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이런 외침에 마을 사람들은 급하게 땅에 엎드려 절하며 크게 외쳤다.
“칸!”
“칸!”
건주여진의 경우 최인범을 칸으로 부르며 칭송하는 분위기다.
이미 아패록이 죽으면 최인범이 그에 아들인 아진태의 후견인으로 내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강한 흑풍대를 이끄는 설화의 남편이라 환영하는 것이다.
여진족들과 같이 사는 소년 소녀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어서 설화도 너무 반가워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그녀의 아비인 아패록도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와 반겼다.
“칸! 어서 오시오.”
“족장님, 이렇게 다시 만나니 반갑군요.”
족장인 아패록과 만나자 서로 가볍게 군례로 고개만 숙여 인사를 나누었다.
최인범은 설화의 안내로 아패록이 머무는 저택으로 들어갔다. 여진족은 유목민으로 주로 파오에서 살지만 오랜 동안 통화에서 정착했기 때문에 커다란 저택에서 지내고 있었다.
와글와글.
저택으로 들어가자 돼지도 잡고 양이나 염소도 잡는 축제가 벌어졌다. 전통 복장으로 여자들이 나와 춤도 추고 술과 음식을 먹는 축제가 벌어지는 동안.
최인범은 아패록 족장의 부하들이나 부인들 그리고 아들과 딸들의 인사를 받았다. 이미 설화와 혼인한 사이다 보니 이제 한 가족이라 상견례를 하게 된 것이다.
“칸, 이놈이 내 후계자인 아진태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그렇군요.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아진태의 어미인 진유향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유심히 최인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늙은 남편이 죽으면 아들의 후견인인 최인범에게 몸을 바치도록 내정되어 있었다.
형사취수제로 최인범은 이미 아패록의 아우로 족보에 올라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설화의 경우 삼촌과 혼인하게 된 것이다.
유목민들은 친 혈족의 경우도 이런 식의 족내혼이 많다. 더구나 최인범의 경우 입적하는 형식이라 별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유달리 음심이 강한 진유향은 족장이 살아 있는 지금도 노골적으로 미래의 남편이 될 최인범에게 추파를 던졌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잘 모르는 최인범은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저러다가 남편에게 목이 잘리지 않나 몰라.’
너무 노골적인 추파를 던지자 잠시 이런 생각을 해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패록은 그런 진유향을 보며 오히려 대견하다는 듯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진유향의 오빠인 진명하는 옆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은근한 목소리로 권했다.
“칸! 밤에 적적하지 않으세요.”
“설화가 있는데 적적하긴요.”
“본시 사내란 항상 새로운 여자를 품는 것이 좋지 않나요?”
이런 소리를 노골적으로 토하며 턱짓으로 진유향을 슬쩍 지목했다. 좋다고 고개만 끄덕이면 진유향은 언제든지 잠자리를 할 태세가 분명했다.
이런 수작을 옆에서 모조리 지켜보는 설화도 별로 개념 치 않는 것 같았다.
족장인 아패록은 이미 몸이 너무 쇠약해 술을 마시지도 못하고 오래 앉아 있기가 버거워보였다. 그래서 아패록은 상견례가 끝나자 부하들의 부측을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에 비해 흐릿해진 눈가에 검은 기운이 진하게 보이니 얼마 살지 못하게 생겼다.
최인범은 옆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설화에게 넌지시 물었다.
“족장의 건강이 아주 나쁜 것 같은데 어찌된 일이지?”
“칸! 족장께서는 동여진과 전투에 출전했다가 화살을 가슴에 맞고 말에서 떨어져 저렇습니다.”
“동여진과 분쟁이 심했던 모양이군.”
“예, 우리는 칸을 중심으로 뭉치자고 주장하고 동여진은 조선을 상국으로 모신다고 합치는 것은 반대해 심하게 다투었어요. 그래서 여러 번 전투가 벌어졌고요.”
“그런 사건들이 있었군.”
더 깊은 내막이야 천천히 들어도 되지만 감자를 개마고원으로 가져가 심지 않은 문제가 너무 궁금해 물었다.
“왜 고아들이 여기서 지내고 감자도 여기다 모두 심었지?”
