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최인범은 왕담보의 상단이 머무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여전히 살 빼는 운동인 마당 걷기를 부지런히 하던 왕담보는 최인범을 보자 매우 반겼다.
“아이고, 나리, 귀한 고기까지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냥 드리는 것이니 잘 요리해서 드세요. 뼈로 한약도 만들어 드시면 아마 전보다 몸이 좋아질 겁니다.”
“매번 감사합니다.”
최인범은 군복을 벗고 다시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왕담보와 해어져 사신단에 합류하기 위해 이동했다. 그의 옆에는 하녀 옷을 입은 설화가 약간 위장한 모습으로 같이 가고 있었다. 위장을 했어도 미모가 여전히 돋보이자 은근히 걱정이다.
‘윤임이 미모가 뛰어난 설화를 보면 무슨 시비를 걸지 모르겠군.’
이런 걱정을 하면서도 설화를 굳이 데리고 가는 이유는 부마도위 후보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지 때문이다.
‘여자가 이미 있는 상태인데 부마도위를 삼자고 더 이상 귀찮게 하지는 않겠지.’
또한 자신이 부마도위를 하지만 않으면 윤임도 자신을 더 이상 견제하거나 또는 죽이려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노회한 윤임이니 더 이상 무리하게 수작을 부릴 이유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일이란 본래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최인범은 조선의 사대부인 정치인들이 얼마나 철저하고 집요한지 아직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신 일행의 후미로 가자 백삼수가 다가와 보고했다.
“나리, 왕 대인이 하녀를 보냈습니다.”
“뭐라? 무슨 하녀?”
“저야 잘 모르죠. 왕 대인께서 나리가 북경으로 가시는 동안 지리나 풍습 때문에 불편할지 모른다고 하며 며칠 전에 보냈는데 모르시나 보군요.”
명나라 역시 노비제도가 있다. 주인 옆에서 가사를 돌보거나 때로는 잠자리까지 시중을 드는 여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조선으로 보면 종첩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여자들이 많았다.
어찌 칭하던 주인에게 속한 노예 신분인 여자가 하녀(下女)다. 대부분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고아거나 또는 부모가 빚 때문에 팔려서 하녀가 된 경우가 많았다.
백삼수의 말에 최인범은 지시했다.
“지금 어디에 있냐?”
“저쪽에 있습니다.”
최인범은 하녀라고 해서 당연히 나이도 어리고 그저 잔심부름을 하는 여자아이로 판단했다. 그러나 만나본 여자들은 나이가 이제 20살이 되지는 않았지만 아주 성숙한 여자들이고 미모 또한 최상급에 속했다.
더구나 하녀 신분이라더니 입고 있는 옷도 화려한 비단으로 감싸고 있었다. 도도해 보이는 눈빛들은 모두 하녀로 보기에는 너무 어색한 미녀들이다.
‘아니, 이런 여자를 하녀로 보내다니. 왕 대인도 정말 이상하군.’
백삼수는 데리고 있던 하녀들의 인계가 끝나서 천만다행이라는 듯이 노비문서를 넘겨주며 말했다.
“나리, 저 여자들은 다들 보통이 아닙니다. 도통 일은 전혀 안하고 이동할 때도 가마를 태워서 다녀야 합니다. 자신들은 출신가문이 좋은 여자들이라고 하면서요. 아마도 자신들이 미녀이고 작은 나라라고 해서 조선인을 깔보는 경향이 있나 봅니다.”
이런 설명에 최인범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 하녀면 하녀다워야 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니 기가 막혔다. 왕담보의 이런 호의는 분명 하녀라는 여자를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는 첩으로 보낸 의도가 분명했다.
‘호의가 지나쳐도 귀찮군.’
하긴 옆에 그녀들 보다 더 뛰어난 미녀인 설화가 있으니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때 옆에서 있던 설화가 잠시 뭔가 골몰하게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리, 저와 따로 이야기 좀 하지요.”
“무슨 이야기?”
상당히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최인범은 설화를 따로 데리고 가서 물었다.
“왜?”
“나리, 소녀는 이만 여기서 해어져야 되겠어요. 옆에서 나리를 돌볼 여자들이 2명이나 생겼고. 저도 이제 부족에게 돌아갈 생각입니다.”
