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어떤 여자는 다리를 절거나 또는 팔에 붕대를 감거나 또는 병든 기색을 보였다.
그것으로 안심이 안 된 여자들은 위장까지 했다. 소피아처럼 얼굴에 흉터 자국을 만들거나 한쪽 눈에 풀을 붙여 짝눈이 되도록 철저하게 위장했다.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한 위장술들이 보통은 넘었다.
일일이 얼굴을 확인한 환관은 먼저 거용관을 떠나며 최인범에게 전달했다.
“감찰어사, 폐하께서 속히 자금성으로 들어오라는 명령이니 내일 모래 아침 일찍 오문으로 찾아오시오.”
“알겠습니다.”
동창 소속인 환관들은 가마에 20명의 후궁이나 시녀로 선발된 여자들을 데리고 북경으로 떠났다.
그들이 거용관으로 떠나고 나자 그제야 타타르 여자와 혼인한 병사들에게 아랍종인 말들이 주어졌다.
말 등에 신부를 태우고 떠나는 병사들은 다들 최인범에게 인사했다.
“어사님, 다음에 꼭 찾아뵙죠.”
“그럴 것까지 없어. 신혼이니 신부에게 특별히 더 잘해주고 새로운 임지로 가서 근무나 잘해.”
“넷!”
홍성철과 장주한은 북경에서 해야 할 임무가 이미 주어진 상황이라 왕담보와 같이 북경으로 떠났다. 그들이 떠나고 나자 최인범은 소피아에게 지시했다.
“남은 아랍 말 40필을 가지고 천진으로 가서 기다려. 철씨 형제도 데리고 가고.”
“알았어요.”
최인범은 이제 홀가분한 상태다.
북경으로 들어와 만리 상단의 양유승 집으로 찾아갔다. 그에게 부탁도 하고 전에 그에게 넘겨준 발해여각을 돌려받기 위해서다.
대저택의 거실에서 양유승과 바둑을 두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미 전에 약속한 바가 있으니 발해여각에 대한 소유권을 요구했다.
“이제 소유권을 넘겨받아야겠네요.”
“어사님, 당연히 그래야죠. 어사님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번에 북쪽으로 가서도 마적 떼로 소탕하고 타타르 족과도 잘 협상해서 큰 공을 세우시고.”
“우연히 그렇게 된 거죠.”
“내일 황궁으로 들어가시면 황제 폐하께서 어사님을 반드시 몇 단계 정도를 승차하게 될 겁니다. 진심으로 감축 드립니다.”
양유승의 덕담에 최인범은 난처한 표정으로 지으며 응수했다.
“사실 그런 문제 때문에 은근히 걱정되어 양 대인을 찾아 왔습니다. 조선인인 제가 명나라에서 계속 벼슬하기도 그렇습니다. 저는 남쪽을 여행할 생각이라 또다시 승차하게 생겨 버겁기만 해요.”
최인범의 말에 양유승은 고개를 저으며 응수했다.
“어사님, 그거야 무슨 상관이 있나요. 어떤 관청에서 근무하는 것도 아니고요.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며 잠시 부조리한 상황을 목격하면 그것만 시정하는 조치만 내려주면 되는 직책인데요.”
“공직에 있으면 이것저것 걸리는 부분이 너무 많지요. 그래서 조금 홀가분하게 벼슬을 물러나는 것이 좋아 보여 찾아 왔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양유승은 빙그레 웃으며 답해 주었다.
“어사님, 전처럼 국자감이나 유생들을 동원해 벼슬 오르는 일을 반대하게 해달라고요?”
“그렇습니다.”
“어사님, 그건 정말 어렵겠네요. 어사께서 이미 국자감의 학생이나 유생들 사이에 인기가 너무 좋아 전에 사용하던 방법을 쓸 수는 없어요. 그러니 그저 폐하께서 도찰원의 벼슬을 내리시면 그냥 받아들이세요.”
