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산해관에서 돌아오면 동침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대로 떠나려고 하자 소피아는 더욱 낙담했다. 소피아는 이제 중국식의 이름으로 바뀌어 성이 소(沼)에 이름이 피아(皮娥)로 변했다.
서둘러 조금의 여비만 챙기고 나자 최인범 일행은 대운하의 선착장으로 향했다. 선착장에 도착하자 우선 배를 구하게 되었다.
최인범은 장거웅에게 조정에서 받은 은자를 모두 넘기며 지시했다.
“앞으로 장어사가 여행 경비는 정산하시오.”
“그렇게 하죠.”
장거웅은 같이 따라가는 호위무사인 세 형제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워낙 큰 덩치라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
“어사님, 호위무사들의 먹성이 좋아 보여 식사대금이 너무 나오겠네요. 말도 그렇고 개도 같이 가니 조정에서 준 여비로는 곤란하겠어요.”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그런 식사 문제는 내 개인의 여비로 충당하거나 아니면 사냥이나 낚시로 해결할 것이니까요.”
“어사님, 남쪽에 기근이 심한데 이거 호위무사들 때문에 더 심해질지도 모르겠군요.”
“허! 허! 딴은 그렇게 볼 수도 있군요.”
물론 그저 농담으로 나누지만 철씨 삼형제의 덩치는 워낙 크다보니 해보는 농담이다. 또한 남쪽의 기근이 그만큼 심해져 있다는 뜻이다.
명나라로는 매우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최인범은 황제의 음욕 때문에 골치 아프던 여러 가지 문제가 쉽게 해결되었다. 또한 조선에서는 경험하지 못할 사건들을 겪게 되었다.
천진의 대운하 선착장으로 가자 바지선과 비슷한 평평한 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인범은 관선을 관리하는 관리에서 신분의 인장을 보여주고 서류에 도장을 찍어 주며 말했다.
“우리가 계속 사용해도 되는 배는 몇 척이요?”
“첨도어사님, 감찰어사님께서 사용할 배를 포함해 일시에 사용하면 6척까지 가능하지만 계속 장기간 사용하시려면 3척까지입니다.”
“좋소. 그럼 3척만 사용하겠소.”
운하를 이용해 대운하의 끝인 남쪽까지 이동할 생각이다. 최인범은 많은 배들 중에 가장 큰 화물선을 선택했다. 그러자 장거웅이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어사님, 배가 너무 허술해 잠자리가 불편할 겁니다. 객선을 사용하심이 어떠한지요?”
“그대나 그렇게 하시오. 나는 사공이 많은 큰 화물선이 더 좋아 보이니 그것을 타고 가겠소.”
결국 여객선으로 이용되는 배 1척은 장거웅이 사용하고 화물선 1척은 최인범이 사용하기로 정해졌다. 화물선의 경우 사공이 4명으로 크기도 하지만 조금 빠르다. 나머지 화물선 1척은 흑혈풍을 비롯한 말 10필과 말의 먹이인 건초나 또는 밀과 콩들이 실렸다.
감찰어사인 장거웅도 호위무사로 하급군관과 종자 2명이 동행하고 있었다. 최인범의 신분인장에 12필까지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10명 정도의 하급군관이나 종자를 데리고 갈수 있다는 의미다.
조정에서 여비를 줬지만 지방의 관아인 부나 주 또는 현청으로 찾아가면 얼마든지 숙식은 제공 받게 된다.
화물선에 오른 최인범은 배위에 야전 소형 천막 2개를 쳐서 숙소를 만들었다. 천막을 쳐서 숙소를 만들고 나자 삼형제에게 지시했다.
“너희들은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 우선 노 젖는 방법부터 배워. 오래 가야하니 이번 기회에 배를 움직이는 방법을 배워두는 것도 좋지. 배에서도 무술은 익힐 수 있으니 계속 수련해.”
“넷!”
최인범은 일단 거처를 떠나면 거의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그렇게 하면 다소 귀찮기는 하지만 안전하고 또 경비도 절약된다. 그가 이렇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가끔은 날고기를 먹어야하기 때문이다.
