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휘향 공주는 짧은 기간의 만남이지만 헤어지기 전에 얼굴이라도 자주 보고 싶었다.
이미 최인범의 마음은 평정심을 찾았다는 것을 모르니 더욱 애가 탔다. 전장을 모두 깔끔하게 정리하고 호위부대는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분명 저분도 날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그 사이에 마음이 변했나?’
인간사는 이래서 한치 앞을 모르는 법이다.
드디어 하루 종일 이동하자 먼저 떠난 이세충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세충은 이미 기마병이 먼저 와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보고해 알고 있었다.
많은 마적을 죽이고 승리를 거두자 그제야 후회했다. 명령에 따라 같이 이동했다면 자신도 공적을 세울 기회였으나 자신은 적을 놔두고 도망친 격이 되어 버려 큰일이 터진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조정으로 그대로 알려지면 문책을 받게 생겼다.
문책을 받을까 두려워진 이세충은 조심스럽게 최인범에게 다가와 물었다.
“어사님, 장계를 이미 올렸다고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말을 안전하게 타타르 부족에게 보내기 위해 먼저 떠나라고 해서 현장에 없었다고 적었으니까요.”
“아, 그렇게 적어 보냈다니 안심입니다.”
위험하다 싶으니 말을 운반한다는 핑계로 몸을 피해버린 소행이야 괘씸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일로 굳이 명나라까지 와서 적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세충이 옆에 없었기 때문에 단독으로 여진족을 공격하는 방법을 쓸 수가 있었다. 그가 있었다면 오히려 방해만 됐을 것이다. 그 바람에 어쩌면 꼭 필요한 반월도도 획득하고 많은 재물도 혼자서 독식할 수 있었다.
‘나야 충분히 보상을 받은 상황이니 남의 허물을 들출 필요야 없어.’
조선인이고 나이가 적으며 직급이 자신보다 낮다는 이유로 조금 거만하게 굴던 이세충은 이후 완전히 최인범의 수족으로 변했다.
수시로 옆으로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어사님,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 하명만해주세요. 제가 분골쇄신해 반드시 구해서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최인범은 농담으로 한마디 던졌다.
“내가 여자가 필요해도 구할 수 있어요?”
“그야 물론 가능합니다.”
“뭐요? 어떤 여자를 이런 초원에서 구한다는 거요?”
이세충은 그런 물음에 누구라고 말로 지목하지는 않고 휘향 공주가 탄 가마를 눈짓으로 지목했다. 아마도 휘향 공주와 같이 가는 시녀를 지목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긴 어떤 깊은 사랑이 있어서 접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잠시 스치는 정도라면 시녀들도 적당한 상대가 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과 달리 뜨거웠던 마음이 졸지에 식어버린 최인범은 지금에 와서 휘향 공주를 살펴보니 별로다. 사실 단순하게 미모로만 보면 시녀들이 더욱 예쁘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인범은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녀들도 잉첩으로 가는 것이 아니요?”
“그야 그렇지만 20명이나 되니 몇 명은 뒤로 빼돌려도 됩니다.”
“그런 일이 가능해요?”
“예, 이동하다가 중간에서 죽었다고 보고하면 됩니다.”
“뭐요? 못하는 소리가 없군.”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것으로 보아 후환의 걱정이 없는 것 같았다. 사실 타타르 부족은 휘향 공주를 신부로 맞아하면 멀리 서쪽의 우랄 산맥 쪽으로 이동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니 조정에서 시녀 몇 명이 중간에 죽어서 사라졌다고 해서 확인하거나 소식을 전할 사람도 없었다. 더구나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사람이야 전혀 없었다.
더구나 마적에게 공격을 당해 전투 중에 사망했다고 보고하면 된다. 충분히 속일 수 있는 여건도 있어 이세충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어사님, 누가 좋은지 지목만 하시죠. 그럼 제가 방법은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냥 농담으로 한 말입니다.”
