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그들의 생각에는 이 음식만 먹으면 주상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건장한 체구인 40명의 호위병들이 추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료들이 음식에 전혀 손을 대지 못하자 최인범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오라, 먹지 못하는 것을 보니 음식에 본래 독액이 들어 있는 것이 확실했군.”
‘헉!’
이런 날벼락 같은 소리에 놀란 관료들은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우그려 넣고 씹지도 못하고 목구멍으로 넘겼다.
억지로 음식을 먹으면서 윤임은 두려운 표정으로 최인범을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죽을죄를 지었으니 한 번만 살려달라는 아주 간절함이 절절히 보였다.
‘그러게 왜 죽을죄는 저질러.’
말로 직접 사정하지는 못하고 그저 행동거지로 애절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윤임을 보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최인범은 어차피 주상의 뜻이 윤임을 살리기로 결정했다니 살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자길 죽이려는 짓이야 용서가 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면 결국 명나라의 가정제 뜻대로 된다. 조선이 명나라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너무 싫었다.
‘악연이지만 결과는 어느 정도 좋게 됐으니 당분간은 좋은 인연으로 받아 두지.’
이때 명나라 사신을 만나러 갔다던 자순이 돌아왔다. 건넌방으로 들어온 자순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보고했다.
“대장군, 호위병들이 죽여 버린 자객들은 명나라 사신과 같이 온 동창의 살수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조선에서 어려서 자금성으로 보내졌던 환관들입니다.”
“그래? 정사인 진상은 뭐라고 하던가?”
“소신이 정확한 증거를 보여주니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하더군요. 소신이 보기에도 정사인 진상이나 부사인 팽지평은 자객들이 모두 자신들과 같이 조선으로 온 동창의 살수인 것은 인정하지만 강변에서 벌어진 암살 사건은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죽은 놈들이 모두 동창소속이란 확인서는 받았나?”
“넷! 정사와 부사의 수결을 동창소속이라는 확인서에 받아 두었습니다.”
“알았어, 자객들이 동창의 살수들로 인정했다면 더 이상 진상 태감을 추궁하지 말도록 해.”
“넷!”
이제 명나라 사신들의 약점을 틀어쥔 상태라 그들의 위세는 많이 줄어들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조선 조정에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비밀이란 지켜질 경우에 가치가 높은 법이다.
“자네만 알고 있어.”
“넷!”
이제 명나라에서 보낸 국서의 힘만 약화시키면 치졸하게 이간계를 쓰려는 가정제의 의도는 많이 틀어지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윤임을 아직은 살려둘 필요성이 있었다.
복수를 남의 손에 떠넘기기가 싫었다. 더구나 명나라의 등신 같은 황제 손에 놀아나 자신의 손에 더러운 피를 뭍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판단한 최인범은 윤임 대감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이번에 명나라의 사신이 가져온 국서는 허술한 점이 너무 많아요. 제가 습격당한 사실이야 분명하지만 아직 자객들의 정체도 불분명하고 배후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전혀 없어요.”
“증거가 없다고요?”
“그렇습니다. 더구나 명나라에서 주장하는 대감과 연결된 중간 책인 상인이 있다는데 그가 잡힌 상태도 아닙니다. 그러니 천진에서 벌어진 암살미수사건은 아직도 미제사건이라 대감께서 벌 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최인범의 이런 후한 말에 윤임은 구명의 기회가 생겼다고 느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자신의 잘못으로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었던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살 구멍이 생겼어.’
물론 부마도위인 최인범의 말 몇 마디로 완전히 구명된 것은 아니다.
명나라 사신들도 어느 정도의 증거는 가지고 압박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암살미수사건은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더구나 백삼수가 아직 명나라에 있으니 그가 잡히거나 또는 배신할 경우는 자신은 또 다시 암살을 사주한 죄를 추궁 받게 된다.
나중에 일은 나중이고 우선은 살았다는 기분이 들자 조금 전보다 얼굴빛은 밝아졌다. 윤임의 얼굴이 밝아지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표정들이 환해졌다.
이때 제일 구석에서 음식을 먹던 젊은 관료는 얼굴이 퍼렇게 변해지며 속으로 한숨을 토했다.
‘후유! 너무 아깝네. 이번에 대윤 일파를 완전히 제거할 좋은 기회인데.’
다른 사람은 그런 표정을 읽지 못했지만 최인범은 즉시 알아보았다.
‘누구지? 허우대는 멀쩡한 놈인데.’
최인범은 이렇게 생각하고 즉시 자순에게 명령했다.
“자순, 저쪽 구석에서 술을 들입다 마시고 있는 관료는 누구야? 문관인데.”
“아! 저 사람은 윤원형입니다.”
이런 대답에 최인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의 조정은 차기 왕권 때문에 대윤과 소윤으로 갈린 상태로 심하게 다투고 있었다.
소윤인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형은 귀양을 갔다가 풀려나와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부마도위인 최인범이 다쳤으니 걱정해 문안 인사를 왔다. 하지만 속심으로는 자신의 눈으로 대윤 파들이 박살나는 현장을 확인하고 싶어서 왔다.
‘저놈도 어지간하군. 여기에 직접 나타나다니.’
더구나 대문 밖에는 쓰개치마를 쓴 젊은 여인이 보였다. 그 여인은 윤원형에게 빨리 나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시선을 집중해 바라보자 그녀의 얼굴이 확실하게 보였다.
‘헛! 상당히 미인이네.’
