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전설에 불과하지만 뭔가 깊은 뜻이 숨어 있다고 판단했다.
여진족 족장들이 소지해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 보이던 반월도다. 드디어 반월도가 모이면 큰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다고 하는지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만약 야사에서 전해지는 전설이 사실이면 많은 재물이 숨겨진 보물지도나 또는 거대한 금광이 있는 위치를 알리는 지도가 틀림없어.’
최인범은 서고에서 중요한 사실을 알아내고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순과 친해졌다. 자순은 가난한 요동의 학자 가문출신으로 아주 어려서 개에게 급소를 물려 고자가 되자 환관이 되었다고 했다.
“전에는 그 개가 너무 원망스럽고 내 신세를 한탄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고마워합니다. 그 개 덕분에 일반인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고대 역사를 알려주는 서책도 마음대로보고 학문도 계속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군요.”
자신의 불행을 행복이라고 바꾼 성품으로 보아 상당한 학문을 성취한 사람으로 보였다. 환관이면 대부분 요상하게 행동하며 못된 간신 짓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자순을 만나고 나자 조금 변했다.
‘사람을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면 안 돼.’
전에 이세창도 그렇고 자순도 자신이 처음 본 인상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있었다.
황제를 만날 시간이 다가오자 자순은 급하게 최인범을 건청궁으로 안내했다.
최인범은 두 번째 만나게 되는 황제라 전보다는 조금 덜 긴장했다.
옥좌에 앉은 황제는 매우 피곤한 얼굴로 최인범에게 물었다.
“영파를 가고 싶다고?”
“예!”
“그럼, 영파로 가면서 짐이 지시한 업무를 수행해도 되겠군.”
마적을 물리쳐 잘했다는 칭찬도 안했다. 또한 타타르 부족장을 만나 벌였던 사건들에 대해서도 질문이 전혀 없었다. 그저 빨리 어디론가 가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저 자식! 후궁을 여럿이나 새로 들이더니 아마 그 짓하기에 너무 바쁜 모양이군.’
잠을 자지 못해 졸음이 밀려오는 황제의 눈가에 검은 기운이 심하게 보였다. 그것으로 보아 양귀비나 또는 다른 마약을 처먹고 너무 심하게 방사를 벌인 것이 틀림없었다.
황제는 졸린 눈으로 명령했다.
“그만 물러가라.”
“예.”
별로 잘나 보이지 않는 황제를 만나고 칭찬 한마디 듣지 못했다. 그저 남쪽으로 가라는 명령만 듣고 건청궁을 급하게 나왔다. 전과 달리 뭐를 하사하지도 않자 다소 이상했다.
‘어라? 이번에는 뭐를 주지도 않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건천궁 밖으로 나와 서성였다.
이때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자순이 급하게 다가와 비단으로 싼 커다란 보자기를 건네주었다.
“이건 뭐죠?”
“첨도어사님, 새로 만든 신분을 나타내는 인장, 교지, 영조척 2개, 관복 2벌 그리고 여비인 은자입니다. 첨도어사로의 승차를 진심으로 감축 드립니다.”
“고맙소.”
신분을 나타내는 인장을 살펴보니 2두 마패를 약간 본 따서 둥그렇게 만든 주먹만 한 철제 도장이다. 말 12필과 배 4척이 아주 작게 새겨져 있었다.
마패는 조선과 비슷하게 역참에서 말을 12필까지 사용할 수 있다. 또한 대운하를 지나거나 큰 강을 도강할 때 관선을 4척까지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교지를 읽어보니 도찰원 소속인 정5품으로 수 순행첨도어사(守 巡行僉道御使)다. 수직(守職)은 품계는 낮으나 직책은 높은 경우 붙이는 명칭이다.
첨도어사는 정4품으로 도찰원의 보과관이라 이렇게 표기한 것이다. 감찰업무를 수행하며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곳으로 황하 남쪽의 동해안 지역이다.