명나라가 잘되길 바라는 양유승은 최인범이 반드시 필요한 인물로 판단했다.
조선 출신이지만 골치가 아프던 타타르 족과 대결을 벌여 승리했다. 그결과 많은 여자와 말을 가지고 돌아온 사실은 매우 높이 평가했다.
더구나 북쪽에서 수시로 떼를 지어 강도짓을 벌이던 여진족인 마적들까지 일거에 소탕했다. 그러니 최인범을 완전히 명나라에서 영원히 살도록 정착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슬며시 권했다.
“어사님, 조선의 벼슬도 낮은데 이참에 국적을 바꾸는 것이.”
“그건 안 됩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조선으로 반드시 돌아가야 합니다.”
양유승은 몇 번 더 귀화하길 권하다가 워낙 완강하게 거절하자 포기했다. 그러나 외국인이라도 명나라에 큰 도움이 되자 적극적으로 돕고 싶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지난 일들에 대해 설명했다.
“어사님, 전에 폐하께서 어사님을 남쪽으로 보낸다고 하다가 갑자기 북쪽으로 행선지가 변경된 것은 엄숭의 농간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죠?”
“엄숭은 동해안의 염전 사업에서 큰 문제를 계속해서 일으키고 있어요. 이런 사실은 폐하는 전혀 모르고 있고요. 그것이 들통 날까 염려해 어사님을 북쪽으로 보낸 것이죠.”
“그렇군요.”
“엄숭 일당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알았어요. 매사 조심하죠.”
엄숭은 염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살피려는 황제의 의도에 교묘한 방법으로 피해 버렸다. 이제 그곳으로 가더라도 쉽게 비리를 캐내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에 와서 때늦게 순행어사의 업무를 수행하려면 머리가 아플 수 있었다. 어찌 되었던 임무를 부여 받으면 수행하는 척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염전을 뒤져봐도 이미 대비해 놓았을 것이니 비리를 캐기도 쉽지 않겠네요.”
“그야 그렇겠죠. 하지만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이 있어요?”
최인범의 물음에 양유승은 보다 자세하게 설명했다.
“어사님, 이번에 폐하께서 동해안을 순행하는 감찰어사로 임명한다는 소식이니 그냥 받아들이세요. 제가 염전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필요한 정보는 미리 수집해 두었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임무를 받아도 수행이 가능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어사님께서는 현지로 직접 가서 사실인지 확인만 하시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시고 여유 있게 여행을 다니시면 됩니다.”
“엄숭이 부정한 일을 저지른 자료가 있다고요?”
“예, 너무 큰 문제지만 최 어사님이라면 쉽다면 쉽게 해결이 가능한 사건입니다.”
“알았어요. 그렇다면 양 대인 말처럼 순행감찰어사로 임명되면 가는 길에 확인해 보도록 하죠. 그 대신 양 대인이 나서서 제가 천진과 산해관에서 전당포를 열게 주선해주세요.”
이런 요구에 양유승은 손을 저으며 답했다.
“어사님, 그런 사소한 일을 저에게 뭐 하러 부탁해요. 그런 정도는 그냥 가셔서 개업하시면 됩니다. 천진이나 산해관의 관리들은 다들 최 어사께서 이루신 공로를 잘 알고 있어요. 그 때문에 관료들이 전당포 허가를 미루거나 못한다고 시비 걸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가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양 대인께서 그쪽 관아에 미리 손을 써 주세요.”
“알겠습니다. 제가 인편을 보내 손을 써놓도록 하죠.”
양유승과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누며 바둑을 두었다.
최인범은 양유승으로부터 동해안의 염전에 대한 많은 자료를 넘겨 받았다. 아직은 읽어 보지 않아 모르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다음날이 되자 최인범은 아침 일찍 자금성으로 가게 되었다. 전과 같이 환관이 자금성의 남문인 오문(午門)으로 마중 나와 있었다.
