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무너지는 자존심>
자금성에서 태감으로 근무하던 자순이 이렇게 답하자 최인범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이제 21살이라 만으로 20살이 조금 지났다. 설사 그렇더라도 최인범의 기준으로는 대공주가 너무 어린 것은 사실이다.
다른 부인도 있으니 여체를 탐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도 문제야 생길 수 없다. 하지만 정작 알고 싶은 것은 대장군으로 불리는 정확한 이유다. 그래서 슬며시 지시했다.
“자순이 가서 교지를 가져오지. 한번 다시 읽어 봐야겠어.”
“알겠습니다.”
아직도 교지도 보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이렇게 요구했다. 그러나 자순은 정향 공주의 나이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니 교지를 읽지 않은 것을 눈치 챘다.
‘너무 특이한 분이야. 황제 폐하의 교지도 아직까지 읽지 않다니.’
이런 현상으로 보아 최인범은 부마도위나 건주위 총감이던 봉황성의 성주인 영주라는 벼슬도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전에 자금성에서 만났을 떼에도 느낀 점이다. 하지만 최인범은 황제는 물론 조선의 국왕에게도 충성하는 언사를 토하는 법이 한 번도 없었다.
‘타고나길 본시 제왕의 기운을 지니고 있는 분이야.’
살던 시대가 전혀 달라 사고방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런 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니 달리 해석할 수 없었다. 자순은 급하게 대공주의 처소로 가서 황제가 하사한 교지와 신분을 나타내는 인장들을 가지고 돌아 왔다.
고급스러운 칠보상자에 들어 있는 하사품들은 많았다. 관복도 몇 벌 있고 황금색인 쇄자갑, 장검이나 여러 개의 인장도 있었다. 별도로 여러 명의 관리들 명단이 적혀 있는 교서도 있었다.
교지부터 들고 읽어보니 아주 복잡하고 긴 직책이 적혀 있었다.
조선구려진봉황군공 대부마도위 최인범(朝鮮句麗震鳳凰君公 大駙馬都尉 崔仁汎), 건주위 총감부 총감 도어사(建州衛 摠監府 摠監 都御司). 봉황성주 겸 발해요동도독 안찰사 겸 도지휘사 겸 산동 왜 토벌평안 대장군(鳳凰城主 兼 渤海遼東都督 按察使 兼 都指揮使 兼 山東 倭 討伐平安 大將軍)뒤에는 이런 중요한 직책을 주니 요동지역을 편안하게 잘 다스려 백성들을 잘 살게 하고 국경을 안정시키라는 통상적인 내용이 적혀있었다.
첫머리에 적힌 내용이나 건주위 총감이라는 도어사 직책은 쉽게 이해되었다.
그러나 뒤에 써진 봉황성주 겸 발해요동도독 안찰사 겸 도지휘사 겸 산동 왜 토벌평안 대장군이란 길고 긴 직책은 처음 보게 되자 물었다.
“대장군 앞에 써진 내용은 정확하게 무슨 뜻인가?”
“대장군, 그것은 봉황성주이자 요동도독으로 발해만의 모든 섬들과 요동 지역을 관장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동해안에 출몰하는 왜인들을 토벌해 평안하게 하라는 것이죠. 해군도 양성해도 좋다는 뜻이 포함된 것입니다.”
“해군이라니?”
“그야 반군들이 점령한 산동 반도를 의식해서 만든 직책이옵니다.”
이런 설명을 듣자 명나라 조정에서 자신에게 뭐를 시키려고 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명나라 조정의 힘으로는 산동 반도에 있는 반란군이나 동해안에 자주 출몰하는 왜인들을 분쇄하기가 힘드니 자신에게 거창한 직책만 주고 부려먹을 심산이다.
‘명나라 조정 대신들이 치졸한 계책에 지나지 않는 술수를 나름 묘책이라고 쓰고 있군.’
결국 조금 확대해서 해석하면 자신을 이용해 조선 조정을 움직여 해군을 동원해서 산동 반도의 반군이나 왜구의 소굴인 왜국을 분쇄하라는 뜻도 묘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등신 같은 황제가 꿈만 야무져서 거창하게 산동 반도의 반군은 물론 왜구들의 소굴인 왜의 본토까지 토벌하라니 기도 안 차는군.’
지저분하게 여러 가지 직책을 부여하고 보니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조선까지 어느 정도 관장할 수 있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이런 미묘한 문구를 조선 조정에서 알게 되면 기겁할 것은 너무도 자명했다.
