 강해.’
최인범이 부여 주민들과 작별하고 부산포로 가기 위해 말을 따고 급하게 이동하는 가운데 한양에서는 특별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편 한양의 대궐에서는 또다시 연초에 들이닥친 명나라 사신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명나라에서는 전에 국서로 적어 보낸 파병을 독촉하고 아울러 또 다시 윤임을 데리고 가겠다는 주장했다.
전과 다른 점은 국서에는 파병을 독촉하고 많은 은을 보내라는 내용만 적혀 있었다. 윤임을 북경으로 소환한다는 내용이 빠진 것이다.
주상은 병이 깊어 힘든 가운데 명나라 사신인 왕충을 맞이해 협상을 벌였다. 보통 명나라 사신이 한양으로 오면 삼정승이 나서서 협상하지만 주상은 그들을 빨리 돌려보내려고 직접 협상하게 된 것이다.
“황제께서 요구하시는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했소.”
“조선에서는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한양에 도착해 봐도 파병한다는 군사들의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요.”
“그건 연초라 아직 부산포로 출발하지 않아서 그런 거요.”
주상은 명나라 사신인 왕충에게 새로 조직된 용호영의 병사 2천명을 모두 대마도 정벌에 동원한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명나라 사신이 직접 목격하는 가운데 용호영 소속인 병사들을 부산포로 보내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대마도 정벌에 찬반 의견으로 갈리다가 명나라에서 독촉하자 쉽게 정벌하기로 결정해 병사들을 움직이게 되었다.
한양도성의 10리 밖에 있는 왕십리의 용호영 군영······.
와글와글.
이곳에 주둔하던 용호영 병사들이 부산포로 이동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2천명의 병사들이 떠나지만 같이 이동하는 사람들의 수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모두 5천명이 떠나고 있었다.
그래서 명나라 사신에게는 한양에서 5천명이 부산포로 가고 그곳에서 모집한 병사 2천명과 같이 대마도를 정벌한다고 설명했다.
“전투병이 5천명이고 수군이 2천명이 동원되고 군수 지원부대까지 포함하면 최소 1만5천명은 동원되는 대마도 정벌 작전입니다.”
명나라 사신인 왕충은 왕십리로 찾아와 병사들이 떠나는 장면을 직접 보고 나자 매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왕충은 영의정을 바라보며 다소 느긋하게 말했다.
“좋소. 조선이 한양의 병사들을 움직여 남쪽으로 이동하니 믿겠소.”
“군사를 지휘할 총병관께서도 이미 부산포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미 한양으로 오면서 봉황성에 들렸다가 소식을 들어 알고 있소. 총병관께서는 봉황성에서 1천명을 보내기로 결정해 한양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으니 이번에는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반드시 공략해 왜구들을 소멸시키게 될 거요.”
당초 왕세자와 약속하기는 100명만 왜로 데리고 간다고 했는데 갑자기 1천명을 보내기 위해 이미 봉황성을 떠났다니 영의정은 놀란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지? 왜 병사들을 늘려서 보내는 거야?’
명나라 황제의 명령에 따르면 분명 봉황성에서 많은 병사를 보내기로 되어 있다. 하지만 왕세자와 최인범 사이의 비밀협상으로는 100명만 보내기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갑자기 변하자 영의정은 놀랐다.
영의정은 속으로 놀라고 있지만 명나라 사신에게 묻거나 비밀협상 내용을 발설할 수는 없었다.
‘이상한 일이야.’
용호영 부대를 전송하던 영의정은 사신과 같이 왕십리를 떠나 다시 도성 안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정보를 접한 영의정은 결국 대궐로 들어가 주상을 만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편전으로 들어와 주상을 만나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 명나라 사신의 말에 봉황성주의 약속과는 달리 봉황성에서 병사를 1천명이나 부산포로 보내기 위해 한양으로 오다니요?”
“과인도 지금에야 의주 부윤과 봉황성에서 연락을 받았소. 명나라의 대공주부 소속인 병사를 부산포로 보냈다고 하니 아마 부마도위의 안위가 걱정된 대공주께서 개인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린 것 같소.”
“전하, 대공주라고 그렇게 군사를 함부로 움직여 조선으로 들어와도 되옵니까?”
“총병관이 봉황성의 군권을 사용할 모든 인장을 대공주에게 넘겨줬으니 가능하다고 본 것 같아요.”
“전하, 그렇다면 봉황성에서 오는 군사들의 군량미는 어찌하고요?”
“그건 염려하지 말아요. 봉황성에서 오게 되는 병사들의 식량이나 모든 생필품은 그들 스스로 해결하고 군마가 300필이라고 군마가 먹을 건초나 곡물만 조달해 주면 됩니다. 그러니 빨리 비변사에서 관찰사들에게 연락해서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라고 통보하세요.”
“명을 따르겠나이다.”
비변사(備邊司)는 외적의 침입이 있다거나 민란이 대규모로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 만든 기구다. 국가에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가동되는 군국기무(軍國機務)를 관장한 문무합의기구(文武合議機構)다.
조선의 군사행정은 국방부격인 병조에서 관장하고 있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 등 변방에 국가적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병조 단독으로 군사 문제를 처결할 수 없어 문관은 물론 무관 그리고 관찰사까지 포함된 일종에 계엄사령부다.
비변사는 통상 삼정승이 도제조, 제조, 그리고 대신들이 참여하는 기구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왕세자가 비변사의 수장인 도제조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조는 삼정승이 맡고 있었다.
연로하고 병이 너누 깊은 주상은 드디어 사실적으로 조선의 모든 통치권을 왕세자에게 넘긴 것이다.
양위를 고려해 봤지만 효심이 깊은 왕세자라 오히려 소란만 할 것 같아 비변사를 통해 실질적으로 대리청정을 실시하는 것이다.
주상은 영의정이 물러가자 힘없이 상선에게 말했다.
“빨리 눕고 싶군.”
“전하, 앞으로는 절대로 무리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왕세자에게 국정 업무를 떠넘겼다고 하지만 태종 이래 다시 대마도를 정벌하러 군사를 일으켰으니 여러 가지로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비변사의 제조나 부제조를 만나 이런 저런 업무를 챙기다 보니 너무 무리해 몸이 더 좋지 않았다.
‘후우! 그래도 다행이야 총병관과 혼약을 발표했던 공주를 시집보내게 돼서.’
성급하게 딸의 혼약을 발표해 자칫 평생 혼인을 못하거나 아니면 명나라 공주가 정실로 있는 부마도위에게 후실로 시집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온 서장관이던 자순이 그 문제를 쉽게 해결해 주었다.
정혼이란 본시 본인이나 아니면 본인의 대리인이라도 만나서 서로 협의되어야 정혼하는 것인데 그게 아니니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것이다.
더구나 정혼한 공주가 누군지도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으니 그냥 조선 방식으로 따져 한쪽에서 혼인을 원해 의사타진을 해본 정도라고 해석해 주었다.
주상은 슬하에 다른 공주도 여럿이 있었다. 당초 혼사를 생각하던 공주를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도 상관이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