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아래층에서 대국을 검토하던 사람들이 다들 그리 판단했다.
큰 내기라 그런지 두 사람 모두 긴장해 바둑을 두었다. 최인범도 가볍게 둘 수 없는 큰 재물이 걸린 대국이라 신중하게 두고 있었다.
바둑이 진행될수록 세의 유 불리가 확연하게 드러나자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사람은 양유승이다. 그는 이미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강도로 위장해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최인범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양유승은 최고로 자부하다가 연달아 패하지 망연자실했다.
‘이제 졌어.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깨끗하게 졌다고 인정하고 대국을 끝내려고 머뭇거리던 중에 돌연 바둑이 급변했다. 자신의 죽었던 돌들이 생기가 돌면서 살아나 상대편의 돌을 에워싸고 있었다. 대역전의 기미가 보인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최인범의 돌들은 사지로 몰려 버렸다. 그러자 양유승을 응원하던 사람들은 다들 환호성을 토했다.
“와! 역전이다.”
“역시 양 대인이 최고수야.”
이윽고 대마가 죽자 최인범은 스스럼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지니고 있던 여각의 소유권 서류와 두 미녀의 매매 증명서를 넘겨주었다. 내기에서 졌으니 모두 양유승에게 넘겨주고 북경으로 떠나야 한다.
“제가 졌군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두죠.”
“그럽시다.”
양유승은 바둑에서 이겨 기뻐해야 하지만 처참한 심정으로 매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약속한 내용이 떠올라 급하게 양산봉에게 지시했다.
“앞으로 너는 옆집에서 머물며 여기서 여각을 지켜.”
“예? 여각을 제가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요?”
“그래, 여각의 호위무사로 근무하는 것이니 두 미녀는 물론 여각에서 난동을 부리는 사람이 없도록 잘 지키면 돼.”
“알겠습니다.”
양유승은 발해여각 옆에 있는 커다란 집을 즉시 구입했다.
그곳에 두 미녀를 살게 하고 먼 조카인 양산봉을 호위무사로 기거하게 조치를 내렸다. 이어서 가마를 타거나 걸어서 도착한 30명의 하녀나 하인들도 집에서 지내도록 했다.
여각과 붙어있는 큰 집을 구입해 그곳으로 큰 마작이나 큰 내기 바둑을 두는 장소가 이전되었다. 발해 여각의 규모는 전에 비해 2배로 커졌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자 두 미녀는 서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자신들을 합부로 대하기 싫어 창병을 핑계로 거절하던 최인범에게 은근히 마음을 주던 판이다.
돌연 주인이 바뀌어 버리자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두 미녀를 따로 부른 양유승이 안타까운 심정에 한마디 던졌다.
“바둑은 북경에서 돌아오면 또 두기로 했다. 그리고 고수들의 바둑이란 상황에 따라 이기고 지는 법이니 너무 상심하지 마라.”
“어머, 그럼 저희 주인이 또 바뀔 수 있겠네요.”
이렇게 되자 생기가 돌게 된 왕미미는 여각을 담당하고 왕미령은 안채를 담당하는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게 되었다. 주인의 이름만 잠시 바뀌고 전에 비해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한편 최인범은 천진에서 큰 내기를 두어 쫄딱 망하고 나자 급하게 북경으로 올라와 백삼수를 만났다.
“백 행수, 원하던 대로 큰 돈줄은 잡았냐?”
“나리, 큰 돈줄을 잡았습니다. 엄숭의 애첩입니다.”
“엄숭의 애첩이라니? 그럼 예부상서인 엄숭과도 선이 닿게 되는 거냐?”
“예, 아직은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차츰 그렇게 되겠지요.”
자기를 자꾸 음해하려는 윤임만 생각해도 머리가 너무 아프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명나라의 간신으로 역사에도 기록될 정도로 유명한 엄숭의 애첩을 돈 줄로 잡았다니 갈수록 태산이다.
‘이놈이 진짜로 간덩이가 부어 버렸어.’
물론 이미 헤어지기로 결심했으니 상관없다. 아무튼 백삼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간덩이가 더욱 커졌다. 이런 놈과 계속 같이 동업하다가 보면 언제 날 벼락을 맞을지 모른다.