‘조선과 나를 이간시키려는 숨은 목적도 있어.’
조선구려진봉황군공도 단순하게 해석하면 봉토지로 준 봉황성 지역에 대한 훈작에 해당된다. 하지만 굳이 조선을 집어넣어 묘한 해석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쉽게 해석하면 조선 출신을 의미하지만 달리 해석하면 전혀 다를 수 있었다.
명나라는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 못하는 지역을 관장하라는 실로 허울만 거창한 직책을 준 것이다.
“허접한 병사 2천명을 주고 그런 복잡한 업무를 수행하라는 건가?”
“아닙니다. 이번에 같이 가는 철갑 기마병도 있으니 최소한 3000명은 됩니다.”
최인범은 실제로 군사를 지닌 지휘관이라 대장군으로 칭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사품이 뭐가 들었나? 살피던 최인범은 안에 의외로 보석이 박힌 반월도 3자루를 보자 그제야 기뿐 표정을 지었다.
‘오라, 반월도의 일부가 명나라 황실로 들어갔었군.’
모두 12자루인 반월도 중에서 이제 행방을 정확하게 아는 반월도 수는 9자루다.
몽골초원에서 타타르 부족에게서 획득한 2자루, 서건주 족장인 아패륵에게 1자루, 그에게 선물로 받은 1자루, 초원에서 서건주인 마적에게서 1자루, 요동의 서건주에게 습격당하면서 생긴 1자루, 이번에 혼수로 3자루가 생겼으니 나머지 3자루의 행방만 알면 무슨 비밀이 담겨 있는지 정확하게 알게 된다.
‘남은 반월도는 동여진족들이나 어쩌면 조선 왕실에 있겠어.’
반월도에 대해 슬며시 물었다.
“하필이면 황궁에서 반월도를 나에게 하사한 것이지?”
“황궁 보고에는 본시 1자루가 있었사옵니다. 헌강왕께서 대공주의 혼수품이 뭐가 좋은 지 물어 제가 반월도가 좋다고 해서 2자루를 가져왔습니다. 헌강왕께서 황궁에서 그나마 대장군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저에게 묻더군요.”
“그런 일이 있었군.”
자순이 쉽게 대공주 처소로 가서 하사품과 교지를 가져온 사실이 떠올라 물었다.
“자네는 어찌 그리 쉽게 하사품을 가져왔나?”
“아, 대장군께서 당연히 교지와 교서를 봤다고 판단해 제가 미쳐 말씀을 드리지 않았네요. 저는 조선으로 가는 사신단의 서장관으로 가지만 사실 서장관은 다른 사람이 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있어?”
“그렇습니다. 저는 대장군께서 조선으로 가시면 옆에서 수행하고 그 후에는 봉황성에서 지낼 대공주님 저택에서 안살림을 돌보는 문관으로 지내게 될 겁니다. 그러니 제가 하사품이나 문서를 관리해야 되니 공주님께서 쉽게 넘겨주신 것이고요.”
이런 대답에 자순이 황궁에서 자신에게 보낸 첩자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았다. 누구라도 주변에 첩자를 보낼 것은 확실하니 그나마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자순이 와있게 됐으니 다행이다.
“시녀장은 어떤 사람이지?”
“시녀장이야 대공주님께 지극정성으로 충성하는 여자죠. 어려서부터 남경에서 헌강왕이나 대공주님과 같이 살았으니까요. 시녀장은 지금 38살이라 헌강왕이나 대공주님을 항상 업어서 키워 대를 이은 유모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군.”
최인범은 많은 직책을 부여 받았으니 봉황성으로 가면 해야 할 일들이 많다고 판단했다. 물론 정상적으로 교지의 직책을 수행할 경우다. 하지만 최인범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으니 봉황성에 도착하면 많은 업무를 적당히 타인들에게 넘길 생각이다.
‘돈줄이나 잘 챙기고 군권만 확실하게 챙기자고.’
명나라에서 아무리 높은 벼슬을 줘도 별로 감격하지 않으니 최인범은 특별한 사람은 분명했다.
‘나중을 생각해서 봉황성으로 조선 사람이나 많이 이주시켜야 되겠어.’
최인범이 이렇게 판단하기 때문에 가정제는 절묘한 계책을 쓴다고 노력했지만 벌써 공염불이 됐다. 이미 그들은 너무 심한 자충수를 두어 당초 목적과는 전혀 다르게 변해 버렸다.