쓰개치마 사이로 보이는 여자의 미모가 뛰어나다 보니 즉시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역사에 기록된 사실과 자신의 짐작보다 미모가 더욱 뛰어났다. 속눈썹도 짖고 입술이 붉으며 눈은 초롱초롱해 재기가 넘쳐보였다.
‘정난정이 확실하군.’
자신의 아내들의 미모에 비해 약간 처지지만 그래도 미모나 표정은 뛰어나 보였다. 문뜩 좋은 머리를 잘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헐! 기왕이면 처녀로 있을 때 만났으면 좋았을 건데.’
아무래도 정난정의 미모에 약간이라도 관심이 가는 것은 여자를 접한 지 조금 지나서다. 욕구가 끓어 오른 점도 많이 작용했다.
최인범은 대신들이 어느 정도 음식을 먹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서로 인사도 했으니 돌아가세요. 오늘 먹은 밥값은 후불입니다. 그러니 조금 넉넉하고 후하게 지불해 주세요. 아내가 너무 사치해서 저는 밥을 공짜로 남에게 대접해 드릴 정도로 재물이 없어요.”
‘헉! 밥값을 내라네.’
살았다는 느낌에 일어나던 관료들은 최인범의 이런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인범의 말에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다. 목숨을 구명 받았으니 다들 목숨 값을 후하게 내놓으라는 뜻이다.
자순도 이런 최인범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관료들에게 뇌물을 요구해도 되나? 내가 알던 주군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야.’
은자를 지니고 온 대신들은 급하게 은자를 내놓고 허둥지둥 주막을 떠났다. 미처 은자를 준비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뭐를 보내겠다고 약속하며 떠났다.
그들이 모조리 떠나고 나자 최인범은 다시 명령했다. 그러자 명령을 들은 자순은 더욱 놀라고 말았다.
‘이럴 수가?’
최인범은 관리들이 떠나며 내놓은 많은 은자를 모조리 근처에서 배회하는 굶주린 아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라고 명령했다.
“주모! 여기 은자를 가지고 밥과 고기 떡을 차려서 아이들에게 모조리 나누어 주시오.”
“예이!”
자순은 잠시 주군을 뇌물 받기나 좋아한다고 판단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역시, 내가 잘 판단했던 거야.’
어린아이에게 무상으로 음식을 제공하자 자순은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넘기지는 않았다. 그는 조선에서 백성들 사이에 떠도는 민담인 아기장수에 대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어린 나이에 높은 벼슬인 대장군이 되어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와! 재밌다.”
“아기장수인 그분은 본시 멀리 백두산에서 태어난 단군의 직계 후손이야.”
“그렇군요.”
무슨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내용은 아니다. 그저 힘들게 사는 조선 백성들을 위해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정도로 말해 주었다. 풍성한 음식을 먹는 아이들은 입도 즐겁고 귀도 즐거우니 이야기에 푹 빠져 버렸다.
“본시 여진 땅은 고구려라는 나라가 차지하던 땅이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나 조선 사람들은 같은 민족이야.”
“어, 그런 이야기도 있어요?”
“당연하지. 그러니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듣고 친구들에게 말해 주고 친구들도 이곳으로 와서 얼마든지 음식을 먹으라고 해.”
“와! 신난다.”
아이들에게 후하게 베풀자 자연히 최인범에 대한 한양의 여론은 급격히 좋아졌다. 재물은 조선의 고관들이 내고 선심이야 최인범이 쓰고 있다.
이미 목표가 변해버린 최인범은 이미 전생의 노회한 정치가들이 취하던 선심성 정치적인 행동을 저절로 답습해서 따라하고 있었다.
한편 자객의 공격으로 부상당한 최인범은 어의가 와서 보살피고 당초 자신이 응급처치를 했다. 하지만 허벅지의 상처가 너무 깊어 밖으로 함부로 나돌아 다닐 형편은 되지 못했다.
한편 초조해서 기다리던 주상은 윤임이 별로 죄가 없다고 최인범이 말했다는 소리에 감격했다.
“역시, 최인범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야.”
본시 조선은 명나라 사신이 오면 주상께서 서대문 밖의 모화관(慕華館)까지 나가 영접한다. 그곳에 지어진 누각은 모화루(慕華樓)라고 칭하고 그 앞에 영은문((迎恩門)을 세우고 남쪽에 큰 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다.
조공 무역할 때 동여진에서 말을 들여와 이득을 보거나 왜에서 은을 들여와 명나라로 넘겨 큰 이득이야 본다. 하지만 명나라에 충성 맹세하는 제후국인 것은 확실했다.
명나라에서 사신이 올 때는 2품 이상인 원접사(遠接使)를 의주까지 보냈다. 선위사 또한 2품 이상인 자로 도중 5개 처에 보내어 맞게 하고 연회를 베풀어 환영했다. 그러니 주상께서도 사신보다 힘이 막강한 부마도위가 머무는 마포나루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전하, 어인 일로 여기까지?”
“경이 불의의 사고로 다쳤다니 너무 걱정이 돼서.”
“아니옵니다. 보내주신 어의 때문에 이제 다 나은 것 같사옵니다.”
“다행이군. 경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부탁하게 괴인이 모두 들어줄 것이니까.”
“감읍할 따름입니다.”
자신을 찾아온 주상전하께 다른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부측을 받아 겨우 걸어서 다니기는 하지만 죽기 직전 같이 너무 허약한 모습이라 안쓰러워 보였다.
‘옆에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군.’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지난 과거의 생각이다. 이제는 위치가 변해서 그저 간접적으로 조선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주상은 뭔가 부탁하고 싶은 표정이나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을 부탁하려고 저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