이세충은 사실 휘향 공주를 몽골족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뭔가 술수를 부리려고 고심하는 중이다. 자신이 계획한 방법은 스스로 실행하기는 어렵지만 먼 조선에서 온 최인범이라면 가능한 계책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슬며시 시녀들이라도 취하라고 권했다. 그런 전초 작업이 끝나면 그것을 기화로 다른 계획을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내용도 모르는 최인범은 굳이 시녀를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옆에서 따라다니는 두 부하가 듣고 있으며 눈을 빛내며 강한 욕구를 보이자 말했다.
“이렇게 하죠. 타타르 족을 만나면 그 부족에도 여자가 있을 것이니 거기에서 여자를 두어 명 구해 보는 것이 더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주선해보죠.”
강하게 치밀던 욕정이야 이미 안개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호랑이도 잡아서 피도 마시고 또한 많은 마적을 죽이는 바람에 해소되어 버렸다. 어떤 부류는 살인하거나 전투나 사냥을 하면 그에 상응해서 심하게 욕정이 치밀기도 한다.
그러나 최인범의 경우는 두 충동이 마치 수평저울 같이 한쪽이 강해지면 한쪽은 약해지는 형태로 나타났다.
부하들이나 자신이 몇 년은 명나라에서 보낼 생각이라 두 부하들을 보며 지시했다.
“너희들 타타르 족을 만나면 장가를 보내줄 생각이니 여자를 잘 선택해. 나중에 공연히 조선 여자와 혼인을 못하게 됐다고 후회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드디어 주변에 산은 보이지 않고 끝없이 초원이 펼쳐지는 대지에 도착했다. 초원의 한가운데에 거대한 파오가 보이고 그 주변으로 많은 작은 파오들도 보였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홍성철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사님, 타타르 부족이 여기까지 마중을 나온 모양입니다.”
“아니야. 저들은 그냥 저곳이 그들이 사는 집이지. 따로 근거지가 있는 것이 아니야. 물론 본래 그들이 살던 지역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상당히 멀어.”
“그렇군요.”
타타르 족은 본시 멀리 서쪽인 중앙아시아에서 살던 유목민과 몽골족이 합쳐져 이루어진 부족이다. 그들이 우랄 산맥 근처에서 살다가 동쪽으로 이동했다. 이동한 이유는 자신들과 조금 다른 오스만 제국이 팽창했기 때문이다. 세력으로 밀려서 다시 몽골 땅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시아와 유럽을 이어주는 지역에서 살던 타타르 부족이라 그런지 약간은 몽골(북원) 족과는 약간 다르다. 하는 행동이나 사는 풍습들도 약간 달라 보였다.
제일 큰 특징은 일부 사람들은 피부색이 몽골 족보다 더욱 검거나 아니면 하얗게 보여 백인들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다양한 인종이 모인 부족이군.’
대부분 검은 머리지만 개중에 노란머리나 혹은 갈색도 보이고 눈동자가 파란 사람들도 보였다. 완전히 동서양인이 혼혈을 이루는 집단이었다.
타타르 족을 만나자 일단 제일 먼저 하게 된 것은 조선이 동여진에서 구입해 명나라로 보내 다시 이곳으로 운반한 2000필의 군마 인수인계 업무다.
좁은 통로를 통해 주판알과 비슷한 기구를 이용해 말의 수를 세어 넘겨졌다. 세다가 보니 2000필이 넘어서자 나머지는 더 이상 넘기지 않았다.
분명 거용관에서 2000필을 인수해 왔으니 말의 수가 100필이 늘었다. 그 이유는 여진족인 마적들이 버리고 간 말들이 밤에 슬며시 합류했기 때문이다.
이세충은 고지식한 외모와는 달리 능숙하게 설명했다.
“혹시 이동 중에 죽은 말이 있을 수 있어 여유롭게 가져온 것이오.”
“그렇습니까? 아주 철두철미하시군요.”
“중요한 협상이니 실수가 없어야죠.”