봉토지로 하사 받은 봉황성으로 가서 보다 구체적으로 움직일 생각이라 그런 문제는 일단 덮어두기로 했다.
필요한 부분을 알고 나자 조금 전에 정향 대공주가 자길 만나지 않겠다고 시녀장을 통해 말한 것이 은근히 열불이 나서 물었다.
“자순, 그런데 대공주가 왜 남편인 나를 만나려고 하지 않나? 설마 몸이 이상하거나 얼굴이 곰보로 무슨 문제가 있나? 아니면 성격이 모가 나서 못됐거나?”
심사가 약간 뒤틀리다 보니 묻는 방법도 매우 고약했다. 이런 요상한 물음에 자순은 대장군의 심사가 많이 뒤틀려 있다고 느끼자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대장군, 저는 그런 깊은 내막까지는 잘 모르죠. 하지만 몸이나 얼굴이 이상하지는 않사옵니다. 미모야 남경 제일미녀라는 칭호에 어울립니다. 헌강왕께서 소주제일 미인인 왕비님과 결혼해서 미모는 유달리 뛰어 나죠. 외람된 말이지만 그래서 조금은 도도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그래? 성품이 도도하단 말이지?”
“그거야 제가 보기에 그렇다는 거죠.”
“알았어. 그만 나가서 볼일을 봐.”
“넷!”
자순의 조언이 영향력을 부렸는지 아니면 나이가 아직 너무 어리다고 판단한 것인지 모르지만 이날 이후 최인범은 대공주 막사 근처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요동 땅에 들어서자 최인범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게 군사들의 군기가 너무 엉망이라고 다그쳤다.
대공주의 가솔출신으로 중군지휘관인 임시 천호장 장전중이 먹잇감이 되어버렸다. 무질서하게 이동하는 중군들의 행동을 나무라며 크게 호통 쳤다.
“장 천호장, 도대체 전선으로 이동하는 군대가 왜 이렇게 무질서하고 엉망인가?”
“대장군, 일부 군사들은 가족들과 같이 가느라고.”
“가족들이 그렇게 좋으면 당장 전역하라고 해.”
“전역을 하면 돌아가야 하나요?”
“그건 자네가 너무 잘 알 것이 아닌가?”
이런 호통소리에 기겁한 장전중은 급하게 병사들을 대열로 합류시켜 기합을 주었다. 그는 철갑웅이 선봉기마중대원을 훈련시키던 혹독한 방법을 답습했다.
“모두 저쪽에 보이는 나무를 돌아서 선착순 10명!”
넓은 들판 끝에 보이는 커다란 나무를 돌아서 선착순을 몇 번 시켰다. 정신이 바짝 든 병사들은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 하고 행군했다.
그러나 심사가 여러 가지로 뒤틀린 최인범은 명나라 출신 병사들의 행군하는 모습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내 철갑웅에게 명령했다.
“철갑웅, 네가 시범을 보여. 어떻게 훈련시켜야 군기가 바로 서게 되는지.”
“넷!”
무지막지하게 모이는 거구인 철갑웅이 나서서 중군인 보병들은 그야말로 곡소리가 나오는 강도 높은 기합을 주었다.
“일동 차려! 손 올리고 앉아! 구령을 외치며 걸어!”
철갑웅은 병사들에게 끝없이 오리걸음을 시켰다. 군기가 바짝 들어서 재빠르게 움직여 보지만 어떤 트집을 잡아서도 그냥 놔두질 않았다.
선착순이야 아주 기본 중에 기본이고 좌로 굴러 우로 굴러도 초보단계다. 자갈밭이나 진흙탕이 보이면 어김없이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게 하니 명나라의 군사들은 그야말로 죽을 경을 쳤다.
온몸이 상처투성인 병사들이 잠시 휴식 시간을 틈타 하소연을 토해내고 있었다.
“너무 힘들어서 거지로 살더라도 북경으로 돌아가고 싶어.”
“이 사람아, 북경으로 돌아가는 것은 포기해, 여기서 도망치면 탈영병으로 처리한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어? 탈영병은 재판도 필요 없는 즉결 처분이야.”
“그럼 전역할까?”
“그건 너무 늦었어. 전역은 봉황성에 도착해야 승인한다더라고.”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기도 하지만 혹독한 훈련을 하게 된 명나라 군사들에게는 더욱 멀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근무지인 봉황성에 살아서 도착할까 싶은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