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급한 사정이 생겼다며 최소한의 부하들만 이끌고 떠났습니다.”
“그럼 언제 돌아오시고요?”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평소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1년 이상은 지나야 봉황성으로 돌아오게 생겼습니다. 급하게 돌아오더라도 최소한 올 겨울이나 되어야 돌아오시게 될 것 같아요. 한양에 들려 풍기까지 다녀오려면 그만한 시간은 걸릴 겁니다.”
시녀장은 이런 말을 들자 급하게 안채로 돌아와서 다급하게 보고했다.
“공주마마, 부마께서 이미 조선으로 떠났습니다. 올 겨울은 되어야 돌아오신답니다.”
너무 충격적인 보고에 정향 공주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않아 체면을 버리고 크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으아아앙!”
먼 타국으로 남편을 바라보고 시집을 왔으나 이상하게 꼬여 끝내 홀대를 받자 자신도 모르게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크게 터트렸다.
“흐으윽! 흐윽!”
처음에는 아이처럼 울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흐느끼고 울었다.
먼 타국으로 시집을 와서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은 점도 슬픔으로 다가왔다. 친정 식구들이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겹치자 마냥 서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퍼질러 앉아 크게 울고 나자 그동안 답답한 심정을 모두 토해내서 그런지 속이 시원하게 풀렸다.
“마마, 고정하세요.”
“알았어. 한참 울고 나니 속이 시원하네.”
사실 주난미는 겉으로는 처녀지만 아직은 험한 세상을 살지 않아 조금은 어린 소녀와 같은 점이 많았다. 그리고 시녀장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시녀장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심했다.
이미 혼인한 몸으로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르자 시녀장만 믿고 따를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건 지금 벌어진 사태는 부부간의 일이라 남들이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이런 문제는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돼.’
사람이란 어떤 계기로 급변하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까지 마냥 공주로 대접만 받고 살다가 처음으로 바닥으로 추락하는 경험을 하자 미몽에서 완전히 깨어난 것이다.
그동안 자신은 너무 온실의 화초처럼 살았다. 그러나 이곳은 변화도 많고 먼 타국이라 거칠기도 하니 자신도 생명력이 강한 잡초처럼 살아야 한다.
‘지금처럼 살 수는 없어.’
추락한 자신의 자존심을 살리는 길은 남보란 듯이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는 길 밖에 없었다. 설화가 자신의 주된 경쟁 상대자라고 판단한 정향 공주는 그녀보다 자신이 더 내조를 잘한다는 것을 보일 필요성이 있었다.
본시 영민하다고 소문난 처지로 마음을 추스르고 나자 대처하는 방법은 쉽게 찾았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이렇게 판단한 정향 공주는 자신이 지닌 강점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했다. 내용적으로는 어찌 변했던 자신은 부마도위의 아내인 공주니 직급으로는 제일 위에 있다.
현재까지는 그런 직위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다. 하지만 잘만 활용하면 아주 유용하게 작용할 위치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판단한 정향 공주는 시녀장에게 즉시 명령했다.
“남명에서 데리고 온 가솔 출신인 문관이나 무관을 비롯해 부마의 심복 부하들까지 모두 공주부로 부르세요. 그리고 잔치 상을 차리고요.”
“예이.”
“그동안 대공주부로 입주하고도 잔치를 열지 못해서 그동안 고생한 관리들을 위무하기 위한 모임이니 빠지지 말도록 연락해요.”
“예.”
이윽고 많은 부하들이 공주부로 모여들자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술을 대접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몇 차례 술을 권하고 나서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변하자 먼저 장전중에게 슬며시 물었다.
“장 소령은 부대를 운영하는데 애로사항이 뭔가 있나요?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면 해결해 볼 것이니 기탄없이 말해 보세요.”
이런 물음에 장전중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마마, 소신이 봉황성의 수비를 담당하는 대대장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화포와 병력 증강입니다. 이미 부마께 말씀을 드렸지만 도독부의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하시며 방어부대를 2천명으로 정해 버려 봉황성 수비 병력으로는 충분치 않사옵니다.”
