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어느새 봄기운이 완연한 따스한 3월이 되었다. 산과 들에서는 새싹들이 파랗게 올라오고 논과 밭에서는 농부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최인범은 주둔지와 발해 여각을 오가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병사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사며 준비에 바쁘던 소피아가 서재로 찾아와 보고했다.
“대장군, 군복을 6천벌을 만들고 말은 산해관 밖의 목장에 500필을 준비해 두었어요.”
“알았소.”
최인범은 선봉 부대인 기마부대를 구성할 중대원을 먼저 보내기로 했다. 선봉 중대장인 철갑웅에게 지시했다.
“네가 부대원을 이끌고 빨리 산해관을 통과해서 말들은 인수해. 그리고 혹시 모르니 그곳에서 군사훈련을 하면서 기다리고.”
“넷!”
“기마병은 각자 한필씩 차지하고 나머지는 산해관에 있는 장주한과 홍성철에게 짐마차를 끌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라고 전해. 많은 사람이 이동하니 의약품을 충분히 준비하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바로 떠나겠습니다.”
선봉 중대가 떠나고 나자 다음에는 전방 중대가 천진을 떠났다. 개인별로 식량을 가지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최인범은 자신도 떠나려면 꼭 필요한 중요한 절차가 남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아고야, 진짜 중요한 것을 깜박 잊어 먹을 뻔 했네.’
이곳에 있는 소피아와 왕미령은 그대로 둔다고 해도 정향 대공주는 데리고 가기로 결정했으니 그녀에 대해 알아봐야 할 것이 있었다.
명나라의 정향대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됐으니 최소한 그녀의 진짜 아비가 누군지는 알아둘 필요성이 있었다. 명나라 사람들이야 황족들의 족보를 잘 알지만 자신은 전혀 모르기 때문에 따로 알아봐야 한다.
‘도대체 어떤 황실 계보를 가진 여자인거야?’
만주로 들어가서 완전히 처박혀 산다면 모를까 명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는 조선에서 살아야하니 장인의 이름이라도 일단 알아둘 필요는 있었다.
최인범은 소피아에게 부드럽게 지시했다.
“저택으로 가서 대공주의 가복 중에서 문관 출신이 있으면 데리고 와.”
“예.”
잠시 시간이 지나자 장전중이란 진사 출신으로 무과에도 급제했다는 20대 후반인 젊은 청년이 서재로 찾아왔다.
“부마도위님. 소인 문안드리옵니다.”
“그대는 어디 출신인가?”
“등주입니다. 산동성에서 반란이 일어나 고향 사람들이 대부분 반란군에 가담해 남경에서 근무하던 공직에서 떠났습니다.”
“알았네,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는 황실의 족보를 알아보려고 부른 거야.”
“알겠습니다.”
장전중은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최인범이 황실의 족보에 대해 묻자 다른 역대 황제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정향 대공주와 관계된 황제의 계보만 설명했다.
정향대공주는 8대 황제인 성화제의 아들인 기혜왕인 주유린이 조부다. 그녀의 아비는 장남인 주후택으로 황족이라 헌강왕에 봉해졌다. 아비가 왕이라 공주이기는 하지만 황제의 딸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그리 큰 위세를 떨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당숙인 가정제가 자신의 딸로 입적시키게 되자 혈통과는 상관없이 황제의 딸로 변해 막강한 권세를 부리는 대공주가 되었다.
“헌강왕은 지금 어디서 사나?”
“남경에서 사십니다.”
“헌강왕은 나에 대해서 잘 아나?”
“그렇습니다. 대공주님께서도 부마도위님에 대해서 비교적 많이 아시고 계십니다.”
정향 대공주가 자신에 대해서 잘 안다니 근시초문이다. 그래서 조급하게 반문했다.
“뭐라? 공주가 어떻게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부마도위님께서 남명으로 이주시켜 크게 전당포를 운영하고 있는 이신생 대인과 헌강왕부 사이에 거래 관계가 깊어 그분의 따님인 이소소 낭자에게 자주 이야기를 들어서 잘 아는 편이죠. 특히 이소소 낭자 때문에 부마도위께서 예쁜 여자가 아니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품까지 소상하게 아십니다.”