“여자들이 옆에 있어 싫기 때문이냐?”
최인범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설화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뇨. 나리, 사실 저는 여진족의 족장 딸이라 산해관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요.”
“노비로 위장하면 되는데.”
“물론 나리의 노비로 위장해서 억지로 들어갈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러다가 명나라 관원에게 들키면 나리도 매우 곤란해져요. 저는 비참한 신세로 변하거나 사형을 당합니다.”
설화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요즈음 들어 몽골이나 또는 여진족이 가끔 만리장성 주변을 침범해 산해관의 검문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 합류한 두 명의 미녀가 조금은 의식될 수밖에 없었다.
여진족이라고 해서 흔히 요동 지역에서만 활동한다고 알지만 여진족들은 만리장성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무리들도 있었다.
그들은 흔히 마적이라고 칭하는 무리로 보통 수백명이 집단을 이루고 활동했다. 어느 일정한 지점에 거점을 두지 않고 유목민처럼 떠돌면서 필요한 경우 마적 질을 자주하는 무리다.
명나라 황제인 가정제 치세인 지금은 흔히 ‘북로남왜의 화’라고 칭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북쪽으로는 몽골과 여진이 자주 침입하고 남쪽에서는 해안가에 왜구들이 자주 출몰해 약탈을 일삼고 있었다.
그래서 명나라 조정은 상당히 예민해져 있어 산해관은 검문검색이 아주 심했다. 여진이나 몽골에서 보내는 첩자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설화가 산해관을 꺼리는 거야 당연했다.
이해는 되지만 최인범은 마음에 쏙 드는 설화가 자신들의 부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만류했다.
“나와 북경을 같이 가보고 싶지 않냐?”
“나리, 제가 지닌 여진족의 상징인 반월도가 발각되면 나리와 달리 저는 첩자로 몰려 죽습니다. 그러니 저는 부족에게 빨리 돌아가 나리께서 귀국해서 소녀를 다시 찾을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진심으로 부족이 있는 퉁화로 돌아가고 싶다는 표정을 보이자 최인범은 승낙했다.
“알았어.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편지를 써줄 것이니 개마고원으로 가서 개마농장의 감목관인 임권수에게 전달해. 그러면 네가 원한다면 그곳에서 머물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줄 거야.”
“알았어요.”
최인범은 서둘러 한글로 긴 서찰을 써서 설화에게 넘겨주었다. 당연히 이도백하에 있는 무리에게 퉁화의 부족들과 사이좋게 지내라는 명령도 적었다. 그리고 그들과 교역을 하도록 지시도 적어 놓았다.
설화는 북경까지 따라 가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첩자로 오인되어 문제가 생길까도 너무 두려웠다. 또한 반월도를 가지고 돌아가서 아버지를 만나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결국 설화는 표범 새끼 두 마리와 가죽 그리고 반월도를 가지고 빠른 이동을 위해 별도로 2필의 말을 꽁무니에 달고 떠나게 되었다.
“나중에 꼭 저를 찾아오세요.”
“알았어. 내가 귀국하면 바로 찾아가지.”
말을 타고 손을 흔들며 멀리 떠났다. 점점 흐릿하게 사라지는 설화를 바라보며 최인범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도대체 뭐하려고 갑자기 저렇게 급하게 부족에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네. 아직도 나를 오빠를 죽인 철천지원수로 대하나?”
너무 아쉬운 일이지만 이미 떠나버린 여자를 다시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이내 잡념을 떨치고 백삼수에게 물었다.
“백 행수, 북경으로 가서 돈 벌기 좋은 사업 구상을 해두기는 했냐?”
“넷! 지금은 자세하게 말씀드리기 곤란하고 나리께서 저를 조금만 도와주면 돈을 많이 벌 방법은 있습니다.”
“뭐를 내가 도와줘.”
“지금 가지신 표범 새끼를 저에게 주시면 방법이 있습니다.”
“자세히 설명해봐.”
지시를 받은 백삼수는 자세하게 설명했다. 백삼수가 구체적으로 짜낸 계책이란 실로 너무도 단순했다.