“부마께서는 이곳이 안전하고 외부에 기마병이 포진해 있으니 그렇게 판단한 것이 아닐까요?”
“마마, 그런 점은 있지만 지금 군사력으로는 만약 조선에서 공격해오던 아니면 서 건주의 소규모 부족이 기습적으로 쳐들어오면 감당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너무 군세가 약해 보이면 외부의 적이 공격할 기회를 노리는 경우가 많으니 군사력은 전쟁이 터지는 것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항상 여유가 있을 정도로 보유해야 합니다.”
“알았소.”
본시 도독부는 몇 개의 성에 대한 군사적인 통제권이 있어 3만 명 정도의 군사를 보유해도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봉황성은 봉토지로 조선과 국경을 접해서 수비 병력이 많아도 상관없다. 또한 여진과 접한 변방이라 총감의 직책으로 2개의 위를 둘 수 있다.
정향 대공주는 화포가 있어야 된다는 건의에 답을 해주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북경으로 연락해 여기까지 화포를 가져올 수는 없으니 자체적으로 화포를 제조해 보면 어떻습니까? 자금은 제가 충당해 드리죠.”
“마마, 화포제조 기술자가 있나요?”
그러자 홍성철이 나서서 보고했다.
“화포기술자는 이미 보유한 상태입니다. 자금이 문제라 제작을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럼, 그 화포 기술자들을 모아서 화포를 생산하도록 하세요. 혹시 문제가 될지 모르니 농기구를 생산하는 주물공장도 같이 운영하며 생산하세요.”
“알겠습니다.”
정향 공주는 사실 최인범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금괴를 남경에서 가지고 시집을 왔다. 그 이유는 헌강왕의 정치적인 야심 때문이지만 아무튼 많은 화포를 제작하거나 구입할 충분한 재력이 있었다.
“우선 봉황성에 보유된 화포로 포병을 양성하도록 하세요. 대공주부 수비 병력으로 500명은 둘 수 있으니 우선 그런 정도로 병력을 늘려 보세요. 모두 나중에 화포 1문씩을 담당하는 초급군관으로 근무할 정도로 훈련시키면 부마께서 돌아오시면 쉽게 포병부대를 확대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세요.”
남편을 돕겠다고 하며 함부로 월권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단 대공주인 자신의 권한으로 늘릴 수 있는 500명의 병사를 모두 포병의 초급군관으로 양성하기로 결정했다.
미몽에서 깨어나니 권력이란 바로 군사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직감했다. 더구나 조선, 여진, 북경의 조정, 산동의 반군 틈에 끼인 상태인 봉황성은 지리적으로 위험한 곳이지만 또한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다.
‘우리의 군사력이 강하면 주변에서 알아서 재물을 바친다고.’
본시 남경에서 큰 권력을 지닌 왕부에서 자랐으니 권력의 속성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향 대공주는 자신의 권한 내에서 최대한 군사력을 키워 보기로 작심했다.
‘설화보다는 내가 더 많은 군사를 양성할 정도로 보필해야 돼.’
경쟁심도 있어 다시 추가해서 지시했다.
“장 소령, 부마께서는 장 소령 부하들의 무술 실력이 너무 부족하다고 판단해 벼슬을 주지 않는 것 같으니 2천명 병사들 중에 초급군관으로 양성할 500명을 따로 차출해서 다른 업무는 시키지 말고 집중적으로 군사훈련을 시키도록 해요.”
“마마, 잘 알겠습니다.”
“내가 가만히 지켜보니 철병웅이 군사들을 조련하는 실력이 뛰어나 보이니 훈련을 책임지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이어서 홍성철이 소금 생산 사업에 대해 보고를 하자 물었다.
“소금을 생산하면 운반은 배로 날라야 되지 않나요?”
“마마, 소금은 너무 무거워 가능하면 배로 운반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해군 양성을 겸해 배도 건조해야 되겠네요.”
“그야 당연하죠.”
정향 대공주는 천일염 생산에 대해서는 처음 들으니 꼭 성공한다는 보장을 못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니 농축된 염수를 불을 지펴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 많은 나무가 필요했다.
