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부여는 풍광도 좋고 백마강에 조개도 그냥 주어먹을 정도로 많다고 했다. 논이 많아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시집을 보냈더니 부여도 부여 나름이다.
딸이 시집간 곳은 강원도 두메산골마을과 거의 비슷했다. 딸은 고생을 너무 심하게 하며 살고 있었다. 춘궁기에는 도토리를 따서 묵을 먹어 연명한다는 소리를 들어 그곳에 참나무가 많다는 것을 안다.
풍기군수인 주세붕이 새로운 농법을 교육시킨다고 서책을 만드는 과정에 이미 천지사방으로 널리 퍼졌다. 새로운 농법이 은밀하게 널리 퍼지고 있었다.
이 무렵. 최인범은 부하들과 같이 말을 타고 죽령을 오르고 있었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주변의 경치는 아름다웠다.
전에는 상당히 길이 험했으나 이제는 길이 전보다 더 넓어지고 중간 중간에 돌다리도 놓여 있었다. 만감이 교차되어 주변을 바라보던 최인범은 드디어 죽령고개 정상에 다다르자 놀랐다.
“어? 관문이 생겼네.”
“왜요? 전에는 없었던 관문인가요?”
“없었어,”
성곽을 만들고 누각도 세워 놓고 거창하게 승천관문(昇天關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승천이란 하늘로 오르는 의미라 때로 어찌 생각하면 죽는다는 뜻이다.
‘좋은 의미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별로 느낌이 좋지 않은 이름이야.’
자신이 전생에서 살다가 이 부근에서 죽음을 맞이해 새로운 세상인 조선시대에 살기 때문이다.
어찌 어찌 적응해 잘 살기는 하지만 사실 신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자유롭게 살기를 바랐지만 휘하에 항상 부하들을 데리고 다니다 보니 그렇지도 못했다.
‘옆에 부하들만 없으면 항상 자객들의 기습을 받으니 참으로 험한 세상을 살았어.’
잠시 이런 생각을 하며 관문에 도착하자 문지기인 군관이 검문했다.
“누구요?”
최인범은 아무 응수도 안하고 마패를 보여 주었다. 그러자 군관은 화들짝 놀라며 응수했다.
“총병관님, 어서 오세요. 근처의 창락골에서 사는 윤태길로 이곳 관문에서 근무하는 사맹입니다.”
군관이 자길 윤태길이라고 소개하자 최인범은 그가 누군지 떠올랐다.
윤태길은 창락골에서 사는 윤인병 진사의 아들이다. 전에 도박하다가 포도청에 끌려갔을 때 자신이 정난정에게 서찰을 보내 구해준 인물이다.
“그래 아버님은 잘 계시고?”
“아버님은 올 봄에 작고하셨어요. 여동생도 올 봄에 멀리 청주로 시집가고 집에 어머님과 아내만 남아 있어 한양에서 근무하다가 고향인 이곳에 죽령 관문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런데 이 관문은 언제 생긴 것인가?”
“준공한지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았어요. 돌이 아직도 반들반들 하잖아요.”
윤태길의 대답에 성곽의 돌을 보니 모두 새로 다듬어 만든 모습이다. 또한 누각의 단청도 너무 깔끔했다. 입구 옆에는 큰 비석이 서있고 그곳에는 성곽을 만든 기부자들의 명단이 보였다.
‘어라, 내 이름도 있어.’
나라에서 세운 곳이 아니고 단양군을 비롯해 풍기군 등 인근 고을에서 사는 수많은 백성들이 기부해 관문을 세웠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길만 보수하려던 것이 주변에서 호환도 많고 산적이 자주 출몰해 병사들이 근무하는 관문을 만들게 된 것이다.
‘지역 주민들이 재물을 내서 관문도 세우고 제법이군.’
보아하니 평소에는 40명 정도의 병졸들이 근무하고 사맹인 군관이 책임자로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최인범은 슬며시 물었다.
“이곳은 이제 호랑이가 없나?”
