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자신에게 호의를 보낸다고 해서 첩자 노릇을 안 한다고 볼 수 없었다. 웃음 뒤에 칼을 숨긴다는 소리장도(笑裏藏刀) 수법으로 자신을 뒤에서 해할 수 있는 위인 같았다.
다소 의혹어린 표정으로 자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순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이 왜 장담하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대장군, 본시 여진족이나 또는 몽골의 유목민들은 호칭에서 아주 엄격합니다. 나름 오랜 전통을 지닌 규칙이 있어요. 그들은 칸이라는 호칭은 보통 기마병 3만명 이상 그리고 휘하의 유목민들이 최소한 50만명이 넘어가야 칸이라고 칭합니다.”
처음 듣는 정보라 최인범은 놀라고 말았다. 여진족이 칸이라 부르는 칭호에는 그런 숨겨진 깊은 뜻이 담긴 정보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저 부르는 소리인줄 알았네.”
“대장군님, 기병대로 합류한 여진족들이 대장군님을 가끔 칸으로 스스럼없이 부르니 그런 정도를 이미 지휘할 군세는 휘하에 있는 것으로 소신이 짐작하는 것이죠. 그리고 제 짐작이 틀리지 않다는 것은 대장군께서 이미 저에게 보여주셨고요.”
이런 자세한 설명에 최인범은 약간 놀란 표정으로 응수했다.
“내가 보여 주다니?”
“대장군께서는 소신이 요동출신이고 부여, 고구려, 연, 요, 금, 원나라 등의 만리장성 북쪽 지역 역사에 관심을 가진 것을 잊으신 모양입니다.”
갑자기 전대의 역사를 들먹이자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역사를 안다고 그리 짐작하나?”
“대장군님, 말을 목숨처럼 아끼는 유목민인 여진족들이 별로 힘도 없는 황제 폐하의 교지 한 장으로 저절로 군사를 움직이나요? 대장군께서는 봉황성에 도착하자마자 여진족인 4천명의 기마병을 가진 좌우위를 만드시고 별도로 4천필을 수월하게 봉황성으로 가져오지 않았어요.”
“그게 뭐 잘 못 됐나?”
계속된 정확한 분석에 최인범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순은 다시 차분하게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분석해 설명하고 있었다.
“대장군님, 생각을 해보세요. 여진족들이 집단으로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들의 말을 대장군님께 몽땅 줄 리가 없지요. 그런 정도의 말을 일거에 넘겨줘도 충분히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 받을 군세는 따로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대장군님을 칸으로 부르고 또 말을 4천 필이나 쉽게 넘겨준 것이죠.”
“그런가? 그럼 추측이란 말이군.”
“그렇습니다.”
확신에 찬 대답에 최인범은 다소 구차한 핑계를 대고 말았다.
“자네, 잘 모르는 거야. 말이야 내가 돈 주고 산걸세.”
“알겠습니다. 소신도 앞으로 그렇게 알고 북경의 조정에 그리 보고하죠. 하지만 제가 장담하는 근거는 또 있습니다. 설화라는 분이 이미 대장군의 부인이고 그분이 이미 인구가 20만 명이 넘는 흑풍족이란 대부족을 이끄니 소신이 그저 짐작으로 하는 말은 아니죠.”
“허어! 그러고 보니 자순은 대공주부의 문관보다는 군대의 전략을 담당하는 군사로 움직이는 것이 좋겠어.”
“대장군께서 시켜만 주신다면 평생 옆에서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충성을 장담하지만 그런 믿음이야 아직 두고 봐야 한다. 아무튼 전략가나 모사꾼 기질은 타고난 것 같아 슬며시 물었다.
“북경의 조정에서 이간계를 펼쳐 조선과 나 사이에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앞으로 내가 한양으로 가면 어찌 처신하는 것이 좋다고 보나?”
이런 질문에 자순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소신이 보기에 상대방이 이간계를 쓰면 제일 좋은 대응책은 고육계입니다.”
“고육계라니?”
상대방이 이간계(離間計)를 펼치면 자신의 허벅지를 잘라주는 고육계(股肉計)를 쓰라니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뭐를 누구에게 잘라주라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의문을 가지고 바라보자 자순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대장군, 소신이 고육계를 써야 된다는 것은 알지만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조선 조정의 대처 방법에 따라 변수가 많으니까요.”
