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저지른 약탈사건들이 있으니 아무튼 현장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어 서두르고 있었다.
또다시 이틀을 이동해 드디어 남경에 도착했다.
이곳은 오래 전부터 대륙의 국가들이 수도로 이용하던 큰 도시다. 아주 번화하고 남쪽 지역의 상업, 정치, 문화 그리고 군사 면에서 중심지역이다.
10척의 화물선이 정박한 장강에 있는 선착장으로 가자 두 어사들이 초조한 기색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급하게 다가오는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물었다.
“무슨 일인가?”
“순무사님, 큰일 났습니다.”
“뭐? 무슨 큰일?”
얼굴이 거의 사색으로 변해 있는 두 어사를 보며 최인범은 어리둥절했다. 반란이 났다고 해도 여기는 안전해 보이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장거웅이 참담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황제폐하께서 순무사님을 모든 공직에서 면직하셨사옵니다.”
“뭐요? 그게 정말이요?”
“그렇사옵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이야 알았다. 하지만 막상 모든 공직에서 파면되었다니 조금은 씁쓸했다. 그렇다고 무슨 미련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항상 가지고 있던 것이 사라졌다는 조금의 허전함 정도다.
‘결국 가정제가 간신들의 부추김에 결국 변덕을 부렸군.’
가정제의 변덕스러운 성품이야 익히 아는 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사퇴시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공직에 있으면 자신이 자주 조정에서 거론되기 쉬워 내심으로 은근히 불안했었다.
최인범은 혹시 몰라 물었다.
“다른 추가된 명령은 없나?”
“없사옵니다. 순무사님의 모든 공직을 면직시킨다는 명령만 내려왔습니다.”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그저 공직에서 물러나시고 추가된 명령은 없사옵니다.”
최인범은 혹시 자기 때문에 두 사람의 신상에 무슨 일이 있나 물었다.
“자네들은 어찌 되었나?”
이런 물음에 엄사봉이 나서며 답했다.
“남경에서 잠시 지내다가 내륙을 통해 감찰 업무를 수행하며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응교가 됐습니다.”
“엄 어사도 승차를 했다니 너무 잘 됐군.”
“모두 순무사님 덕분이죠. 정말 감사합니다.”
변덕이 심한 황제 밑에서 하는 벼슬이라 앞일을 장담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승급에 목을 매는 관료라 종6품인 응교 올랐으니 최소한 당분간은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명나라 조정이 얼마나 간신들이 많은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최인범은 가정제가 취한 이런 면직조치를 하등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미련은 없지만 남에 힘에 의해서 장기판의 졸처럼 마구 휘둘린다는 사실이야 조금은 불쾌했다.
‘엄숭이나 태감이 줄 곳 나에 대해서 모함했을 것인데 면직 정도라면 아주 잘 됐어. 그렇지 않아도 강소성에서 반란의 조짐이 보이는 상황이니 이쯤에서 공직에서 깔끔하게 물러나는 것도 좋지.’
이렇게 판단하니 가정제의 처사가 그리 싫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이야 고위직에서 갑자기 면직되어 큰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최인범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아주 적절한 때 공직에서 풀어줬어.’
본래 오려고 벼르던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 그러니 누구의 감시나 또는 눈치를 볼 것 없이 홀가분하게 영파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새로 구입한 많은 소년소녀들을 돌보며 자신에게 필요한 호위병사로 양성시키는 교육에도 버거운 상황이다.
공직에서 면직되었다고 하자 최인범은 즉시 철갑웅에게 지시했다.
“관복과 인장 그리고 영조척을 가져와.”
“넷!”
명령을 받은 철갑웅은 즉시 명나라 조정으로 받거나 중간에 관아에서 받았던 물건들을 가지고 왔다. 물건들을 장거웅에 넘겨주고 작별 인사를 했다.
“이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상황이니 앞으로 만나기 힘들겠군요. 그 동안 같이 다니느라 고생했습니다.”
“순무사님, 관아로 가시지도 않고요?”
“그래야 되나요?”
“아닙니다. 꼭 관아로 갈 필요는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면직된 처지로 굳이 관아로 가서 여러 사람 번잡스럽게 할 필요야 없지요. 섭섭하더라도 그냥 여기서 헤어지죠.”
최인범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두 어사와 헤어졌다.
공연히 헤어지기가 섭섭하다고 술이라도 마시다 누구라도 면직된 사실을 두고 불평을 토하다 보면 그게 꼬투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들과 따로 만나 작별할 필요는 없었다. 때로는 모질다고 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것이 제일 좋다고 판단했다.
‘가정제가 이미 변심했으니 또 무슨 트집을 잡아서 나를 해하려고 할지 몰라.’
그러니 빨리 이들과 헤어져 행방을 감추는 것이 제일 속이 편할 수 있었다.
멀리 제남에서 이곳 남경(南京)으로 이사 온 이오명을 만나기 위해 도심 안으로 들어갔다. 그에게 넘겨서 처분할 황과 전북이 있으니 그를 만나야 한다.
또한 그에게 빌려준 고급비단 1천필도 돌려받아야 하니 반드시 만나야 된다.
‘이오명만 만나서 물건만 처분하면 바로 항주로 가야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남경은 생산도시가 아니고 주로 소비만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장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가게들이 즐비하게 있고 진귀한 물건들이 많았다.
