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자신의 속마음을 전혀 모르고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해서 결국 후실을 보았다.
속도 상하고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더구나 왕미령까지 이미 후실로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더욱 마음이 차가와졌다.
‘부마께서 나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 아무리 정략적인 이유로 혼인했다고 판단해도 이렇게 나를 홀대할 수는 없는 거야.’
여자로 다른 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겨 버렸으니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공주는 독하게 마음을 먹어 보려고 해도 자꾸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부마가 아무리 자신을 홀대 하더라도 본시 애모하는 마음으로 혼인한 처지라 첫날밤을 고대하던 터였다. 그러나 공교롭게 달거리하는 시기에 남편이 자길 만나려고 하자 시녀장을 시켜 면대를 냉정하게 거절한 것이다.
평소에는 조신하고 단아한 성품이지만 달거리를 할 때는 신경에 상당히 예민해지는 체질이다.
‘정말 속상해 죽겠네. 하필 그때 달거리를 해서 만나지도 못하고.’
달거리 하는 것은 상당히 불결하게 생각도 하지만 그때는 유독 예민해져 있었다. 사소한 일에도 신경질을 부리거나 또는 돌출하는 행동을 보이는 성격이라 좋은 모습을 남편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피했다.
‘내가 실수를 했어.’
마침 봉황성에 도착했을 시기가 가임하기 최적기라 첫날밤을 치르려고 했었다. 그러나 부마께서 냉혹하게 거절하고 멀리 떠났으니 이 노릇을 어찌해야 할지 정말 난감했다.
“시녀장, 부마께서 전에 면대를 거절한 일로 상당히 오해하신 것 같은데 어쩌지?”
“오해라뇨? 부마께서는 대공주님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해서 공연히 허세로 저러시는 겁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 진짜 화가 났으면 어쩌지?”
“대공주님, 그런 염려는 안 해도 됩니다. 감히 대공주님을 홀대하지는 못합니다.”
본시 가제는 게 편이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정향 대공주가 천하제일의 미녀이고 제일 고귀한 신분이라고 믿고 있는 시녀장은 여전히 느긋하기만 했다.
본시 미모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가치평가 기준이 다르다. 시녀장은 어려서부터 자신이 키우고 애지중지하게 돌보던 정향 대공주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감히 작은 나라 출신들이? 어디서 함부로.’
소피아는 어디서 굴러온 지도 정확하게 모르는 이민족이다. 왕미령은 한때 부친이 죄인으로 돼서 기녀로 살 처지에 놓였던 천한 신분이다. 그러니 황족으로 헌강왕의 여식인 주난미와는 천지 차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감히 우리 대공주님과 견주려고 하다니 어림도 없지.’
상전보다 밑에 있는 종이 더 권세를 부린다는 말이 있었다. 시녀장은 분수를 모르고 여전히 작은 나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최인범을 대단한 인물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주난미의 경우 전혀 달랐다. 왕미령이나 소피아는 자신과 비해 전혀 뒤지지 않은 미녀에 능력이 뛰어난 여자들이다.
이미 떠나버린 부마를 다시 오라고 할 처지가 아니라 스스로 정착할 준비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향 공주는 시녀장에게 슬며시 물었다.
“자순이란 환관은 여기에 있나?”
“예,”
“그렇다면 그를 불러서 우선 저택에 현판도 걸게 하고 정착해서 살 준비부터 해야 되겠어.”
“알겠습니다.”
남명의 거대한 저택인 궁궐에서 지내던 공주의 신분이라 이곳의 최고 큰 건물인 관청을 자신의 개인 살림집인 대공주부로 정했다.
“시녀장, 어느 정도로 커야 되지?”
“그야 최소한 조선의 궁궐 정도는 되어야 하죠.”
봉토지로 봉황성을 하사 받았으니 영지인 봉황성 내의 주민들이 내는 세금이나 관공서나 국유재산은 모두 부마도위의 개인소유다.
발해요동도독으로 정해졌다. 발해만이나 요동지역에서 거두는 세금으로 관청이나 공금으로 사용하고 군사도 양성하고 관청을 새로 지어도 된다.
대공주부의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는 자순이 찾아오자 그에게 명령했다.
“태감, 관청이나 주변의 건물을 모두 대공주부 택지로 포함시키기로 해요.”
“명을 따르겠나이다.”
개인들이 소유한 집들이지만 이곳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영주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사 비용이자 집값으로 조금의 은자는 건네지게 되었다.
“이 돈으로 이사를 하시오.”
“보상금이 너무 적습니다.”
집주인들은 불만이야 많지만 어쩔 수 없이 비워주는 수밖에 없었다. 큰 저택을 소유하던 사람들은 모두 명나라 사람들이라 그들은 집이 강제로 압수당하는 형식으로 빼앗기게 되자 미련 없이 모두 본토로 이주했다.
그래도 조금 미안한 점도 있고 민심이 사나워질 염려가 있었다. 이주하는 그들에게 남경으로 가면 헌강왕이 돕도록 하는 서찰은 한 장씩 써주었다.
자순은 불만을 가지고 떠나는 그들에게 다독였다.
“이 서찰을 가지고 가면 분명히 헌강왕께서 수용된 건물과 거의 비슷한 건물을 다소 싼 가격에 판매해 줄거니 한번 찾아가 보시오.”
“알겠습니다.”
헌강왕은 부친인 기혜왕 때부터 많은 재력을 지니고 남경을 중심으로 한 여러 대도시에서 부동산 투자로 큰 부를 이루고 있었다.
부침이 심한 관리들이 역적으로 몰리거나 권력에서 물러나 몰락하면 그들이 소유하던 저택이나 토지를 아주 싸게 구입해 두었다가 비싸게 되파는 방식으로 엄청난 부를 이루었다.
