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가정제의 음흉한 계책>
고량주를 산다는 제안에 늙은 초급군관은 벽에 기대어 놓은 장검을 들고 철갑웅을 졸졸 따라왔다.
철갑웅은 늙은 초급군관을 슬며시 최인범이 앉아 있는 찻집으로 데리고 갔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주문하세요.”
“고맙소. 뭐든지 알고 싶은 것 말해 보시오.”
찻집이지만 고량주나 안주도 파는 술집도 겸하는 업소라 노파인 주인에게 고량주와 고기 안주를 시켰다. 정보도 얻어 내면서 그동안 못 먹었던 술과 고기도 먹어볼 요량이다.
두 사람은 최인범이 앉아 있는 바로 옆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고량주를 시켜놓고 돼지고기 안주를 집어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늙은 초급군관은 주워들은 이야기가 많아서 그런지 자세하게 그간에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설명했다.
“올 초에 황제폐하께서 양녀를 받아들여 정향대공주로 삼아서·······.”
약간 두서없이 설명했지만 불과 보름 전에 가정제가 당질(5촌)인 처녀를 자신의 양녀로 받아들이며 정향대공주로 봉했다.
그런 뒤에 그녀의 남편으로 최인범으로 정해 이미 혼인을 끝냈다는 것이다. 신랑도 없는 혼인식을 간단하게 해버리고 공주를 이곳으로 보냈다.
부마도위로 정해진 과정을 듣고 나자 건주위 총감이 뭔지 궁금해서 물었다.
“도대체 건주위 총감이란 벼슬은 또 뭐요?”
“건주위 총감이란 종1품의 벼슬로 조선과 접해 있는 여진족인 3명의 건주위를 통괄해서 감찰하고 지휘하라는 높은 직책이요.”
명나라에서는 요동의 남쪽인 조선과 접한 국경지역에서 활동하는 여진족을 관리하기 위해 그들의 족장들에게 건주위라는 직책을 부여했다.
여진족은 정2품에 해당되는 건주본위, 건주좌위. 건주우위라는 3명의 건주위가 있었다. 총감으로 여진족을 지휘하라는 것은 그냥 허장성세에 불과했다. 건주위인 여진족 족장들의 동태를 잘 감시하라는 정도의 직책이다.
“총감의 근무지나 지낼 관청이나 장소는 정해져 있나요?”
“그건 아직 없습니다. 건주위 총감께서 본래 조선국 출신이니 아마도 조선 땅이나 또는 북쪽의 여진 땅에 건주위 총감부나 정향대공주님의 거처인 대공주부를 임의대로 설치하라는 뜻으로 정한 것 같습니다.”
“병사들은 왜 여기에 있소?”
“아까도 말했지만 우선 대공주님의 저택을 지키고 건주위 총감님께서 조선으로 돌아가시면 같이 떠나기 위해 기다리는 겁니다. 나야 늙었지만 본시 요동출신이라 지리를 잘 안다고 해서 차출된 것이고 다른 병사들은 대부분 아주 젊은 사람들이죠.”
“몇 명이나 되는 거요?”
“모두 2000명이요. 여진, 몽골, 요동 출신들이 모두 모여 있소. 많지는 않지만 조선 출신들이나 왜인들도 있소. 나흘에 한번씩 500명이 교대로 와서 발해 여각과 정향대공주님이 머무시는 저택 주변에서 근무하는 거요.”
“다른 사람들은 어디서 주둔하고요?”
“그야 저쪽 벌판에 야영지가 있고 주로 야외용 천막에서 지내고 있소.”
이런 늙은 초급군관의 설명을 옆에서 듣던 최인범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 신랑도 없이 혼인을 시켜놓고 공주를 이곳으로 보냈다니 정말 미친놈이 하는 짓거리다.
조선에서는 주상이 부마도위로 삼겠다고 해서 명나라로 왔더니 기어이 코를 끼우려고 작정을 했다. 은근히 열불이 났지만 일단 더 자세히 들어 보기로 했다.
‘정신병자인 가정제가 기어이 어처구니없는 큰일을 저지르고 말았군.’
자다가 날벼락을 맡는다는 소리가 있다. 본인도 없는 사이에 가정제가 제 멋대로 혼인시키고 부마도위로 정했다고 하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 기가 막혔다. 더구나 정향대공주는 이미 이곳 발해 여각 옆에 임시로 거처를 마련해 지내고 있다고 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 철갑웅을 술을 따라주며 다시 물었다.