“주변의 깊은 산속에는 호랑이가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병사가 근무하는 관문을 세운 것이고요. 전에는 호랑이가 사라졌다가 작년부터 다시 많아졌어요. 근처에 멧돼지가 늘어나면서 호랑이도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렇군.”
최인범은 전에 자신이 호랑이를 너무 많이 잡아 조선에서 호랑이가 사라져 은근히 걱정했더니 다시 돌아 왔다니 다행으로 생각했다.
문뜩 ‘역사의 흐름이란 자신이 없으면 본래 상태로 돌아가려는 특성을 지닌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사실 호랑이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계기를 마련한 것은 자신이다. 배도치를 위시한 부하들의 훈련을 위해 근처에 멧돼지새끼를 무려 수백마리를 풀었다. 일부는 부하들이 잡아먹었으나 일부가 살아남아 폭발적으로 번식해서 사냥감이 많아지자 호랑이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최인범은 윤태길과 헤어져 빠르게 창락골로 향했다.
전에는 냇가를 따라 나있던 대로가 이제는 창락골로 향하는 대로가 새로 반듯하게 나있었다. 도로에는 수많은 상인들이 봇짐을 들거나 등에 지고 신나는 발걸음으로 이동했다.
‘여기는 상인들의 이동도 많고 경기가 활발하군.’
죽죽이 주막에 들어가자 주모가 최인범을 알아보고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어마나, 총병관께서 드디어 고향에 돌아오셨네요.”
“주모, 정말 오랜 만이군. 그간 무탈하셨나?”
“소인이야 항상 그렇지요. 월녀 아씨가 주막을 저에게 사주는 바람에 호강하고 삽니다.”
“그랬어.”
“예, 그러니 얼마든지 공짜로 묶으셔도 됩니다.”
주변에 가족이 없는 월녀는 나름 그래도 키워줬다고 해서 주모에게 은혜를 베푼 것 같았다. 하긴 자신도 사소한 인연이 생기면 돌보기 때문에 고아들은 모두 그런 점은 같은 것 같았다.
‘아마 외롭고 정이 그리워서 그럴 거야.’
최인범은 자신과 인연이 있던 죽죽이 주막을 비롯해 창락골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전과 비슷하지만 변한 것은 있었다. 전에는 아이들이 눈에 생기가 돌더니 약간 트릿해졌다. 행색으로 보아 사는 형편이 전부다 더욱 어려워 보였다.
‘산적이 사라져서 그런가?’
아마도 근처에서 산적들이 모조리 사라지자 장물을 취급하다가 그것을 못하자 마을 사람들의 사는 형편이 어려워진 것 같았다. 그래도 자신과 인연이 깊었던 곳이라 이렇게 생각했다.
‘감자나 고구마를 창락골부터 먼저 보급하는 것이 좋겠어.’
사소하더라도 인연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터라 이렇게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주막으로 돌아와 주모에게 윤인병에 대해 물어보게 되었다.
“윤 진사가 왜 갑자기 돌아가신 건가?”
“모두 내기바둑 때문이죠. 큰 재물을 잃었거든요.”
“허! 그런 일이 있었군.”
윤인병은 자신이 떠난 이후에도 내기바둑을 너무 좋아하다가 많은 재물을 잃어 그 충격으로 죽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 윤 진사댁은 사는 형편이 상당히 나빠져 있었다.
‘처음에 너무 쉽게 면포를 따게 해 준 것이 화근이었어.’
최인범은 과거의 기억 때문에 윤인병의 처인 임여녀를 만나 부조금으로 금괴 5개를 넘겨주었다. 전에 시기성 바둑을 둔 것을 감안해서 넘겨준 것이다. 그러자 임여녀는 속도 모르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더구나 딸도 멀리 시집을 떠났다고 하니 최인범은 이제 창락골에 대한 인연도 이것으로 깔끔하게 끝났다는 느낌이 들어 모든 잡념을 훌훌 털어버렸다.
다시 흑혈풍에 오른 최인범은 부하들에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빨리 풍기로 가자.”
“넷!”