또한 교지에는 최인범을 무관직인 오호도독부의 경력사를 겸직시켰다. 품계는 높고 직위가 낮은 행직(行織)인 행 순행경력사(行巡行經歷司)라고 적혀 있었다. 경력사는 종5품이라 이렇게 적힌 것이다.
황제는 최인범에게 순행첨도어사의 업무를 수행하다가 필요한 경우 군사들의 사용이 가능했다. 직접 지방에 주둔해 있는 명나라의 군대 500명 정도를 독자적으로 지휘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물론 지방의 도독과 협조하면 더 많은 병력을 지휘할 수도 있는 직책을 부여했다.
‘너무 이상하네. 왜 군대를 직접 지휘하는 직책도 겸직시키는 거지?’
자기가 원하는 그대로 여행허가증을 받았지만 무조건 좋지만은 않았다. 품계를 높이고 많은 권한을 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거나 또는 감찰 업무를 도와줄 관리인 정7품 감찰어사가 2명이나 딸린 것이다.
‘에이, 혹이 딸려서 좋다가 말았네.’
자금성에서 나와 오문에서 부하인 감찰어사를 만났다.
“첨도어사님, 저희들이 옆에서 수행할 어사들입니다.”
“반갑소. 앞으로 잘해 봅시다.”
모두 30대 후반으로 인상을 보니 깡마른 장거웅은 강직해 보인다. 다소 뚱뚱한 엄사봉은 탐욕스럽게 느껴졌다. 더구나 엄사봉은 어린 나이인 조선출신이 자신의 상관이라는 것이 너무 불만이라는 듯이 힐끗거리는 눈매가 곱지 못했다.
‘저 놈은 아무래도 엄숭의 사주를 받은 끄나풀 같군.’
엄숭은 그런 정도의 힘을 지녔다. 그 때문이고 성이 같아 이렇게 판단했다. 조선도 그렇지만 명나라의 경우 씨족들이 뭉치는 경우가 많았다. 집안에 고위직인 관료가 생기면 하급 관료를 자신의 친인척을 등용시키는 것은 관례로 되어 있었다.
지방의 관직도 조선에서 아전들이 세습하듯이 세습하는 체제라 그런 경향은 더욱 심했다.
최인범은 그들이 어차피 자신의 행적을 조정에 따로 보고할 것이라 정확하게 밝혀 버렸다.
“나는 바로 천진의 발해 여각으로 갔다가 산해관으로 올라가서 볼일을 보고 떠날 거요. 다시 천진으로 가서 대운하를 통해 남쪽으로 내려갈 생각인데 그대들은 어찌 움직이겠소?”
일정을 듣자 장거웅은 즉시 답했다.
“어사님, 우리도 같이 움직여야 되죠.”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네. 감찰어사의 업무는 각자 독자적으로 수행해도 되니 둘은 먼저 떠나도록 하지.”
이런 지시에 엄사봉은 얼굴이 환해지며 급하게 인사했다.
“그럼 저는 산동성으로 가보겠습니다.”
엄사봉은 뭐가 그리 바뿐지 서둘러 오문을 떠나고 있었다. 그러나 장거웅은 그대로 남아 조심스럽게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엄 어사가 산동성으로 갔으니 저는 첨도어사님을 따라다니겠습니다. 천진으로 가신다니 저 먼저 천진으로 가서 대운하에서 배를 알아보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오.”
최인범은 자신도 공범이 되어버린 이세창의 행방이 궁금해 물었다.
“이번에 나와 같이 호위업무를 수행하던 이세창 장군은 지금 어디로 갔습니까?”
“아, 그분은 한 단계 승차해서 정5품인 정천호가 되어 산동성으로 떠났습니다. 정확한 발령지는 잘 모르고요.”
“그렇군요.”
정천호는 1000명 정도를 지휘하는 부대장으로 위지휘사사 밑에서 소를 관장하는 무관이다.