“왜? 갑자기 그렇게 부마도위로 정한 것이요?”
“그건 나도 잘 모릅니다. 언뜻 듣기에는 조선 국왕이 보낸 사신 때문이라고 하던데 자세한 내막이야 우리 같은 말단 군관이야 잘 모르죠.”
늙은 초급군관은 자신은 본시 요동의 압록강과 가까운 봉황성 출신이라고 했다. 호랑이 사냥꾼 출신으로 전에 백두산이나 멀리 두만강 지역을 많이 다녔다고 했다. 그 때문에 길 안내자로 아들과 같이 건주위 총감 휘하의 군사로 차출되었다고 했다.
늙은 병사의 설명을 들어보니 아직은 가정제가 자신을 잡아들이거나 또는 어떤 위해를 가하기 위한 행동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건주위 총감이란 직책을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부여한 이유는 다분히 정치적인 치밀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황제가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기는 했어. 하지만 이런 배경에는 능구렁이 같은 노회한 명나라 대신들이 분명 조선이나 여진족을 견제하기 위해 이런 짓을 벌인 것이 확실해.’
아무리 바보이고 정신병자라고 평가되는 가정제라지만 대륙의 최고 권력자인 황제의 명령을 정면으로 반발할 수는 없었다. 그리되면 아마도 가정제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 판단해 동창의 척살대는 물론 많은 군사를 동원해 자신을 잡아 죽이려고 할 것 같았다.
‘그 자식과 엮기지 않으려고 했더니 결국 단단히 꼬이고 말았어.’
부마도위나 건주위 총감 또는 아내인 정향대공주에 대한 문제는 나중에 풀어야 될 숙제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찻집에서 슬며시 나와 발해 여각으로 들어갔다.
활짝 열려 있는 입구로 들어서자 계산대에 앉아 있는 중년인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절했다.
“대장군, 이제야 오시는군요.”
타타르 부족 출신으로 북경어를 잘해서 소피아가 최측근으로 부리는 여자다. 그렇기 때문에 최인범의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러자 여각에서 일하던 점원들은 물론 주방에서 일하던 모든 사람들이 급하게 튀어나와 다들 납작 엎드려 절했다. 이런 행동을 보자 최인범은 다소 어색해 이내 발길을 돌려 여각 뒤에 있는 안채로 향했다.
안채로 들어가자 아내로 내정된 소피아가 급하게 밖으로 나오다가 마주치자 그녀 역시 납작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동안 잘 있었소?”
“예, 무탈하게 돌아오셨군요. 부마도위가 되신 것을 감축 드리옵니다.”
전에는 소피아가 이런 정도의 낮은 자세로 예의를 정중하게 차리지는 않았다. 아마도 황제의 수양딸인 정향대공주의 남편인 부마도위가 되자 자신은 여러 명의 부인들 중에서 완전히 서열이 한참 뒤로 밀렸다고 판단해 이리 행동하는 것 같았다.
‘명나라에서 살다보니 어느새 고리타분한 예절에 물이 들었군.’
일단 안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고 나서 철갑웅에게 지시했다.
“선착장으로 빨리 가서 화물선을 팔고 물건들을 잘 챙겨서 이리 가져와.”
“넷!”
소총도 40정이나 되고 생아편과 바꾼 금괴가 너무 많았다. 갑옷 두 벌을 만들고도 남아 별도로 가져온 금괴가 있기 때문에 이런 지시를 내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철갑웅이 물건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소총과 금괴가 들어 있는 상자와 서책이나 기타 서류들을 안방에 가지런히 정리했다. 모두 귀한 물건들이라 창고 같은 곳에 저장할 수 없어 제일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안방에 비치해 놓았다.
“화물선도 팔고 물건은 이상 없이 다 가져왔지?”
“넷! 말들은 마구간에 넣어 두었습니다.”
“무거우니 갑옷도 벗자!”
“넷!”
최인범과 철갑웅은 안방에서 서둘러 군복을 훌러덩 벗었다. 옆에 서있던 소피아는 만나자 마자 두 남자가 동시에 옷을 훌러덩 벗자 화들짝 놀라며 어쩔 줄 몰라 눈이 동그래져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미묘한 상상이 저절로 떠오르고 있었다.
‘나를 여기서 한번 덮치고 나서 그동안 남쪽에서 줄 곳 모시고 다니며 보필한 공적이 많은 저 놈에게 여기서 덮치라고 넘겨줄 생각으로 이러시나?’
