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주상은 끝내 입을 열지 못하고 대궐로 돌아갔다. 그러자 최인범은 혹시 ‘딸인 공주와 자신을 억지로 정혼시킨 일을 가지고 부탁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하며 추측했다.
‘아직도 그런 문제가 남아 있나? 나중에 알아 봐야 되겠어.’
한편 한양에 도착해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권세를 부리던 명나라 사신들은 비상이 걸렸다. 자신들의 호위병으로 같이 온 동창의 살수들이 암살을 획책해 부마도위께서 부상을 당하자 이제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장군, 이 노릇을 어쩌지?”
“태감님, 빨리 부마도위를 만나 전후 사정을 정확하게 알려야 합니다.”
“무슨 전후사정을 알려. 우리는 그 일을 전혀 모르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저지른 일로 오해할 것이 아닙니까? 자금성의 내부에도 태감님과 다른 패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려야 하옵니다. 한양에서 무사히 떠나도 봉황성에서 대공주님이 우릴 추포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군.”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동창소속인 살수를 본시 20명을 대동하고 왔다. 그런데 그 중에 5명이 암살 미수사건에 동원되었다. 그들이 동원된 사실은 죽은 3명 이외에 2명이 이미 어디론지 행방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영문을 전혀 모르는 진상 태감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자금성 내의 권력기구인 동창 내부 사정에 대해 최인범에게 털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사인 팽지평과 같이 급하게 마포나루의 주막으로 찾아갔다.
주먹으로 찾아온 두 사람을 보자 최인범은 그저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하명하신 업무는 잘 되어 갑니까?”
“아닙니다. 대장군 저희들을 살려 주세요.”
윤임을 잡아가기는커녕 자신들의 목숨을 구명하기 바쁘게 되었으니 뭐든 잘 될 리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황제의 밀명까지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가정제의 이간계는 모조리 무산되었다.
“대장군, 폐하께서는 윤임 대감을 추포해 간다고 하며 조선을 압박해 해군을 보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저희를 조선에 보냈습니다.”
“그거야 이미 온 세상천지가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진짜 숨은 뜻은 그것이 아니오라 병력 대신에 조선에서 은괴나 금괴를 요구해 텅 빈 황실의 재정에 사용하려고 압박을 명령했습니다.”
“그것도 바보가 아니면 다 아는 상식이 아니요. 그것과 그대들이 데리고 온 동창의 무리가 나를 암살하려는 사실과 무슨 상관이 있소? 내가 보기에는 그대들이 요동에서 이동할 때도 나를 허수로 보고 불경스럽게 대하다 보니 그런 분위기가 부하들에게 전이되어 이런 참담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소.”
“그건 정말 오해입니다.”
기겁한 두 사람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최인범이 지적한 것은 거의 사실이고 다만 왜 부하들이 암살을 시도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아무튼 괴사야. 어떻게 그런 사건이 벌어진 거지?’
이미 약점이 잡혀버린 두 사람은 자신들이 아는 자금성이나 또는 명나라 조정 내부의 갈등들을 소상하게 토했다. 추악한 가정제의 음탕하고 괴이한 행동들도 모조리 까발릴 수밖에 없었다.
“오래 정사를 벌이는 효력을 보이는 단약을 만들겠다고 인육을 황제가 구입하기 위해 그런 동창을 시켜 그런 살해사건을 저질렀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그 바람에 부마도위께서 그런 사건에 휘말린 겁니다.”
“그랬었군. 그런 사건은 모두 다른 태감이 시킨 사건이란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그 패거리가 이번 사건도 저질렀을 겁니다.”
자신이 여각에서 납치당했던 인육 만두의 사건에 대한 숨겨진 비밀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자금성 안에서 벌어진 너무도 충격적인 사건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황궁 안에도 패거리가 복잡하군요.”
“그러하옵니다. 태감들이 저지른 일이니 저희들과는 상관이 없는 사건입니다.”
“알겠소. 내 그대들의 의중을 잘 아니 참고 하지요.”