잠시 백삼수의 곱상하면서 음험한 얼굴을 바라보다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백 행수, 우리 이쯤해서 동업하던 사업을 그만두고 깔끔하게 갈라서는 것이 좋겠다.”
“나리, 왜 갑자기?”
“내가 재물이 갑자기 필요해서 그래. 그러니 조선왕실의 내수사에서 빌린 재물이나 내가 줬던 면포 2000필을 바꾸어 준 은괴에 해당하는 금액도 깔끔하게 나에게 넘겨. 그동안 거래해서 이득을 봤겠지만 나도 원금만 갚을 생각이니 원금만 내놓아서 정산해.”
이런 지시에 백삼수는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나리,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냥 빈손으로 조선으로 돌아가라고요?”
“너는 큰 돈줄 잡았으니 그 사람에게 돈을 빌려던 털어서 사용해. 그리고 나는 네가 정산한 재물을 모두 사신단에게 돌려줄 것이니 네가 잘 주선해서 다시 빌리던가 하면 되잖아.”
윤임과 손을 잡았으니 분명 자신이 갚은 재물은 다시 백삼수의 자금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아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백삼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리, 여기까지 저를 따라온 상단 사람들은 어찌하고요?”
“북경에 있는 상단 식구들이야 네가 그대로 물려받으면 되잖아. 그러니 상단의 이름만 새로 바꾸면 되니 그렇게 복잡할 것도 없지 않냐?”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다. 더구나 최인범이 천진에서 큰 내기바둑을 두어서 너무 많은 재물을 잃었다. 그 때문에 백두상단의 자금도 달라고 할까 걱정하던 판이다.
‘나보고 노름할 돈을 달라고 계속 요구하면 나까지 진짜 알거지가 돼.’
자칫하면 큰 노름을 벌이는 최인범의 뒷바라지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할 위험성이 높아 은근히 불안했다. 도박에 빠지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아니 이쯤에서 헤어지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그래도 혹시 나중에 보복하려고 하지 않을까? 내가 윤임 대감과 모의한 사실도 어쩌면 알지도 모르는데. 나리는 뒤끝이 있는 분인데. 좋게 해어지자고 말하고 나중에 나를 죽이려는지도 몰라.’
이미 지은 죄가 너무 커 백삼수는 겁이 나서 여기서 헤어지고 싶었다. 하지만 또한 나중에 벌어질지도 모르는 후환이 너무 두려웠다. 그래도 옆에서 알랑거리며 충성을 다하면 지난 실수는 덮어주게 생겼으니 망설이는 것이다.
이런 저런 상황을 고려해 다시 한 번 고심해 봤다. 하지만 최인범과 헤어지는 편이 자신의 미래가 밝다고 판단하고 이내 답했다.
“그럼, 그것들의 원금만 정산하면 저를 완전히 놓아 주는 거죠?”
“당연하지. 앞으로는 뭐를 하면서 돈을 벌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활동해. 그 대신 조선에 있는 백두상단에 운영이나 또는 재물에 대해서는 일체 욕심을 부리지 말고.”
“알겠습니다.”
윤임과 아무래도 밀착된 것으로 보이는 백삼수라 이쯤해서 헤어지기로 한 것이다. 어찌 되었건 백삼수는 문제는 자주 일으켰지만 그 덕분에 백두상단은 크게 성장했다.
‘월녀가 혼자서 이끌기는 버겁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꾸려 나갈 거야.’
하루를 백삼수와 같이 지내며 백삼수가 정리해준 재물을 챙겨서 사신단을 찾아가게 되었다. 정산하는 방법이야 부피가 제일 작은 금괴로 끝냈다.
사신단이 머무는 집으로 들어가자 정사인 김안국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다.
“자네, 무슨 생각으로 그런 큰 내기바둑을 두어 주상전하께서 주신 유학비를 소모했나?”
“대감, 그건 또 무슨 말씀인지요. 저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자꾸 유학비를 거론하시니 그런 복잡한 문제는 이참에 대감께 모두 갚아서 깔끔하게 정리해 드리죠.”
“뭐라? 갚아버린다고?”
“예, 그리고 제가 소유주로 있는 백두상단이 내수사에서 빌린 재물도 이참에 모조리 갚겠습니다.”
길게 설명해 봐야 너무 복잡만 하니 최인범은 이내 정산서와 함께 금괴를 놓고 다시 말했다.