인수인계 서류에 서로 서명해서 군마의 인수인계는 모두 끝났다. 이제는 휘향 공주의 결혼식만 참관하고 떠나면 된다. 하지만 결혼식에 앞서 축제가 열려 결국 참석하게 되었다.
타타르 부족장은 60대로 보이는 노인이다. 그는 자신 옆에 많은 부인을 거느리고 앉아 술과 고기를 먹고 있었다. 주변에는 많은 자녀들도 같이 있었다.
와글 와글
최인범은 늙고 병든 부족장에게 굽실거리고 옆에 앉아 있기가 싫었다.
중요한 외교라고 하지만 사실 자신과는 무관했다. 그저 명나라와 조선 사이가 이상하게 변하는 일만 벌어지지 않으면 족했다. 그래서 조금 떨어진 구석에서 두 부하들과 앉아 있었다.
“소대장님, 왜 상석으로 가지 않고.”
“여기가 편하잖아.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그건 그러네요.”
명나라의 외교술에 그저 마지못해 협조하는 처지로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타타르 부족장에게 고개 숙이기도 싫었다. 타타르 족을 만나고 나서는 모든 업무는 이세충에게 떠넘겼다.
축제는 음주가무가 기본이지만 타타르 족의 축제에는 마상 무술대회가 열렸다. 보아하니 새로 명나라에서 온 여자들을 두고 다투어 우승자에게 족장이 여자를 하사하는 형태다.
그러자 이세충이 슬며시 족장에게 제안했다.
“우리 명나라만 여자를 내놓은 것은 너무 불공평하니 그대들도 여자를 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많은 군마를 많이 차지해서 그런지 타타르 부족장은 환하게 웃음을 흘리며 가볍게 응수했다.
“좋소, 그대들도 공주를 내어 놓았으니 나도 내 딸을 상으로 내어 놓겠소. 그리고 미녀들을 20명 골라서 별도로 내놓을 것이니 자신이 있으면 대회에 나와 보시오. 20명의 마상무술을 겨루어 승리한 용사에게 주기로 하고 20명은 격투기를 벌여 승리한 용사에게 상으로 줍시다.”
“와!”
“와!”
부족장이 이런 발표를 하자 타타르 부족의 청년들은 괴성을 지르며 다들 좋아했다. 부족장의 제안은 타타르를 물론 명나라 군사들도 얼마든지 무술 대회에 참석해도 된다는 뜻이다. 모두 40명으로 늘어난 여자들을 상금으로 탈 수 있는 대회를 연다는 뜻이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참석하려는 청년들이 많으니 여자를 먼저 선보이면 마음에 드는 남자들이 앞으로 나서서 참여하는 방식이다.
한번 탈락하면 두 번의 기회가 없는 형태다.
‘묘하게 충성심을 유발시키는 방법이군.’
자신이 보기에는 별 볼 일 없는 부족이다. 하지만 큰 무리를 이루는 경우 특별한 통치술은 있었다.
최인범은 자신도 비슷한 방법을 한 번 써먹고 싶었다.
‘총각에게 장가 보내주는 것 보다 더 큰 선물은 없어.’
마상무술대화 진행 방식은 아주 간단했다.
말을 타고 일정한 구간을 달리며 10개의 표적에 5개 이상의 화살을 명중시키고 마지막에는 가죽과 건초로 만든 10개의 허수아비를 지나가면서 5개를 베어 넘기고 제일 먼저 도착하는 용사인 1등과 2등이 승리자다.
최인범은 옆에서 관심을 표하는 두 부하에게 명령했다.
“너희들도 생각이 있으면 알아서 참석해.”
“넷!”
타타르 부족은 어떤 일정한 규칙에 의해 참석하는 형태다. 명나라 군사들은 본인이 원하면 참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급군졸들은 처음 시행되는 광경을 보자 다들 혀를 내두르며 참석하길 꺼렸다.
말을 몰고 달리며 화살을 날려 10개의 표적에 5번 이상을 모두 성공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자칫하면 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지게 생겼기 때문에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