“칸! 조선에서 국경지역에 군사를 배치하고 개마고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완전히 막았습니다. 조선에서 우리를 대하는 것이 전과 전혀 달라졌어요. 어쩔 수 없이 고아들을 이곳에 우선 정착시키고 감자도 파종 시기 때문에 이곳에 심게 된 겁니다.”
“뭐? 국경이 봉쇄됐어?”
“네! 제가 명나라에서 돌아와 보니 갑자기 그렇게 변했더군요.”
조선에서 여진족을 대하는 것이 달라져 국경지역을 완전히 봉쇄했다니 뭔가 일이 크게 어긋나고 있었다. 힘들게 개마고원에 대형 목장과 정착촌을 조성하려던 계획은 차질이 생긴 것이다.
설화는 개마고원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소상하게 말해주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개마고원으로 여진족들이 대규모로 넘어와 정착하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호의를 보이다가 올해 초에는 급변했다.
갑자기 남쪽에서 대규모로 개마고원으로 이주민을 받더니 그곳에 터를 잡고 살려던 여진족을 다시 압록강 북쪽으로 추방해 버렸다.
“그래서 그곳에서 정착하고 있던 사람들은 어찌 되었나?”
“칸과 같이 살기를 원한다는 조선 사람들도 여진족과 같이 모두 통화로 이주해 버렸어요. 그래서 개마고원은 전에 칸께서 아시던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았어요.”
“거기서 키우던 가축은?”
“그야 모조리 끌고 통화와 이도백하로 넘어왔죠.”
결국 조선의 대외정책 변화로 자신이 애써 조성한 개마고원 개발계획은 완전히 백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갑자기 이런 변수가 생긴 이유는 자신과 연결되어 조선 조정의 분위기가 달라져서 그런 것 때문이다.
‘어쩌면 나와 연결된 사실을 너무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는 바람에 잘 모르고 그런 조치를 내릴 수도 있어.’
미련이 남아 애써 이렇게 달리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이미 개마고원에서 모조리 철수한 상태다. 그간의 노력이 허사가 되어 버렸다.
그러자 조선 조정에 대해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썩을 놈들, 뭐가 이 따위야. 그동안 헛고생만 죽게 했어.’
자신이 고심해서 벌인 개마고원의 사업을 엉망으로 만들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은근히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이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이미 봉황성을 봉토로 받은 처지다. 얼마든지 감자를 심거나 또는 인삼을 재배하고 대형 목장을 만들 장소야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가정제만 등신인줄 알았더니 조선도 등신들이 정치를 하는군.’
결국 조선으로 감자 보급은 한참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구마는 남쪽에 심어야 되니 급히 물었다.
“고구마는 어찌 됐지?”
“고구마 씨는 모조리 개마고원으로 찾아온 월녀 아씨께서 직접가지고 풍기로 돌아갔어요. 아마 지금쯤 심을 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편에 재배방법이 적힌 서책과 함께 감자 옥수수 씨와 고추씨를 조금 보냈고요.”
“잘했어.”
“목화씨도 나누어서 재배해 보기로 했어요.”
“수고가 많았군.”
월녀가 직접 가지고 풍기로 내려갔다면 감자, 고구마, 옥수수, 목화, 고추 재배는 문제없이 해낼 것으로 판단되었다. 자신의 의도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감자를 풍기로 보냈다니 본래 계획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설화는 왜 이도백하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어?”
“이제 하지(夏至)라 감자를 수확하잖아요. 그래서 가을 감자를 심어보려고 종자를 가져가려고요. 감자의 씨알이 굵고 좋아 이도백하로 가져가서 가을 감자를 심을 생각이죠.”
감자는 봄에 심지만 또한 여름에 심어 가을에 수확하니 북부지역인 이곳에서도 충분히 2모작이 가능했다.
이도백하 지역의 훅풍대는 설화가 칸의 부인이란 자격으로 부족을 이끌고 있었다. 그래서 최인범의 휘하 중에 흑풍대가 제일 강력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본시 무술이 뛰어난 설화라 강력한 흑풍대를 직접 지휘해 자신의 아비인 족장보다 더 강한 힘으로 흑풍부족을 다스리고 있었다.