역사에 기록된 가정제가 저지른 괴이한 난행들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난교는 기본이고 후궁들에게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배게 하기 위해 잠자리를 가지라고 강요하는 일들도 많았다.
이런 사실이 외부로 밝혀지면 명나라에서는 대규모로 반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리되면 가정제는 누구 손에 죽을지 모르는 중요한 비밀들이다.
여전히 두 사람은 자신들을 따라온 동창의 무리가 저지른 암살 미수 사건의 실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살기위해 한양에서 벌어진 암살미수 사건은 자신들이 아닌 자금성에 있는 다른 태감 패거리들이 저지른 사건이라고 허위로 자백했다.
“좋소. 그렇다면 그 내용들을 자술서로 자세하게 써서 넘겨주시오.”
“그렇게 하죠.”
자술서만 쓴다고 해결될 사건은 아니다. 결국 조선의 고관들에게 받은 뇌물들을 모조리 최인범이 있는 주막으로 보내 구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일 오랜 계책인 뇌물 공여 방법은 아주 유용했다. 최인범은 진상과 팽지평으로부터 많은 정보와 뇌물을 받자 더 이상 암살미수 사건에 대해 추궁하지 않았다.
그러나 뇌물금액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태감, 이미 잘 알다시피 나야 가난한 조선출신이고 정향 대공주는 남경에서 제일 갑부인 왕부 출신이 아니요.”
“그건 그렇군요.”
“내가 너무 가난하고 돈벌이도 시원치 않다고 홀대를 받아 첫날밤도 치루지 못한 내용을 이미 잘 알거요. 그러니 그런 점도 참작해야 합니다.”
사치하는 대공주인 아내에게 보란 듯이 많은 재물을 듬뿍 안겨 줘야 하니 구명 조건으로 뇌물을 더 많이 내놓으라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희와 같이 온 명나라 비단 장수들의 비단을 모조리 드리도록 하죠.”
“그럼, 비단 장수의 비단을 강제로 빼앗아서 나에게 준다는 거요?”
“아닙니다. 차용증을 써주고 빌리는 것이죠.”
결국 최인범에게 코가 끼인 진상이나 팽지평은 비단장수들의 비단을 모조리 빌리고 차용증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거액을 모두 토하고 돌아가면 자금성으로 보낼 재물이 없어 걱정했다.
“그런 용도에 필요한 자금을 대출받는 문제는 내가 서찰을 써 줄거니 천진에 있는 발해 전당포의 소 부인에게 한 번 찾아가보시오.”
“대장군, 정말 고맙습니다.”
적을 이용하려면 밀당을 잘해야 하니 적당히 숨통은 트여줘야 한다.
‘이놈들은 이제 소피아가 잘 요리하게 될 거야.’
물론 윤임 대감을 북경으로 데리고 가는 문제는 일단 미루기로 했다. 증거가 너무 부족하다는 이유로 부마도위인 자신이 추후에 직접 조선 조정과 협상하며 따지도록 절충했다.
“증거가 더욱 보강되면 조선에서도 거절하기 힘들 거요.”
“알겠습니다. 북경으로 돌아가서 폐하께 그리 보고하죠.”
나머지 업무들도 부마도위가 직접 한양으로 왔으니 조선 조정과 직접 협상하도록 하고 명나라 사신들은 북경으로 떠나게 되었다.
“산동의 반란군이나 왜구들의 문제는 내가 조선의 조정과 협의해서 잘 처리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그렇게만 해주시면 황제 폐하께서 만족하실 겁니다.”
명나라 사신이 드디어 조선에서 주는 기본적인 예물만 챙겨서 북경으로 떠났다.
그들이 떠나고 나자 그동안 외숙부인 윤임의 죄 때문에 세자궁에서 두문불출하던 왕세자가 한정문과 같이 평복 차림으로 찾아왔다.
“어서 오세요. 세자마마.”
“그대를 이제야 만나는 구료. 일찍이 모든 면에서 뛰어난 그대를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니 너무 반갑습니다.”
“그저 바둑이나 조금 잘 두지 별 재주가 없사옵니다.”