두 번째 들어와 보는 자금성이라 처음과는 다르게 위암감은 조금 줄어들었다.
‘그래도 거창하기는 해.’
이번에 오문으로 마중 나온 환관은 의외로 젊고 재기가 넘쳐 보였다. 전에 마중 나온 환관은 인상이 다소 음험해 보이더니 전혀 달랐다.
“어사님, 일찍 오셨군요. 폐하를 만나려면 조금 기다려야 하니 소인을 따라 어디 좀 가시죠.”
“그럽시다. 저도 자금성을 구경하고 싶군요.”
환관은 길을 안내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황제의 옆을 지키는 말단환관이지만 주로 서고에서 책을 관리하는 업무를 보고 있다고 했다.
자순(自順)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환관은 최인범을 데리고 많은 건물들을 지나 드디어 서고에 도착했다. 그는 많은 책들이 보관된 서고에서 최인범이 쓴 구운몽과 양반전을 수북하게 꺼내 놓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어사님, 제가 어사께서 과시를 보며 답안으로 작성한 소설을 보고 필사해 만든 서책들이옵니다. 그러니 직접 확인해 보시고 신분패인 마패를 찍어 주세요.”
“이런 것이 필요한가요?”
“예! 직접 수결도 해주시면 더욱 영광이고요. 후손에게 물려 대대로 가보로 남기고 싶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남겨 놔야 하고요.”
이런 부탁을 받자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취중에 쓴 소설 내용을 알고 싶어 탁자에 앉아 빠르게 읽었다. 읽고 나서 마패를 찍어 주려니 문뜩 저작권 생각이 났다.
‘이거 저작권료도 한 푼 없이 도장을 찍어 줘야 하나?’
물론 객쩍은 생각에 불과했다. 본인이 써서 그런지 모르지만 빠르게 두 권의 책을 읽어보고 내용이 다르지 않자 2두 마패를 찍어 주었다. 수결은 사인이라 최인범은 휘날리는 초서로 범(汎)이라고 써주었다.
그러자 자순(自順)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인덕을 널리 퍼트릴 좋은 이름이군요.”
“그런가요?”
자순은 서고에 들어 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들추며 소개했다.
“여기에는 고구려나 고려 그리고 조선이나 금나라의 서적들도 많습니다. 제가 필사한 서책들이 집에도 많으니 필요하시면 발해 여각으로 보내드리죠.”
“그래도 되나요?”
“예, 인쇄본도 있으니 보내 드리지요.”
최인범은 혹시 하는 마음에 여진족이 지니고 있던 반월도에 대해 물었다.
“금나라 역사서를 많이 읽으셨으면 혹시 작은 보석이 박힌 반월도에 대해 아시나요? 건주여진의 족장은 그것을 매우 귀하게 여기던데요.”
“아하, 어사께서도 그 반월도를 보셨나 보군요. 그 반월도는 본시 금나라 시절에 제작해 황제의 측근들에게 하사한 물건입니다.”
“그런 유래가 있는 반월도군요.”
“어사님, 반월도는 본래 원형이었으나 그것을 12개로 나누어 반월도로 제작했습니다. 야사인 전설에는 금나라가 망할 무렵에 중원을 차지하고 얻은 많은 보물을 숨겨 놓은 지도가 나타난다고는 합니다.”
전에 설화에게 듣지 못한 사실을 처음으로 듣자 매우 놀랐다.
“보물 지도요?”
“그렇습니다. 조각이 나버린 반월도 12개가 모두 모이면 보물이 묻혀있는 장소를 알 수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런 소문이야 그냥 여진족들 사이에 떠도는 전설 같은 이야기에 불과하죠.”
“그렇군요.”
그저 흘리듯이 답하는 최인범은 이런 전설과 같은 이야기에 속으로 매우 좋아했다.
‘오라, 그런 중요한 비밀이 숨어있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