“내가 보기에 주변이나 압록강 하류에는 큰 나무가 별로 없어 보이니 압록강 상류에서 벌목해 나무를 운반해 오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여진족에게 나무를 베서 봉황성 관할인 단동으로 가져와 팔도록 해요.”
이런 지시는 다분히 설화를 경제적으로 압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어서 추가로 건조된 배들을 운항할 선원을 양성하기 위한 지시도 내렸다.
“선원도 있어야 하니 모집하고 기왕이면 비싼 소금을 운반해야 하니 군사훈련을 받은 선원으로 양성하기로 하고 우선 500명을 선발해서 훈련시키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천일염 생산이 실패하면 소금을 생산하는 조선에서 들여와야 하니 선원도 많이 필요하고 배도 많이 필요하니 서두르시오. 만약 천일염 생산을 성공하면 천진으로 운반해 판매하면 되니 대형 선박의 건조도 서둘러야 되고 선원들은 빨리 양성해야 합니다.”
이런 지시는 황제가 내린 교지에 발해만을 통제하는 해군 양성이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리 나중에 해군으로 변할 선원들을 양성해볼 생각이다. 남경에서 떠나기 전에 부친인 헌강왕이 요동으로 가면 해군을 양성해 두는 것이 좋다고 귀띔을 했었다.
‘육로로 통하면 반드시 북경의 화북 지역을 거쳐야 하지만 배로 가면 황해를 가로질러서 남경과 쉽게 교류가 가능해.’
전에야 그저 아버님이 공연히 정치적인 야심이 많다고 느꼈다. 하지만 처지가 변하자 정향공주는 점차 정치적인 시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며 판단하고 있었다.
‘조선과 명나라와 육로 교류는 통제가 가능하고 바다도 완전히 장악하면 우리는 중계무역을 하던 통행세만 받아도 큰 부를 이룰 수 있어.’
이는 부마의 의중과 같을 것으로 판단했다. 부마가 굳이 대운하를 거쳐 보타도 까지 이동한 것은 대형선박을 이용한 해외무역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판단했다.
정향 대공주는 남편도 자신과 같은 생각일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 과감하게 지참금이자 아비의 정치적 공작금인 금괴 보따리를 풀어 지원해주게 되었다.
결국 이렇게 되어 봉황성에는 1000명의 병사가 추가로 양성되었다. 실질적으로 군사학교에는 각기 500명씩인 포병, 해군, 보병으로 1500명의 초급 군관을 양성하는 훈련이 시작되었다.
군사력을 중강하자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많은 사업에 거액이 투자되자 봉황성이나 단동 그리고 벌목장은 경기가 살아났다. 그리고 주변의 명나라 출신 부자들이나 또는 여진의 작은 소부족들이 빠르게 봉황성으로 찾아와서 대공주를 만나 선물을 바치고 있었다.
“공주마마, 소인은 안산의 콩 상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염려 마시오. 나중에 콩이 필요하면 그대 물건을 사겠소.”
봉황성은 새로운 바람이 불어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정향 대공주는 내조에 힘을 씀으로 무너져버린 자존심을 차츰 회복하고 있었다.
한편 의주를 거쳐 남쪽으로 이동하는 최인범은 빠르게 말을 달려 평양에 도착했다. 미녀인 기녀들이 많다는 평양에 도착하자 평양 부윤이 대동강 나루의 주막에서 머무는 최인범을 일부러 찾아왔다.
평양 부윤은 종2품인 고관으로 막강한 위치지만 상국인 명나라 부마도위인 최인범을 홀대할 수 없다고 판단해 찾아온 것이다.
“부마님, 객관으로 자리를 옮기시죠.”
“대감, 저는 사정의 벼슬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너무 부담스럽게 이러지 마세요. 아무튼 성의는 너무 황공하나 조용히 고향으로 갈 생각이니 이러지 마세요.”
“저도 바둑을 두니 수담을 나누고 옆에 기생을 불러 창을 부르게 하는 방법으로 두어보는 것은 어떤 가요?”
“아닙니다. 오랜 만에 귀국해서 기생과 어울리면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