“그런가?”
“본시 계책이란 상황에 따라 변해야 됩니다. 그러니 소신이 지금 생각하는 계책이 꼭 유용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건 말씀드릴 수 있어요. 고육책이란 큰 희생을 해야 효과가 좋다는 것입니다. 소소한 것을 자르면 효과가 적으니 그것만 항상 유념하시면 됩니다.”
이런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자 서둘러 말을 빠르게 달렸다.
두두두두.
기마술이 다소 떨어진 자순은 다소 느긋하게 따로 뒤에 처져서 천천히 가고 있었다. 본시 책사 기질이 많기 때문에 조선 백성들의 여론을 들어볼 요량이다.
‘비 좀 맞아도 돼.’
40필이 넘는 말이 빠르게 내달리자 대로 주변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사는 백성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호기심을 표하며 구경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압록강에 여진족이 처내려 왔나?”
“무슨 소리야. 여진족이 왜 쳐내려와. 조선 출신인 부마도위께서 튼튼히 지키고 있는데.”
이미 조선의 백성들도 최인범이 명나라의 부마도위로 봉황성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 아는 것은 아니고 대로 주변에 살거나 또는 정보에 밝은 백성이나 알고 북쪽의 관료들은 대부분 아는 정도다.
이런 백성들의 대화에 대로를 질주해 지나가는 최인범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늙은 선비가 혀를 차며 응수했다.
“조선을 배신한 최가 놈이라 믿을 것은 못된다고. 그리고 저 놈은 본시 조선출신이 아니라 여진족이야. 최씨 성도 모두 거짓이고”
“그래요? 백두산 출신이라고는 들었지만 성도 그렇고 조선출신이 확실해 보이는데요.”
“생각 없이 살고 글도 몰라 무식하면 저렇다니까. 아니! 자네들은 전에 함경도에서 파다하게 퍼진 소문을 아직도 듣지 못했나? 함경도 관찰사께서 주상전하의 명으로 저놈을 찾는다고 백두산 근처를 모조리 뒤져도 저 놈이 주장한 조상의 묘는 고사하고 어려서부터 무술을 연마했다는 장소도 찾지 못했는데.”
“그거야 세월이 흘렀으니 흔적이 사라질 수도 있죠.”
“무슨 소리야? 수많은 병사를 동원해 찾아도 흔적이 전혀 없다고 하던데. 간악한 여진 놈이 위장하고 조선으로 몰래 숨어들어 왔어. 그러니 아주 먼 풍기까지 내려가 힘없는 늙은이로 다리를 절어 살기 어려운 최용민 절제도위의 비위를 맞추어 양자로 들어간 것이고.”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조선은 성리학이 매우 발달했으니 반드시 양반이라면 족보가 있고 조상들의 묘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
선비의 이런 악담을 듣던 자순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슬며시 말을 걸었다.
“노인장, 설사 그렇더라도 명나라에서 과거를 보아 별장원을 하고 높은 벼슬도 했으며 부마도위까지 올랐으니 뛰어난 인물이죠.”
“허! 젊은 사람이 모르면 가만히 있어 그럼 중간이나 가지. 그 별장원이란 것도 과시에서 술을 만취하도록 처먹고 헛소리에 불과한 이야기만 줄줄이 써놓아 별스럽다는 뜻의 별장원을 시켰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군.”
“장원이면 대단하잖아요?”
“장원도 장원 나름이지. 그게 어디 정상적으로 과시를 통과해 하게 된 벼슬인가? 출신부터 불분명하고 과거 시험이나 뭐가 모두 조작되거나 운이 좋아 된 것이지.”
이런 내용은 사실 명나라 관료들도 극히 일부만 아는 내용이다. 물론 사실 그대로는 아니지만 만취해서 과거시험을 본 사실은 명나라 조정에서도 파장이 좋지 않다고 해서 숨겼기 때문에 극히 일부만 안다.
자금성에서 지내던 환관이라 그런 비밀을 잘 아는 자순은 매우 놀랐다.