조부인 기혜왕 때부터 황족이라고 해서 조정에서 주는 녹봉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남경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부동산 투기나 각종 사업을 벌여 큰 부를 이루었다. 그 때문에 헌강왕은 황제가 부럽지 않은 정도로 생활하고 있었다.
봉황성의 관청인 청사는 결국 다른 건물로 이전했다. 봉황성에서 최고 권력자로 행세하던 부윤은 초라한 신세로 전락했다. 부윤은 가복을 보며 투덜거렸다.
“황제폐하께서 졸지에 봉황성을 대공주부의 봉토지로 하사해 버렸으니 앞으로 은자도 안 생기는 귀찮은 잡일인 행정업무만 죽어라 하게 생겼어.”
“빨리 북경으로 사람을 보내 손을 써보는 것이 좋겠어요.”
“지금으로는 그게 제일 좋겠어.”
상황이 이렇게 변하자 본시 명나라 본토 출신인 관료들은 서둘러 요동에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래도 벼슬을 그냥 버릴 수는 없으니 북경의 고관들에게 뇌물을 허겁지겁 보냈다.
관청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자 커다란 대공주부(大公主府)라는 현판이 걸렸다. 안주인인 정향 대공주는 대저택으로 변한 집으로 입주하게 되었다.
시녀장은 그런대로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정향 대공주에게 말했다.
“이제야 공주부 같은 모습이군요.”
“건물만 있고 가구도 별로고 아직 부족한 것이 너무 많잖아.”
“조선에서 좋은 가구들을 들여오면 됩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조선 출신인 부마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선에서 가구를 들여와야 쉽게 받아들일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조선식으로 가구들도 들여오고 일부 건물은 개조해볼 생각이다.
정향 대공주가 이렇게 정착하기 위해 힘을 쓰는 동안.
두두두두
기마병들과 같이 이동한 최인범은 빠르게 이동해 환인(桓仁)에 도착했다. 근처에 고구려 졸본성인 오녀산성이 있는 곳으로 한민족에게는 의미가 깊은 곳이다.
최인범은 도착하자 기병 500명을 주둔하게 조치하고 같이 온 홍성철에게 지시했다.
“여기에 건주위 총감부 소속인 위를 설치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적당한 저택을 수용하도록 해.”
“넷!”
“기마병들이 머물러야 되니 목장도 알아보고. 광산 기술자들이 오면 철광맥도 찾아보게 해.”
“잘 알겠습니다.”
최인범이 이곳에 총감부 소속인 위를 설치하려는 이유는 고구려의 최초 수도였다는 역사적 의미도 있지만 이곳은 철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곳만 확실하게 장악하면 압록강 변에 있는 고구려의 수도이던 집안은 자연히 수중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곳을 완전히 복속시키면 중요한 지역은 일단 차지하게 돼.’
환인을 차지하면 또한 조선과 교통로도 확보하고 나아가서는 요동 총병이 주둔하고 있는 심양위로 가는 길목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발해요동도독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명나라 영향력이 약한 동남쪽인 지역만 자신의 관할이다. 요동 총병이 있는 심양위는 도독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군사력이 약한 최인범이라 현재는 간섭하기 곤란한 지역이다.
‘군사력만 키우면 도독이란 명분이 있으니 심양위도 수하로 끌어들일 수 있어.’
가까운 통화에는 설화의 아비인 아패록 족장이 있다. 그를 감시하거나 또는 협조해 주기 위해 이곳에 위를 설치하기로 정했다.
하나의 위의 규모는 정상이라면 5000명의 군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총감이란 감찰하는 업무가 주된 임무라 병력이 많지 않아도 된다.
이런 내용이야 본시 명나라 조정의 의도다. 하지만 최인범은 그런 점을 이용해 정식으로 5000명의 병사가 주둔하는 위로 설치할 요량이다.
“앞으로 환인은 5000명이 주둔하는 정식 위로 변하게 되니 그만한 군사들이 주둔할 터전을 잘 살펴서 정해 두도록 해.”
“잘 알겠습니다.”
“일단 위의 설치 장소가 정해지면 기마병들은 놔두고 혼자서 봉황성으로 돌아가면 돼. 기마병은 내가 지휘관을 따로 정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넷!”
최인범은 서둘러 서건주의 족장인 가패록이 정착해 살고 있는 통화로 향하게 되었다.
옆에 다소 큰 개울이 있고 밭농사 짓기에 아주 좋은 옥토가 끝없이 펼쳐진 곳이다. 이 지역은 농사를 짓기에 아주 좋은 여건을 지니고 있었다.
통화에 도착한 최인범은 이곳의 넓은 밭을 보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어라! 왜 저게 여기에 심어져 있지?’
대형 목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넓은 옥토에 하얀 감자 꽃이 만발해 있었다. 그 옆에는 고추들이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또한 그 옆에는 아직은 작지만 곧게 뻗은 옥수수 줄기가 보였다.
설화를 통해 개마고원으로 보내 심으라고 했던 감자 씨를 몽땅 이곳에 심은 것이 확실했다. 재배 면적의 크기로 보아 확실했다.
‘감자를 여기에 심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야? 설화가 내 명령을 거역할 이유가 없는데.’
개마고원에서 중대한 변수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쇄자갑을 입은 많은 기마병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여진족들은 다들 집에서 나와 서성이며 호기심어린 표정을 지으며 구경했다. 두려운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고 누군지 확인하려고 얼굴을 살피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모습에 최인범은 속으로 생각했다.
‘앞으로 부대 깃발을 만들어 사용해야 되겠어.’
기마병을 살피던 마을사람들 중에 파란 눈의 소년들이 최인범을 알아보고 크게 외쳤다.
“칸이 오셨다!”
“와! 칸이 오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