명나라에서 인수한 아랍계 말은 개마고원으로 보내려던 양을 포함해 모두 이도백하로 보냈다는 것도 알았다.
금일여 등 10명이 모두 휘하에 1천명씩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후돈과 장익덕도 1천명씩의 기마병을 보유한 상태에서 근처인 백산에 주둔중이라는 것도 알았다.
이도백하의 은광이나 금광 그리고 철광도 생산이 활발해 흑풍부족의 규모는 남녀노소를 포함해 이미 20만명이 넘어서고 있다고 했다.
“설화, 기마병 8천명만 데리고 있으면 동여진과 상대하기 어렵지 않나?”
“동여진이야 5천명 기마대만 있으면 상대하기가 충분하죠. 비록 족장께서 전투 중에 크게 부상을 당했지만 동여진은 이제 힘을 전혀 쓰지 못하게 됐어요. 그들이 보유한 말들이나 가축 중에 반 이상을 우리 흑풍대에서 탈취해 왔으니까요. 그래서 동여진들도 이제 조선보다는 우리 흑풍족으로 합치려고 소부족 회의가 자주 열리는 중이죠.”
설화의 말을 들어보니 이제 동여진까지 흑풍대의 힘이 미치게 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건주 여진은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자신도 바쁘게 살았지만 설화도 그동안 많은 노력을 했다.
“알았어.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 흑풍대에서 2천명의 기마병을 백산으로 보내. 백산에 주둔해 있는 하후돈과 장익덕은 환인으로 보내서 건주위 총감부의 좌우위를 담당하게 할 것이니까.”
“알았어요. 바로 연락병으로 보내 기마병들을 데리고 이동하도록 조치하죠.”
이곳으로 지내는 고아들을 봉황성으로 보내기로 했다. 어차피 친위대로 양성할 요량이라 소년 소녀들을 모조리 봉황성에 정착해 살게 할 생각이다.
“고아들은 모두 봉황성으로 보내.”
“알았어요. 그렇게 준비시키죠. 하지만 10명씩은 제가 옆에서 데리고 있어야 해요. 그 대신 여진족의 고아들로 채워서 보내기로 하죠.”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
세상의 일이란 권력과 결부되면 아내라도 온전하게 믿기 곤란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최인범은 소녀들은 봉황성에 있는 대공주부의 시녀들로 정착시키고 소년들은 친위대로 양성할 요량이다.
설화 역시 마찬가지라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먼 이국에서 이주한 소년 소녀를 최측근인 호위병이나 시녀로 양성할 요량이라 각기 10명씩을 옆에 둔다는 것이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두 사람은 침소에 들어가 잠을 자게 되었다. 부부간의 잠자리에 맛이 들어버린 설화는 적극적인 기마자세로 정사를 벌였다.
“칸! 그저 편안하게 누어 계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알았소.”
조금시간이 지나자 방안에서는 아주 진득한 소음이 크게 들렸다. 설화는 감창소리를 유난히 크게 토해냈다.
“하악! 하악! 칸! 너무 좋아요.”
설화는 어쩌면 밖에서 엿듣고 있을지 모르는 진유향을 의식해서 유난스럽게 구는지도 모른다.
태연한 척 했지만 진유향의 추파를 목격했으니 질투심이 생겨 더욱 열을 냈다.
아비의 부족을 마찰 없이 자신이 흡수하려면 진유향을 최인범이 취해야 순조로우니 어쩔 수 없었다. 설사 그렇더라도 음흉한 진유향의 노골적인 추파에 은근히 열 받았다.
‘그년은 족장님이 죽기도 전에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다니. 족장님이 죽고 나서 칸께서 품에 거두게 되면 진짜로 볼만할 거야.’
더구나 남편이 명나라 공주와 혼인해버렸으니 그런 사실 또한 열이 안날 수 없었다. 설화는 나름 자신이 첫 번째 부인이고 제일 무력이 강한 부족을 이끌고 있기 때문에 정향 대공주보다 우위라는 자부심이 팽배했다.
‘여기는 내 구역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