최인범은 옆에서 따라다니는 철갑웅에게 지시했다.
“여기는 물건이 많은 곳이니 아이들이 항상 소지할 무기들을 사도록 해.”
“알겠습니다.”
“오면서 필요했던 물건들도 모두 사도록 해. 특히 아이들 공부를 위한 문방사우를 많이 사도록 하고 천자문도 많이 사도록 해.”
“알겠습니다.”
나중에는 훈민정음을 배우도록 할 생각이지만 조선에서도 최소한 천자문은 알아야 한다. 그 때문에 천자문은 모든 아이들에게 배우도록 할 생각이다.
도심으로 들어와 고급 도자기나 고급 가구들을 파는 골동품 거리로 들어가자 그곳에 커다란 간판이 걸린 신생(新生) 전당포가 보였다.
‘새로운 삶이라니 아주 적절하게 지었군.’
빠르게 신생 전당포로 다가가 육중한 쇠로 만든 철문을 지그시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는 매우 좁으나 상당히 넓은 상점이다. 보이는 창문은 모두 쇠창살로 보강되어 있었다. 안에는 건장한 청년 둘이 소파에 앉아 들어오는 최인범을 매서운 눈으로 살폈다.
‘알려준 그대로 경비원도 배치했군.’
굵은 쇠창살과 또는 나무로 만든 창살 사이로 물건의 보관증인 서류를 슬며시 내밀며 말했다.
“이 물건을 찾으러 왔소.”
40대인 지배인은 서류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으며 급하게 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바로 이층으로 올라가세요.”
최인범은 제남에서 해어질 때 이오명에게 남경으로 와서 전당포를 차리고 운영방법에 몇 가지 중요한 조언을 해주었다. 명나라에서 금융기관인 은행 역할을 대신하는 전당포다. 그래서 은행에서 고객의 물건을 보관해 주는 방식으로 비밀금고를 운영해 보라고 했다.
그래서 이오명의 수결이 있는 물품 보관증을 받아서 지니고 있다가 지배인에게 제출한 것이다. 이층으로 올라가자 연락을 받은 이오명 나타나며 반갑게 인사했다.
“대인, 어서 오세요.”
공직의 명칭이 아닌 흔히 상인들끼리 쓰는 대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자 최인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자신이 공직에서 면직된 사실을 이오명이 알고 있었다.
‘그런대로 정보력은 있게 전당포를 운영하는군.’
이오명은 전당포의 이름을 신생으로 짓고 이름도 신생으로 바꾸었다. 이신생은 최인범을 안내해 안채로 들어갔다.
안채에 있는 서재에 도착해 급하게 넙죽 엎드려 절했다.
“은인께 소인 인사 올립니다.”
“이 대인, 자꾸 이러지 마세요. 그러면 서로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빨리 대인께서 처리할 사업이 있어 찾아 왔으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사업 때문에 찾아왔다고 하자 이신생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대인 무슨 사업이죠?”
그러자 최인범은 이 사람에게는 반란군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조심해서 물건들을 처분할 수 있었다.
최인범은 자신이 동해안으로 가서 목격한 어민 몰살사건, 회수에서 있었던 밀무역사건과 기타 자신이 목격한 일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모든 이야기를 듣던 이신생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회수 북쪽에서 반란군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겠군요.”
“그렇다고 봐야죠. 그러니 그런 정보를 이용해 이번 기회에 돈을 벌어 보세요. 반란이 일어나면 변수가 많아지니 지금 제가 말해준 정보를 잘만 이용하면 큰 재물을 모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군요.”
전쟁이 터지면 소요될 물건들이 많아지니 정확한 정보를 안다면 상인은 기회에 큰 재물을 벌어들일 좋은 기회다.
최인범은 자신이 이런 정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남이 안다는 사실이 조심스러워 당부했다.
“반란 세력들이 움직인다는 사실은 절대로 관아로 알리는 일은 삼가세요. 오히려 그리되면 제 행적까지 자칫하면 외부로 노출됩니다.”
“잘 알겠습니다.”
최인범은 이신생에게 왜구와 밀거래 현장을 발견하고 밀수품을 탈취한 사실도 설명하고 많은 유항이나 전복을 이신생이 인수해 처분하라고 지시했다.
“대인, 그렇다면 그 물건 판매 대금은 어떻게 처리하시고요?”
“그건 크고 작은 어음으로 결제해서 팔고 다시 다른 어음으로 바꾸어 저에게 넘겨주시면 됩니다. 북경이나 천진에서도 유통되는 어음이면 더 좋고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물건은 어디에 있죠?”
잠시 생각하던 최인범은 즉시 처리 방법에 대해 말해주었다.
“물건은 모두 선착장에 있으니 물건이 실린 화물선 자체를 인수해 버리세요. 대신 똑 같은 화물선 한척을 넘겨주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장물인 많은 물건을 자주 이동시키다 보면 비밀이 남에게 새어 나갈 수 있다. 아예 물건들이 적재된 화물선을 자체를 넘기기로 했다.
이런 대화를 끝내고 나자 최인범은 서둘러 일어났다. 그러자 이신생이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딸아이가 대인을 무척 만나보고 싶어 했는데 그냥 가시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