“뭐라? 그런 이야기를 이소소가 공주에게 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헌강왕께서 과감하게 부마도위님과 공주님을 혼인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세상이란 넓고도 좁다고 했다. 자신이 남쪽으로 가면서 이주시킨 이신생의 딸 때문에 정향대공주와 묘한 인연이 연결되어 있었다.
‘헌강왕도 어쩌면 마음속에 무서운 야심을 지닌 황족 같군.’
대공주의 가복으로 결정된 사람들은 문과나 무과에 합격해서 벼슬길로 나섰었다. 하지만 고향인 산동성과 강소성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자발적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공직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보면 반란군 때문에 화를 면하기 어려웠다. 언제 반란군과 협조했다고 해서 반역죄로 처형될지 몰라 빠르게 야인으로 변했다.
헌강왕이 그들을 가복으로 하나 둘 거두다 보니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것이 또 문제가 될 여지가 많아 딸의 가복으로 만들어 멀리 떠나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정향대공주의 가복으로 들어온 정황을 들어보니 모두 가정제에 대해 불만이 많은 반골들 같았다. 그런 만큼 어느 정도 능력들은 있다는 것으로 집작했다.
‘내가 조선에서 떠나기로 했던 것과 약간 비슷하군.’
이렇게 판단한 최인범은 장전중에게 교지 내용을 물었다.
“교지에 나는 앞으로 어디서 뭐를 하라고 정해졌나?”
“아직도 교지를 읽어 보지 않으셨군요. 교지에는 부마도위의 봉토지로는 조선과 가까운 봉황성 주변을 넘겨주셨습니다. 그래서 부마도위께서는 봉황성의 영주이십니다.”
“뭐라? 봉황성을 봉토지로 넘겨줘?”
부마도위의 봉토지로 봉황성 지역을 넘겨줬다는 것은 그곳에서 거두는 세금으로 대공주부와 건주위 총감부를 운영하라는 뜻이다.
압록강 하구 북쪽에 있는 봉황성은 혹자는 오골 산성으로 불리는 곳이다. 조선에서 만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또한 명나라에서 조선을 침공하려면 지나야 되는 중요한 길목이자 교통로다.
하필이면 그곳을 봉토지로 줬다니 가정제나 명나라의 조정 대신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조선과 미묘한 관계를 만들어 조선과 여진이 힘을 합쳐 명나라를 위협하는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려는 의도가 엿보인 것이다.
‘흠! 멍청한 가정제가 이번에는 머리 좀 굴렸어.’
교지 내용을 직접 읽어보면 더욱 정확하게 숨은 의도를 알겠지만 일단은 모른 척 명나라를 떠나기로 했다. 아무리 명나라 조정에 불만이 많아 관직에서 물러났다고 하지만 언제 주변사람들이 첩자 노릇을 할지 모른다. 이미 첩자 짓을 하는 부류도 있다고 판단했다.
“알았네. 자네들도 다시 여기로 오기 힘드니 필요한 물건은 빨리 준비해 떠나기로 하지.”
“알겠사옵니다.”
정향 대공주를 조선으로 데리고 가서 적당한 거처를 만들기가 곤란했다. 하지만 봉황성을 봉토지로 하사했다니 그런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다.
일단 정향 대공주는 봉황성으로 데리고 가서 정착시키면 된다. 제일 중요하게 빠트렸다고 판단한 문제는 천진에 남아 있어야 하는 소피아에 대해서다.
서재로 소피아를 불러 속이 훤하게 드러나 보이는 질문을 했다.
“소피아!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너도 같이 떠날 거야?”
“어머, 저도 데리고 가시려고요?”
“가고 싶으면 너도 같이 떠나.”
데리고 갈 생각이 있으면 진즉에 짐을 싸라고 했을 것인데 이렇게 말하자 소피아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대장군, 예쁘신 공주님도 옆에 있으시니 저는 같이 떠날 수 없죠. 그냥 여기서 살 생각입니다.”
“알았어, 네가 여기서 지내기가 좋다면 그렇게 해.”
최인범의 대답에 소피아는 속으로는 열불이 났다. 정향 대공주와 이상한 혼인을 하더니 자신을 완전히 내치겠다는 뜻과 같아 너무 섭섭하고 억울했다. 그래도 명나라에서 떠나기 전에 한 번쯤은 품에 안아 줄 것을 계속 기대했더니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분은 어린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더니 내가 안중에도 없나 봐! 어휴 약 올라.’