왕세자는 한정문을 통해 무술이 뛰어나다는 최인범을 오래전에 만나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제 최인범이 신분이 달라졌으니 전에 계획한 측근으로 부릴 수 없다는 점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이제는 명나라의 고귀한 신분으로 변해 너무 아쉽군요.”
“아닙니다. 저는 여전히 효심이 깊은 왕세자님을 무척 좋아합니다.”
결국 이런 대화를 나누다가 조선에서 별도로 벼슬을 내릴 처지도 아니라 왕세자는 특별한 제안을 했다.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부마도위가 가까운 형제와 같이 느껴져서 그러니 우리 의형제를 맺읍시다.”
“너무 과분하옵니다.”
“뭐가 과분하다는 거요. 이미 황제의 사위인 부마도위로 고귀한 신분인데.”
왕세자는 북쪽의 실권자를 아우로 삼게 되면 큰 힘을 얻게 된다. 북쪽 국경지역을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있다고 판단해 이런 제안을 했다. 물론 이제 힘이 너무 약해진 윤임 대감의 후원자 역할이 너무 불안하니 자신의 정치적인 배경을 만들 요량도 있었다.
외로운 처지로 변한 왕세자는 선택의 길은 별로 없었다. 당장 목숨은 부지했지만 윤임은 여전히 언제 탄핵을 받아 우의정에서 물러나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약해진 위상을 높일 필요성이 있었다.
“마마께서 그토록 원하시면 그렇게 하시죠.”
“고맙네. 내가 아주 든든한 아우를 두었어.”
왕세자가 의형제를 자청하자 최인범은 결국 승낙하게 되었다. 원 역사에 효심이 깊고 문정왕후에게 시달려서 결국 일찍 죽은 왕세자라 동정심이 생긴 것이다. 물론 그의 죽음에는 소윤 패거리들이 벌인 독살의 의혹도 있기 때문에 더욱 측은지심이 발동했다.
최인범은 간곡하게 진심어린 말로 위로했다.
“형님 저하께서 언제든지 제가 필요해 아우를 불러만 주신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돕겠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아우님! 그렇게 말해주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이 기쁘고. 정말 고맙네.”
왕세자의 나이가 몇 살 더 많으니 최인범이 아우가 되었다.
결국 왕세자와 최인범은 결의형제 의식과 더불어 피를 나눈 형제라는 의미가 담긴 서류까지 만들어 수결했다. 두 사람은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영유하는 한 형제로 살겠다는 약조를 단단히 한 것이다.
이런 문서까지 만들자 최인범의 책사로 변한 자순은 미묘한 웃음을 뗬다.
‘조선의 왕세자가 너무 큰 착각을 하는군.’
자순이 생각하는 내용은 실로 경천동지할 의미가 담겨 있었다. 본시 요동 출신의 여진족인 자순은 조선과는 전혀 다른 윤리 규범과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그런 것 때문에 최인범에게 고루한 학문이라는 성리학을 버리라고 제안했던 것이다. 창업을 위해서는 주군의 가신들이나 주변 세력과 혼인정책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제왕은 무치이니 성리학에서 말하는 윤리 도덕은 생각하지 않아도 돼. 오직 민심은 천심이니 그들에 대한 여론만 따르면 된다고.’
결국 한양으로 왔던 명나라 사신이 떠나고 나자 황제가 요구한 3가지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완전히 백지가 된 것은 아니다.
조선은 3가지 모두 어느 정도의 성의 표시는 해야 된다. 그렇게 되자 조선 조정에서는 황제가 요구하는 산동 반도의 반군 소탕이나 대마도로 출병하는 문제에 대해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의 하삼도 지역이 기근이 너무 심해 진휼청을 설치해 운영할 지경이라 군사를 동원할 여력은 없었다.
“어떻게 하지? 하겠다는 모양새이라도 내야 자금성의 황제폐하께서 가만히 있을 것인데.”
“부마도위로 대장군이신 총병관께 무슨 복안이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조정에서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나마 부마도위와 친한 한정문이 주상의 밀명을 받고 자주 마포의 주막으로 찾아와 상의하고 있었다.
“대장군, 어찌 처리하면 좋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