날고기인 회를 잘 먹지 않는 명나라 사람들이라 그의 식습관을 이상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구태여 남의 시선을 의식해 그렇게 하고 있었다. 전에는 한복을 입었으나 이제는 평상복으로 명나라 복식을 입고 있었다.
천진을 떠나 대운하를 통해 남쪽으로 이동하던 최인범 일행은 드디어 산동성 서북부 대도시인 덕주에 도착하게 되었다.
대운하와 접한 대도시인 덕주(德州)는 하북 평원 남부에서 생산되는 콩, 땅콩, 밀, 면화, 과일, 옥수수 등의 농산물을 집산하는 내항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면직물이나 덕주 닭은 명산물이다.
선착장에 배들을 정박하고 나자 장거웅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첨도어사님, 덕주 관아로 가시지 않나요?”
이런 물음에 최인범은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당부했다.
“장 어사, 우리는 신분을 꼭 숨겨야 하는 암행감찰은 아니더라도 남의 비리를 캐야 하는 감찰업무를 수행하는 어사 신분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서로 혼한 호칭인 대인이라고 칭합시다.”
“아! 그렇군요.”
“나는 앞으로 특별히 관아에 협조를 구하는 일이 있으면 모를까 배에서 지내거나 여각에서 지낼 것이니 그렇게 아세요.”
“그렇다면 경비는 왜 저에게?”
“나야 벌면서 다닐 것이니 장 어사가 꼭 필요한 수사비로 쓰라는 것이니 그리 아세요.”
최인범이 벌면서 다닌다는 것은 물론 뛰어난 바둑 실력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작도 능숙하게 두니 숙박에 필요한 재물 정도야 얼마든지 마련할 방도가 있었다.
‘급하면 사냥이라도 하면 돼.’
이렇게 말하고 선착장 옆에 있는 화려해 보이는 산동여각으로 갔다.
산동여각에는 마작을 두는 손님들이 많았다. 기녀인 여자들도 많이 보이고 술손님들이 많았다. 남쪽은 기근으로 죽을 고생이라던데 이곳을 풍성 거렸다.
‘남쪽은 다 굶어 죽는다던데 여기는 너무 풍요롭군.’
내기바둑이야 상대방의 실력을 알아야 둘 수 있다. 그 때문에 최인범은 우선 마작 판에 끼어 소소한 은자를 거는 마작을 두었다.
그의 옆에는 항상 따라다니는 백두가 있었다. 삼형제는 배에서만 지내 몸이 근질 거리다고 해 말을 타고 인근 산으로 가서 사냥하기 위해 따로 떨어졌다.
처음에는 작은 내기로 마작을 두다가 점점 많은 돈을 따게 되자 판을 이리 저리 이동하며 즐겼다. 드디어 산동여각의 여자주인이 포함되어 두는 약간 판돈이 큰 마작 판으로 옮겼다.
30대 후반으로 화사한 비단 옷을 입은 여주인은 자기를 매랑이라고 소개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모두 뚱뚱한 체구인 40대의 상인들이다.
“내가 껴도 되겠습니까?”
“판돈만 있다면 얼마든지.”
마작 판에 끼어 여비도 조금씩 벌 요량이다. 또한 지역의 분위기나 지방 수령의 백성들의 평판을 듣기위해 여각에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하북에서 생산한 콩을 여기서 판매하는 장사를 해야 하는데. 관아의 사정은 어떤가요?”
“뭐 관아로 가서 은자를 듬뿍 찔러 주면 별 탈 없이 장사는 수월하게 될 거요.”
“그래서야 어디 이득금이 남나요?”
“그러면 덕주에서 장사하기가 어려울 것이요. 장사란 이득을 보기 위한 것이니 정이나 어려우면 조금 쉽게 버는 방법을 연구해 보시오.”
여기서 말하는 쉽게 버는 것은 품질이나 또는 부피 무게를 속여서 파는 방법을 말한다.
“관아에서 단속이 심하지 않나요?”
