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휘향 공주는 시녀들의 부측을 받아 서둘러 망루에서 내려왔다. 더 그곳에 있다가 보면 자신의 신세가 너무 억울해 폴짝 뛰어내려 죽게 생겼다.
‘살고 싶지 않아.’
힘없이 먼저 망루에서 내려가는 휘향 공주의 뒷모습 바라보는 최인범은 망루에서 한숨을 토했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하필이면 남의 나라로 시집가는 공주를 여기서 만나다니.”
자신이 호위무관으로 정해지지만 않고 공주를 만났다면 납치라도 해서 조선으로 빼돌리기라도 하련만 그 짓도 못하게 생겼으니 참으로 고약한 인연이다.
조선에서는 부마도위가 싫다고 그렇게 피했는데 이곳 명나라로 와서는 얼굴 한번 보고 단 한 번에 공주에게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휴우! 내가 이러다 큰 사고를 치지.”
최인범은 문뜩 자신이 스스로 무거운 족쇄를 채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일부러 채운 족쇄가 아니고 스스로 깊은 사랑의 늪에 빠져 버린 것이다.
첫눈에 반한다더니 참으로 고약하게 그런 일이 자신에게 실제로 벌어졌다.
‘이게 내 운명인가?’
도저히 어찌 해볼 수 없는 여자에게 순간적으로 마음을 주고 말았으니 정말 큰일이다.
그래서 냉정하게 이성을 찾자는 생각으로 멀리 만주에서 자길 기다릴 설화를 떠올렸다. 하지만 설화의 고운 얼굴도 이제는 가물가물 했다.
오직 슬픈 표정을 보이던 휘향 공주의 얼굴만 가득 떠오르고 있었다. 여자의 우수에 찬 미모는 아주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망루에서 내려오자 이세충이 급하게 다가와 물었다.
“어사, 몽골로 가져갈 말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겠소?”
“예? 그것을 제가 확인해야 되나요?”
“꼭 확인할 필요는 없지만 어사가 확인서를 발급해 줘야 거용관에서 먼저 내보내죠.”
“아, 그런가요. 그럼 확인하러 가죠.”
이런 간단한 대화로 최인범은 휘향 공주의 호위 책임은 모두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예물로 가지고 가는 군마도 자신이 책임진다는 것도 알았다.
‘책임자는 골치만 아픈데.’
가볍게 여행 삼아 다녀오려던 몽골로 가는 길이 정말 짜증이 만발했다. 그동안 별로 생각하지 않던 부처님이나 하느님이나 조상님도 원망스럽기만 했다.
‘신이여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머릿속에 온통 휘향 공주의 얼굴만 떠오른다. 그래서 군마들이 모인 곳에 가서도 그저 멍한 시선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사!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오?”
“아니오! 어서 말이나 점검 하시오.”
호위 병사가 500명이지만 300명은 군마를 끌고 가는 군복만 입은 평범한 목부들이다. 나머지 200명만 정상적으로 무기를 휴대하고 훈련된 군사들이다.
일정이 늦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거용관에 있던 군마 2000필은 빠르게 점검을 끝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북쪽으로 나가게 되었다.
만리장성을 넘어서도 한참을 가야 초원지대가 펼쳐지기 때문에 먼저 이동한 것이다.
“어사, 내가 먼저 가니 후미를 잘 부탁합니다.”
“알았소. 그럼 수고해 주시오.”
이세충은 군마를 이끌고 만리장성을 통과해 먼저 초원 지대 입구까지 먼저 떠났다. 여전히 마차로 이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휘향 공주는 가마를 타고 있었다.
최인범은 보고 싶지만 무슨 사고라도 칠까 겁나 슬며시 제일 선두로 가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속보로 이동!”
속보란 거의 뛰는 정도로 이동하는 방식이다. 빠르게 달려 이동하다가 부하들이 지칠 무렵에 명령했다.
“모두 그 자리서 휴식! 보초는 세우고.”
“넷!”
하급 군관들이 빠르게 주변에 보초를 세우는 것은 보며 최인범은 그중에 선임에게 명령했다.
“나는 잠시 주변 정찰을 다녀올 것이니 잠시 쉬고 있다가 다시 출발해.”
“넷!”
아직은 주변에 몽골인이나 또는 여진족인 마적이 출몰하는 곳이 아니다. 몽골인들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어 명나라와 우호적인 관계인 부족도 있고 적대적인 부족도 있었다.
명나라 공주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최인범은 제정신이 아니다.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위험이 닥치고 있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위부대를 이탈해 근처의 숲으로 들어가 사냥물을 찾았다.
흑혈풍을 타고 천천히 이동하는 가운데 옆에서 따라가던 백두가 갑자기 긴장해서 몸을 웅크렸다. 전방을 주시하며 공격 자세를 잡았다. 앞에 강한 적이 나타났을 때 보이는 행동이다.
백구의 동작에 최인범은 흑혈풍에서 풀쩍 뛰어내려 전방을 살폈다. 숲속에서 뭔가 얼룩덜룩한 물체가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크기로 보아 맹수가 틀림없었다.
‘호랑이나 표범이군.’
소리 없이 숲속에서 이동하는 물체는 아주 은밀하게 움직였다.
사냥이라면 상당한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숲에서 움직이는 은밀하게 물체도 제법 상대방이 강하다는 것을 아는 듯이 매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숲을 이용해 아주 빠르지만 은밀하게 움직였다.
사락 사락.
다소 검게 보이는 물체는 아주 작은 소음을 내며 다가왔다. 순간 등에서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본능적으로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강한 적이 나타나자 최인범의 눈은 점점 붉어지고 야수와 같이 변해 살기가 저절로 품어졌다. 몸을 잔뜩 웅크린 자세로 변했다.