지난 인연을 훌훌 털어버리기라도 하듯이 최인범은 빠르게 말을 달려 풍기의 동물농장에 도착했다.
웅성웅성. 와글와글.
고대광실로 지어진 저택의 넓은 마당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풍기군수를 비롯해 않은 관료들이나 양반들 그리고 마을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마당의 한쪽에는 사당패들이 무리를 지어 풍악을 울렸다.
덩더쿵! 덩더쿵!
마을사람들은 신이 나서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며 환영해 주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저택의 사랑채로 주세붕과 같이 들어가 사랑방에서 앉아 슬며시 물었다.
“어떻게 제가 오는 줄 알고?”
“조정에서 연락도 오고 파발도 별도로 와서 알죠.”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최인범은 조선 역사에 큰 흔적을 남긴 주세붕을 드디어 만나자 너무 반가웠다. 그가 처음 세우게 된 사학(私學)인 서원(書院)이 나중에는 조선에 큰 불씨를 안겼지만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세운 것은 아주 잘한 업적이다.
주세붕은 풍기에서 생산한 구리를 팔아 서적을 구입하는가 하면 스스로도 뛰어난 문장가이자 학자다. 여러 권의 저서를 발간한 청렴한 관리로 목민관으로 갖춰야 할 미덕과 모범을 보여주었다.
특히 인삼재배를 처음으로 보급한 그의 행적은 높이 평가할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래서 최인범은 주세붕을 조금 더 자세하게 바라보았다. 한 눈에도 성품이 바르다는 느낌이 드는 양반이다.
‘이런 사람이 조선 정치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데.’
문뜩 이렇게 생각해 보지만 사실 주세붕 못지않은 유명하고 유능한 인재가 조선에는 많았다. 하지만 조선이란 전체적인 흐름 때문에 별로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결국 조선은 패망의 길을 걸었다.
많은 손님들이 저택으로 찾아왔다. 그 때문에 커다란 주안상이 마련되고 잔치가 시작되었다. 찾아온 관료들이나 양반들과 술을 마시며 최인범은 주세붕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군수님은 인삼 재배에 관심이 많죠?”
“그렇습니다. 이곳의 농장을 돌아보니 이미 대규모로 삼포를 만들어 경작하고 계시더군요.”
“아, 이미 삼포를 돌아 보셨군요. 아무튼 군수님께서 인삼 재배를 적극적으로 권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년부터는 씨도 생산이 많아지니 풍기 지역은 인삼 재배를 충분히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전에는 산삼도 인삼으로 칭했지만 이제는 산삼과 인삼을 구분하는 것이 좋아 이렇게 말했다. 아직은 뿌리가 굵은 현대적 인삼이 아니라 뿌리가 가늘게 생긴 장뇌삼 정도라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인삼을 인공으로 재배하다 보니 환경이 달라서 그런지 점점 뿌리가 굵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인삼을 다년간 재물을 투자해야 재배가 가능하다.
그 때문에 최인범은 사랑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인삼경작을 슬며시 권했다.
“재배 기술은 알려줄 것이니 인삼을 경작해 보세요. 다만 재배하기가 까다로우니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분들이 시작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한 번 해보죠.”
“밭이라고 모두 재배가 잘 되는 것은 아니니 잘 생각을 하세요.”
한동안 인삼 재배에 대한 홍보를 하며 술을 마시다가 모여 있는 사람들이 사랑방에서 모두 떠났다.
그러자 최인범은 제일 뒤에 남은 주세붕을 불렀다.
“군수님은 저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죠.”
“뭐 특별한 말씀이 있나요?”
“예, 제가 가지고 있는 인삼재배 서책을 군수님께 드리려고요.”
이렇게 말하자 군수가 이내 밖에서 기다리는 통인에게 명령했다.
“너 가서 빨리 상자를 가져와.”
급하게 밖으로 나간 통인이 커다란 나무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 안에는 수많은 서책들이 놓여 있었다.
“이게 뭐죠?”
“이건 모두 그동안 이곳의 농장에 직접 와서 보고 적어 놓은 새로운 농사법을 적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