“그러니까 관아에 은자를 듬뿍 찔러 주라고 하지 않았소. 그런 방법도 묻는 것을 보아 처음으로 장사를 시작하려는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남쪽에 기근이 들려 콩 값이 대폭 올랐다고 해서 기회에 큰돈을 벌어보려고 가산을 정리해 콩과 밀을 사서 내려 왔지요.”
최인범은 마작을 두며 이런 대화 방법으로 이곳의 사정에 대해 염탐했다.
매랑은 마작을 두며 최인범이 매우 어수룩해 보이는지 계속 묘한 웃음을 흘렸다. 한창 마작을 두는 가운데 상인이 배가 출출한 것인지 점원에게 주문했다.
“너 가서 덕주 만두를 사와! 6인분으로.”
“예.”
잠시 뒤에 점원이 만두를 사오자 상인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만두를 1인분인 4개씩을 나누어주었다. 그러자 매랑은 ‘저는 살이 쪄서 만두 싫어해요.’하며 거절했다.
컹! 컹!
이때 만두를 보고 나자 백두가 크게 짖었다. 최인범은 백두가 배가 고파서 만두를 먹고 싶어 그런다 생각하고 만두 하나를 풀썩 던져 주었다.
크르릉. 크르릉.
백두는 만두에 코를 박아 냄새를 맡고 나서 앞발로 만두를 툭 차서 구석으로 밀쳤다. 백두가 이렇게 행동하는 경우가 처음이다. 훈련을 위해 마약이나 독약이 들어 있는 음식을 줄 때는 항상 물건은 그대로 두고 짖어서 자신의 의사를 나타낸다.
‘이놈이 배가 너무 불러 음식 타박을 하나?’
최인범은 이렇게 생각하고 만두를 손으로 들어 먹으려고 했다.
컹! 툭!
그러자 백구가 폴짝 뛰어 오르며 앞발로 입에 넣으려는 만두를 툭 쳐서 다시 구석으로 처박아 버렸다.
“어라! 백두! 왜 이래.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말이야 백두를 나무라는 표정을 지으며 핀잔했다. 하지만 남은 만두 2개를 슬며시 상인에게 밀어 주었다.
그러자 상인은 아무 이상이 없다는 듯이 만두를 맛나게 먹었다. 이런 것으로 보아 만두에 독이 들어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인범은 백두의 하는 행동이 너무 이상해 속으로 생각했다.
‘이상하군. 도대체 만두에 뭐가 들어서 이러지?’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 마작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동안 마작을 두어 딴 재물을 거의 대부분 털리고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집중을 못하기도 했지만 첫날 너무 많이 따면 경계하니 어차피 다시 토하고 갈 계획이었다.
“다음에 또 두죠.”
“그럽시다. 오늘은 일진이 좋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리고 아까 내가 한 말 명심해서 반드시 관아에 은자 좀 가져다주고 장사를 시작하시오.”
“그렇군요. 누구를 만나야 하죠?”
“그거야 잘 알아 봐야지. 그것까지 내가 직접 알려 줄 수는 없지 않소?”
이런 대답에 빙그레 웃고 뒤로돌아서서 백두가 구석으로 밀쳐 버린 만두를 집어 들었다.
“집으로 가져가 다른 개에게나 줘야겠군.”
뭔가 이상해 보이는 증거품이라 이런 핑계를 대로 만두를 가지고 산동여각에서 나왔다. 만두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할 생각이다.
같이 마작을 두던 산동여각의 여주인이 따라 나오며 은근하게 추파를 던지며 말을 걸었다.
“관아에 줄을 댈 생각이 있으면 나에게 말해요.”
“그렇군요. 얼마나 줘야 되는 거요?”
“가지고 온 물건이 얼마나 되는데요?”
“콩이 배로 한척이요. 200가마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구전을 포함해 콩 20가마만 내놓으면 되겠어.”
“예? 1할을 줘야 된다고요?”
최인범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매랑은 그런 수량을 가지고 뭐 그리 놀라느냐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