최인범은 점점 다가오는 물체를 매섭게 노려보며 조심스럽게 활을 들어 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전방에 보이던 물체는 어느 순간 숲속으로 홀연 사라져버렸다.
‘어라! 어디로 갔지?’
자신의 예리한 눈을 속일 수 있는 맹수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만큼 지금 나타났다가 사라진 맹수는 영악하다는 뜻이다.
눈앞에서 사냥물이 돌연 사라지자 바싹 긴장했다. 졸지에 목표를 잃어 버렸으니 이제는 자신이 맹수의 목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경우는 난생 처음이라 약간 당황했다.
‘보통 놈이 아니야.’
본능적으로 큰 위기라는 느낌이 들어 낮은 자세로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크앙!
큰 소리와 함께 뒤에서 번개같이 달려드는 물체에 기겁했다. 정확하게 뭔지 알기도 전에 달려드는 물체를 얼싸 안고 뒤엉켜 버렸다. 옆에 있던 백두도 검은 물체에 달려들며 요란하게 짖었다.
왈왈! 왈왈!
히이잉! 히이잉!
흑혈풍도 맹수가 나타나 주인을 공격하자 제자리에서 펄쩍 펄쩍 뛰면서 뒷다리로 맹수를 공격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최인범과 맹수가 뒤엉켜 땅에서 마구 뒹굴고 있으니 함부로 달려들어 공격하지 못했다.
매섭게 달려드는 검은 물체를 엉겁결에 껴안고 뒹굴다 보니 그제야 맹수의 정체가 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호랑이!’
이곳에는 호랑이가 사는 곳이 아니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엄청나게 큰 호랑이가 자신을 덮쳐 매섭게 공격하고 있었다. 호랑이의 목을 끌어 앉고 땅에서 뒹굴며 엎치락뒤치락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의 뛰어난 무술실력은 아무 필요가 없고 그저 힘과 힘의 대결이 펼쳐진 것이다.
크아앙! 크앙!
호랑이는 크게 입을 벌려보지만 물지는 못하고 앞발로 최인범의 등을 마구 긁었다. 호랑이의 긴 발톱 공격에 최인범의 등에서는 붉은 피가 품어져 나왔다. 그러자 사방으로 붉은 피가 마구 튀겼다.
‘아이고, 쓰려!’
호랑이의 긴 발톱으로 상처가 나자 강한 통증을 느꼈다.
“이이익!”
최인범은 처음으로 맹수와 직접 맨몸으로 마주해 오직 힘만으로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잡느냐 잡아 먹히냐만 가려지는 절대 절명의 위기 상황이다. 온힘을 다해 껴안고 있는 호랑이의 목을 조여 보았다. 하지만 커다란 호랑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히이잉! 퍽! 크아앙!
옆에서 폴짝 거리며 호랑이를 공격할 기회를 노리던 흑혈풍이 마침 고개를 높이 쳐들고 입을 크게 벌리는 호랑이의 얼굴을 뒷발차기로 강타를 멋지게 날렸다. 그러자 호랑이는 뒷발 공격에 크게 충격을 받은 듯이 잠시 요동치던 것을 멈추었다. 잠깐이지만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백구도 옆에서 기회를 노리다가 호랑이의 뒷다리를 강하게 물고 늘어지며 잘근거렸다. 백구의 이런 매서운 협공에 호랑이는 다리를 부르르 떨며 바동거렸다.
엎치락뒤치락 하며 땅에서 뒹굴다가 최인범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허리춤에서 대검을 뽑아 대호의 목덜미를 깊숙하게 찔렀다.
“이야얏!”
푹! 크아아앙!
큰 기합을 토하며 목에 깊숙하게 대검이 깊이 꽂았다. 목에 대검이 박히자 호랑이는 크게 울음을 터트리더니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윽고 조금 지나자 사지가 축 늘어지며 죽어버렸다.
최인범은 이마에 흐르는 땀과 붉은 피를 손으로 문지르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후우! 겨우 살았네.”
대호를 잡고 나자 온몸이 땀과 피투성이로 뒤범벅이다. 호랑이의 발톱에 상처가 나서 전신에서 붉은 피가 철철 흘렀다. 입고 있던 군복도 이곳저곳이 찢어져 너덜너덜했다.
최인범은 맹수를 잡고 나면 늘 하던 그대로 대검으로 배를 쩍 갈랐다. 심장과 생간을 꺼내 맛나게 먹었다. 갈증이 너무 심해 싱싱한 붉은 피가 반드시 필요했다.
우걱 우걱.
컹! 컹! 푸드드! 푸드드!
백두의 경우 전에는 사냥물을 잡아도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백두도 먹고 싶다는 듯이 크게 짖어댔다. 흑혈풍은 쩍 갈라진 호랑이의 배에서 흐르는 붉은 피를 정신없이 할타먹었다. 아마도 심한 갈증 때문에 싱싱한 붉은 피를 먹는 것 같았다.
최인범은 먹고 있던 생간을 대검으로 싹둑 잘라 백두에게 던져 주었다. 어찌 되었건 백두가 협공해서 잡은 사냥물이라 같이 먹자는 의미다.
호랑이의 심장과 생간을 먹고 나자 온몸이 나른해졌다. 일시적으로 과도하게 힘을 한 번에 쓰다가 보니 기력이 대부분 소진된 것이다.
사각 사각.
죽은 호랑이의 몸에 기대어 쉬고 있는 중. 갑자기 숲속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지?’
이런 숲에서는 맹수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람이다. 급하게 활을 잡고 움직이는 물체를 노려보던 최인범은 반가워 크게 소리쳤다.
“장 상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