명나라 고관인 엄숭이 특이한 물건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고 했다. 그중에도 특별히 애완동물을 좋아하는 애첩을 제일 가깝게 대해 그 여자의 집에는 각종 애완동물을 키우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니 최인범이 지니고 있는 표범 새끼를 자신에게 넘겨주면 엄숭의 애첩에게 선물로 넘겨줘서 돈벌이를 해보겠다는 구상이다.
이런 설명을 듣자 최인범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전에 몸으로 때워서라도 돈을 벌라고 하자 결국 애첩에게 접근해 몸으로 돌진할 모양이군.’
백삼수의 행동은 별로 믿을 것이 못되지만 최인범은 표범새끼 3마리를 넘겨주었다. 사실 여행을 다니며 표범새끼를 기른다는 것은 무척 불편하니 잘 된 일이다.
“공짜는 없다. 은괴로 정산해.”
“알았어요. 제가 은괴를 드리죠.”
백두상단이 자신의 소유지만 어찌 되었건 계산은 똑 바로 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백삼수에게 약간의 은괴를 받았다. 자신이 여진족에게서 탈취한 은괴와 대조해 보려는 의도가 있었다.
최인범은 당초 계획과는 달리 북경에 두 위생병을 놔두고 혼자서 대운하를 거쳐 여행해볼 생각이다. 그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조금 위험한 일이기는 하지만 여행은 혼자 다니면 제일 편할 수 있다. 자고 싶으면 자고 행선지도 마음대로 정해 남을 전혀 의식할 필요가 없으니 속 편하게 마구 떠돌면 된다.
안전을 책임질 설화는 이미 떠났다. 그 때문에 최인범은 사신 대열에 합류했다. 설화 대신에 하녀인 미녀 두 명과 같이 합류하자 윤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무랬다.
“최 사정, 저기 있는 미녀들은 도대체 어떤 여자들인가?”
“오다가 길에서 주운 여자들입니다.”
왕 대인에게 바둑도 알려주고 병도 치료해 주었다는 복잡한 설명이 싫었다. 그래서 불쾌한 표정으로 이렇게 간단하게 답했다.
윤임은 즉시 호통 치듯이 크게 나무랐다.
“뭐라? 길에서 저런 미녀를 줍다니. 보아하니 주산전하께서 공부에 필요한 여비로 쓰라고 주신 재물로 애첩을 벌써부터 사들인 것이군.”
“그런 짓은 아닌데요.”
최인범이 아니라고 답했지만 윤임이 다시 단정해서 말했다.
“유학하러 와서 공부는 생각하지 않고 벌써부터 미녀나 줄줄이 달고 다니니 너무 한심해. 그러다 창병이 걸리면 어쩌려고.”
“예?: 창병요?”
“어려서 여자들을 많이 접하면 창병이 걸린다는 것도 자네는 모르나?”
여자를 보는 눈은 있어 미녀라고 평하더니 악담을 토했다.
하고 많은 악담 중에 제일 고약한 창병(성병)을 걸릴지도 모른다니 참으로 고약한 언사다. 언중유골이 아니라 언중살인에 속한 심한 악담이다.
이런 악담에 최인범은 속으로 ‘너나 창병에 걸린 첩실을 두지 말고 잘하셔!’하며 비웃었다. 자신에게 그동안 호의를 보이던 김안국이나 한정문도 명나라 출신인 미녀들은 보자 별로 기분 좋은 표정들은 아니었다.
‘하필이면 왜 명나라 미녀를 지금 사고 그러나 모르겠군. 타고 난 방락벽도 모자라서 중전마마와 공주님이 가장 싫어하실 난봉꾼인가?’
그들은 조선 조정의 중신으로 군왕의 사위인 부마도위로 내정된 최인범이 명나라 미녀를 둘씩이나 거두자 공주의 장래가 너무 걱정된 것이다.
‘됐어, 이 여자들 때문에 분명 한양까지 소문이 파다하게 날거야.’
약간은 억울한 추문이 나더라도 죽어도 하기 싫은 조선의 부마도위는 어떻게 해서라도 면해보려고 이렇게 특이하게 행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