“대감, 정산서 내역을 보시면 잘 아실 것입니다. 저는 왕실에서 재물을 하사 받거나 또 빌린 빚은 없으니 앞으로 더 이상 그런 말씀을 하지 마세요.”
일단 조선왕실에서 빌린 자금이나 유학비를 정리하고 나자 김안국과 해어졌다.
최인범은 이제 남은 문제인 과거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었다.
‘지금쯤 국자감 학생들이나 유생들 사이에 어떤 소식이 있어야 하는데.’
최인범은 많은 돈이 사라지자 실망한 두 부하를 데리고 왕담보를 찾아갔다. 두 부하를 왕담보에게 맡기고 혼자서 움직일 생각이다.
“너희 두 사람은 여기서 지내며 왕 대인의 건강도 챙기며 지내.”
“알겠습니다.”
왕담보 집에서 상단을 호위하는 무사들에게 간단한 호신술을 알려주며 시간을 보냈다. 이미 양유승을 통해 뭔가 계책을 마련한 상태라 기다리는 중이다.
한편 국자감에서 수학하는 학생들이 조선에서 오게 된 최인범이란 선비 때문에 술렁이고 있었다.
“아니, 조선에서 향시도 통과하지 않은 학생을 바로 회시를 보게 한다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이건 너무 잘못된 처사지.”
학생들은 예부에서 보는 회시를 보게 한다는 조선 유학생에 대해 불평하고 있었다. 그런 내용은 계속해서 조정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성리학을 공부하는 유생들도 모이기만 하면 그 일로 조정에 조치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그들은 자신들은 자격이 없다고 보지 못하는 회시를 보게 한다는 처사에 불만을 토하며 연명해서 시정해 달라고 조정에 글을 올렸다.
이렇게 되자 예부상서인 엄숭은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자칫하면 뇌물을 받고 그런 특혜를 주었다는 오명을 쓰게 생기자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 놈은 뭐하는 놈인데 내 속을 썩이는 거야.”
“폐하께 주청을 드려 회시를 보지 않도록 할까요?”
“무슨 소리야? 폐하께서 한번 내리신 하명을 거두는 것을 봤나?”
“상서께서는 이번 일로 자칫하면 탄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조선의 유학생에 대한 회사를 보는 특혜는 철회해야 합니다.”
고민하던 엄숭은 결국 정식으로 회시를 보는 자격이 아니고 그저 단순히 회사에 참여해 쓰고 싶은 어떤 글이라도 1000자가 넘는 글을 써서 제출하는 정도로 완화해서 조선의 사신단에 통보했다.
그래서 일정 수준의 문장 실력이 있으면 국자감으로 들어오는 혜택을 주기로 했다. 전에는 반드시 국자감에서 3년을 교육 받아야 하는 조건이지만 그런 조건이 사라지고 임의 사항으로 완화되었다.
다만 황제인 가정제가 답이라고 적어 올린 글을 읽어 보아 문장 실력이 너무 부족하면 황제를 기만한 죄를 물어 곤장 30대를 친다는 조건을 붙였다.
물론 황제가 글을 읽어 보아 마음에 들면 큰 상을 내린다는 조건은 붙어 있었다.
이렇게 되자 보기 싫은 최인범을 명나라의 국자감에 집어넣어 조선으로 당분간 귀국하지 못하게 계략을 꾸몄던 윤임은 낙심하고 말았다.
“이런,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려 명나라 유생과 국자감 학생들의 반발을 가져왔군.”
그러자 이제 완전히 한패가 되어버린 백삼수가 조심스럽게 계책을 말했다.
“대감, 곤장 치는 형리를 매수하면 됩니다.”
“오라, 그렇군. 형리가 매를 호되게 치면 살아남지 못하거나 병신이 되니 그게 좋겠어.”
백삼수는 뒤끝이 있는 최인범이라 자신에게 나중에 보복을 할 것을 염려해 윤임을 부추기고 있었다. 윤임은 최인범이 모두 돌려준 많은 재물을 백삼수가 새로 만든 태향 상단에 투자했다.
태향 상단은 백삼수가 백향옥으로 위장해 진향의 재물을 이용해 설립한 상단이다. 조선과 무역을 주로 하는 상단으로 한양과 북경에 고정된 사무실이 있는 형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