은근히 자존심도 상하고 열불이 나서 왜 이러는지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이 부마도위가 되어 버려 전에 비해 많이 위축된 처지라 그리 행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인범은 얼굴이 수시로 푸르닥 파르닥 변하는 소피아를 바라보며 속으로 웃고 있었다.
‘자기를 완전히 내치는 줄 알고 은근히 열불이 난 것 같군.’
하룻밤 품에 안아주는 것이 그리 힘들지는 않다. 문제는 이런 사실이 정향 대공주나 또는 그의 가복들에게 알려져 가정제에게 보고라도 하면 자칫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고 판단해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아직은 몸조심을 해야 돼.’
정향 대공주를 먼저 산해관 너머로 멀리 보내고 나서 일을 치루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대부분 보병으로 걸어서 이동하기 때문에 자신은 뒤에서 말을 타고 떠나도 얼마든지 따라 갈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질문만 하고 있었다.
“소피아, 전에 말한 군복이나 쇄자갑옷은 얼마나 준비됐나?”
“아직 군복은 1만벌만 만들었고 나머지는 며칠은 지나야 제작이 가능해요. 쇄자갑은 이미 1000벌을 사서 창고에 있고요.”
하북 지역은 밭이 많아 밀이나 콩의 생산이 많은 곡창지대다. 또한 주변에 질 좋은 석탄도 많고 철광산도 많아 필요한 무기를 생산하기 좋은 여건을 지닌 곳이다.
“소피아, 앞으로는 배로 거래하게 될지 모르니 쇄자갑은 조금씩 표시나지 않게 구입해서 저장해 놓도록 해.”
“알았어요. 조심해서 비축해 놓죠.”
최인범은 발해 여각을 떠나 주둔지로 가서 며칠간 중군으로 떠나는 사람들에 대해 챙겼다. 임시 백호장으로 정해진 군관들에게 지시했다.
“혹시 아내가 있거나 아내로 삼을 여자가 있으면 같이 떠나도록 해. 가족들이나 친척들을 데리고 가는 것도 좋고. 그곳으로 가면 어떻게 해서라도 먹고 살 방법은 만들어 줄 것이니 그렇게 알아.”
“잘 알겠습니다.”
봉황성을 봉토지로 하사 밭았으니 사람의 머리수를 최대한 늘려볼 계획이다. 봉황성을 기점으로 산업을 크게 일으켜 세를 이루던 군사를 양성하려고 해도 일단 머릿수가 많아야 된다.
전에도 그렇지만 조선에서 이주민을 받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 명나라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데리고 봉황성으로 떠날 생각이다. 되도록 명나라에 반항하는 사람들이나 또는 가정제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보려고 했다.
‘일반 백성들이야 배부르게 먹이고 잘 대해주면 조선이나 명나라나 여진 출신이 하등에 다를 것이 없어.’
아내들도 모두 다양한 국적을 가진 여자들이다. 또한 순수한 동양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민족만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아직 아무런 미래에 대해 결정한 바가 없으니 그저 기왕에 알게 되어 자신과 인연이 깊은 사람들만 잘 살게 해주면 된다고 판단했다.
‘봉황성은 그래도 조선과 가까우니 조선인이 많이 유입이 될 거야.’
드디어 중군도 떠날 준비를 마치고 서서히 이동하게 되었다. 식량이나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도 모조리 우마차에 싣거나 등에 지고 가야하기 때문에 마치 피난행렬과 비슷해 보였다.
더구나 가족이나 친척 또는 지인들도 합류해서 떠나다보니 더욱 그랬다. 그런 사람들의 수가 무려 4000명이나 되자 문제가 생겼다. 준비된 식량이 부족하게 될 것 같았다.
“아고야, 데리고 가서 먹고 살게 해준다고 하니 밥보다 고추장이 더 많네.”
그들이 떠나기 시작하자 임시 대공주부에서 두문불출하며 지내던 정향대공주의 마차도 서서히 움직였다. 말 6필이 끄는 큰 마차라 안에 여러 명의 시녀들도 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