수도인 북경에서 그래도 멀리 떨어진 산동성으로 떠났다니 우선은 안심이다. 그저 스치는 인연이었지만 휘향 공주가 잘 살기를 원했다. 그녀의 행적이 밝혀지면 자신도 피해를 보게 되니 걱정하고 있었다.
‘조용히 살아야 하는데.’
감시자에 해당하는 감찰어사들이 옆에서 졸졸 따라다니는 형태가 아니라 천만다행이다. 장거웅도 오문에서 떠나자 최인범은 말을 타고 서둘러 천진으로 가게 되었다.
그가 천진으로 향하는 동시에 하늘에서 많은 비가 내렸다.
쏴아아! 쏴아아!
이제 한여름이고 비가 자주 내리는 장마철이다. 매섭게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말을 빠르게 달려 드디어 발해여각에 도착했다.
와글와글.
양산봉은 비에 젖어 들어오는 최인범을 보자 고개를 깊숙하게 숙이며 인사했다.
“대인, 어서 오세요. 비를 맞으셨네요.”
“말을 타고 급하게 오느라고.”
여각 안으로 들어가자 손님들이 가득했다. 바둑이나 마작을 두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 음식을 먹은 사람도 많았다.
옆에서 서성이고 있는 지배인인 양산봉에게 물었다.
“장사가 잘 되는군.”
“그렇습니다. 새로 오게 된 여자들이 신기하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군.”
북경에는 가끔 보지만 파란 눈이나 갈색 머리인 여자들을 보자 신기해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녀들이 만드는 새로운 음식들도 맛이 좋아 손님이 늘었다.
여각의 옆에 있는 저택으로 가자 먼저 도착한 소피아와 세 형제들이 보였다. 그리고 타타르 여자들을 포함해 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땅바닥에 엎어져 인사하고 있었다. 조선식의 인사 방법이다.
“새삼스럽게 큰 절은 하고 그래.”
소피아가 먼저 일어나며 응수했다.
“아닙니다. 주인님께서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이리해야죠.”
그녀의 옆에는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왕미령은 약간 주눅이 든 표정이다. 옆에 서서 최인범의 눈치를 슬슬 보고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불과 이틀도 안 된 사이에 소피아가 여각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 틀림없었다.
‘완전히 기세에서 밀렸구먼.’
소피아는 키가 크고 성품도 매우 거칠다. 더구나 휘하에 무술을 하는 여자 전사들을 데리고 있다. 많은 재물을 지니고 왔으니 쉽게 여각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저택은 외부건물 형태는 전과 같지만 내부 장식은 조선식과 타타르 부족의 생활 모습으로 많이 바뀌어 있었다. 자신이 쓰게 되는 안방으로 들어오자 옆에서 옷을 챙겨주는 왕미령에게 권했다.
“너는 앞으로 산해관에서 살아.”
“산해관요?”
“그래, 그곳에도 여각과 전당포를 개설할 생각이니 그곳으로 이사해.”
“알았어요.”
갑자기 들이닥친 요상하게 생긴 외국여자에게 발해여각의 실권을 빼앗긴 왕미령은 최인범의 지시에 속으로 환호성을 토했다. 그녀는 산해관으로 가면 점점 조선과 가까워지니 나중에 자신을 조선으로 데리고 갈 확률이 높아진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가서 지배인인 양산봉도 부르고 소피아와 주방장도 모두 불러 와!”
“예.”
조금 뒤에 소피아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모이자 최인범은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산해관에 여각과 전당포를 새로 만들거니 양산봉도 그리 가고 전에 있던 주방장도 그곳으로 가도록 해.”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런데 언제 떠나죠?”
“나는 왕미령과 같이 내일 아침에 떠나니까 다른 사람은 이사를 준비해서 모래는 산해관에 도착하도록 해.”
오래 고심하던 최인범은 드디어 왕미령을 품안에 거두기로 결심하고 이런 지시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