소피아는 큰 덩치의 두 사내가 동시에 옷을 벗자 짧은 순간이지만 별 오만 잡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있었다.
소피아의 본시 몽골 부족인 타타르족이다. 떠돌면서 사는 초원의 유목민인 타타르 부족은 난교를 벌이는 경우가 있었다. 흔히 부족장이 자신의 파오에서 여자를 먼저 취하고 나서 부하에게 하사한다.
전쟁에서 공적이 많은 심복부하에게 여자를 넘겨주어 덮치게 하는 경우가 많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분이 나를 너무 함부로 다루려고 하시네.’
약탈한 여자들을 족장의 파오에서 처리하는 것은 아주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만약 그런 난교 때문에 여자가 임신해 자식을 낳으면 자질을 살펴봐서 허접하면 부하의 자식으로 정해진다. 그러니 제법 자실이 우수하거나 무력이 뛰어나거나 어떤 부분에서 똑똑해 보이면 부족장의 양자로 삼는다.
그렇게 해서 부족장의 혈족이 번성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런 여자는 마치 부족장과 공동 소유처럼 변해 족장이 원하면 언제고 잠자리를 들어야 된다. 물론 그런 경우에는 부수적으로 많은 지참금을 여자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성리학이 발달한 명나라나 조선의 시각에서 보면 천하에 윤리도덕이 전혀 없는 난잡한 행위다. 하지만 북방 유목 민족의 오랜 전통인 관습이다.
특히 타타르 부족의 경우는 유럽의 영향을 받아 중세기에 성행하던 영주의 초야권이 유입되어 그런 방식 교접의 정도가 더욱 심했다.
소피아는 이곳에서 지내서 정조 관념이 강해지기 보다는 최인범이란 사내가 좋아 다른 남자와 접하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하룻밤에 두 남자를 상대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 비참했다.
‘내가 이렇게 처참한 신세가 되다니. 죽고 싶어.’
아직도 최인범이 소피아를 품어 주지 않다가 보니 이런 쪽으로 요상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더구나 전리품처럼 큰 내기 결투를 벌여 자신을 차지했으니 다른 여자들과 조금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치욕을 당하느니 칼 물고 죽어야 하나?’
부족장 딸인 자신의 처지가 그저 일회용 전리품이 된 것 같았다. 처참하고 하층민 같은 처량한 신세로 변하게 됐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흐르고 있었다.
최인범은 군복을 빠르게 벗고 안에 입고 있는 황금으로 엮은 갑옷을 벗으며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소피아가 눈물을 주르륵 흘리자 최인범은 달리 생각했다.
‘여자들이란 그저 황금만 준다면 금방 감격해서········. 소피아도 명나라로 오더니 너무 재물에만 눈이 어두운 속물로 변했어.’
같은 현상을 보고도 서로 생각이 다르다보니 전혀 다른 쪽으로 이해했다. 벗은 황금 갑옷을 소피아에게 넘겨주며 지시했다.
“잘 보관하고 있어요.”
“예, 대장군.”
한족들은 대부분 부마도위로 칭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타타르 부족 출신들이나 소피아의 수족인 부하들 경우 모두 대장군으로 칭하고 있었다.
갑옷 안에는 비단으로 만든 속옷을 입고 있어 완전히 벌거벗지는 않았다. 금괴로 만든 갑옷을 벗어놓은 철갑웅은 안방에서 나가며 물었다.
“대장군님! 저는 뭐를 하죠?”
“우선 나가서 목욕부터 하고 명나라 옷으로 갈아입어. 그리고 쇄자갑옷도 더 가볍고 좋은 것이 있나 찾아봐서 챙겨 입고. 다른 곳을 가지 말고 안채에서 지내.”
“알겠습니다.”
최인범은 철갑웅이 안방에서 나가자 소피아에게 지시했다.
“우선 목욕물이나 준비하지. 한 동안 목욕을 못해서 그런지 몸이 군실거리고 찜찜하군.”
“예.”
최인범은 소피아의 지시로 하녀들이 준비한 더운 물로 목욕을 끝내고 나자 명나라의 비단 옷을 챙겨 입었다.
고급 비단으로 만든 평범한 상인들이 입는 옷이다. 개운한 상태가 되자 안채에서 나와 소피아의 안내를 받아 발해 여각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발해 여각의 규모는 전보다 10배는 더욱 커져 있었다. 이웃한 건물을 사서 늘린 것으로 발해 여각 이외에 전당포와 발해 상단도 설립해 운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