‘누군가 아주 악의적으로 부마도위를 모함하거나 추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일부분을 변질시켜 소문을 퍼트린 것이 확실하군.’
그래서 자순은 다시 노인에게 슬며시 물었다.
“그런 말은 누구에게 들은 겁니까?”
“북경을 다녀온 절친한 친구인 역관에게 내가 직접 들었소.”
자순은 당당하게 말하는 노인을 바라보며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행색으로 보아 초시 정도는 통과한 분명 양반이다. 그런데 역관인 중인을 친구로 삼는다는 것은 조금 전 행동과 상당히 다른 것이다.
신분을 유달리 따지는 노인이 중인인 역관을 친구로 삼을 수는 없어 보였다. 아무튼 다른 이유가 있어 악담하는 것이 분명했다.
‘흠! 대장군께서 한양으로 가도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겠어.’
자신이 구상하는 미래를 생각하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는 소문이다. 그러니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빠르게 말을 몰아 먼저 간 일행을 따라갔다.
이날 이후 자순은 한양으로 내려가며 수시로 최인범에 관한 소문을 자세하게 들어 보고 여론의 향방을 점검했다. 대부분의 일반 백성들은 최인범을 높이 평가하고 지식층인 양반들의 경우는 반반으로 나뉘고 있었다.
최인범은 한양이 가까워지자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철을웅이 기마병을 이끌고 따로 동쪽 길을 따라 한양으로 가도록 하지.”
“대장군, 따로 가시면 혹시 위험하지 않을까요?”
“설마 명나라 사신이 와 있는 시점에 누가 나를 해하려고 할까? 더구나 암살 사건도 한창 추궁 중에 있는 시점인데. 그러니 한양에 같이 가기보다 우리는 예성강에서 배로 갈 것이니 따로 이동해.”
“알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기마병과 같이 간다면 조선의 조정에 은근히 압박감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좋게 조선을 떠날 생각이라 굳이 위세를 떠는 행동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최인범은 철을웅에게 뭔가 은밀하게 지시를 내렸다. 지시를 받은 철을웅은 놀란 표정으로 눈이 동그래서 물었다.
“대장군, 그래도 되나요?”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손을 써.”
“알겠습니다. 명령을 내리시니 하겠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너무 적정하지 않아도 돼.”
철을웅은 신속하게 40명의 기마병들과 서둘러 동쪽으로 떠났다. 그들은 최인범의 애마인 흑혈풍을 포함해 두 사람의 말도 같이 데려가고 있었다.
최인범이 다른 행선지를 택한 이유는 예성강에서 배를 타고 가면서 혹시 개성상인이나 무역상을 만나면 협상을 벌여볼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철갑웅과 참모로 변한 자순과 같이 예성강 서쪽의 길을 따라 내려가게 되었다. 세 사람이 걸어서 이동하는 동안에도 자순은 수시로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어 최인범을 어찌 평가하는지 알아보았다.
‘백성들의 여론은 비교적 좋은 편이야.’
그는 나름 먼 미래를 생각해 최인범을 조선 백성들이 어찌 평가하는지 계속해서 여론을 수집하는 것이다.
이윽고 예성강 하구에 있는 나루터와 접한 주막에서 머물게 되었다. 평상에 앉아 백숙으로 삶은 닭을 맛있게 먹으며 자순이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조선의 여론이 양반들 사이에는 편이 반반으로 갈라졌네요.”
“무슨 여론? 내가 명나라에서 벼슬하고 부마도위를 한 사실?”
“예. 외람된 말이지만 소신이 만난 양반들 중에 대장군을 육두문자를 쓰며 함부로 욕하는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
이런 보고에 최인범은 빙그레 웃으며 응수했다.
“자네도 참 할 일이 없는 사람이야. 뭘 그런 소문을 일부러 알아보고 그래. 이미 그런 정도야 이미 예상한 것이 아닌가?”
“대장군, 백성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 들으면 노엽지 않으세요?”
“뭐? 틀린 말이 별로 없는데. 지금에 와서 내가 여진족이면 어떻고 조선 출신이며 어떤가? 어차피 나는 앞으로 봉황성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군요. 그래도 조선 사람들의 평판이 좋지 않으면 기분이야 나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