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한정문이 굳이 자신을 찾아와 이런 화해의 말을 권하자 최인범은 윤임 대감이 자신에 대해 얼마나 싫어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즉시 응수했다.
“장군님, 저야 뭐 다른 생각이 있나요. 그저 가볍게 토한 의견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 같이 말씀하시니 조금 마음이 편치 않은 것뿐이죠.”
“그래도 자네가 굽히는 것이 좋아.”
“사실 그분이 저를 어찌 생각하던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북경으로 가면 바로 대운하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갈 생각이니까요.”
최인범의 말에 한정문은 화들짝 놀라며 반문했다.
“뭐라? 북경에 도착하면 바로 대운하를 통해 남쪽으로 간다고?”
“예, 서양의 배들이 들어온다는 영파에 가볼까 합니다.”
최인범은 이제 윤임 대감과 접촉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 이유는 2번째 공격은 분명 윤임이나 백삼수가 모의해서 벌인 사건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행선지를 아는 사람은 계속 미행하던 설화 무리와 백삼수뿐이다. 그러니 구조를 요청하러 요양으로 오던 홍성철이 공격당한 것은 분명히 둘 중에 하나가 사주해 벌인 사건이라고 판단했다.
‘둘이 공모했거나 윤임 대감이 백삼수를 협박해 벌어진 사건이야.’
윤임 대감이 상인에 불과한 백삼수를 협박한다면 조선에서 떠날 생각이 아니라면 감히 거절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백삼수가 여진족을 직접 설득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윤임 대감을 여진족을 동원한 배후세력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라면 여진족에게 조선과의 무역을 통한 큰 이득을 주겠다고 제시해 암살을 사주할 정도의 힘을 지녔다. 본시 적이란 내부의 적이 제일 무서운 법이다.
‘윤임 대감을 적대시하면 조선에서 살기가 힘들어. 차라리 눈에 안보이게 처신하는 것이 좋아.’
이렇게 판단하고 한정문에게 부탁했다.
“장군님, 저는 뒤에서 명나라 말도 배울 겸 명나라 상인들과 같이 이동할까 합니다.”
“알았네. 그럼 그렇게 하게.”
최인범은 설화를 보면 윤임이 또 어찌 나올지 몰라 그것도 감안해서 뒤에 따라가기로 했다. 사신 행렬과 명나라 상인들 사이에는 항상 1천보 이상 떨어져 간다니 그게 제일 좋았다.
“장 상병, 우리와 같이 이동할 명나라 상인을 물색해 봐.”
“넷!”
“가급적이면 명나라 황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으로 장기나 바둑을 두는 사람이면 더욱 좋고.”
“알겠습니다.”
이것저것 따지는 사신단이 먼저 떠나고 나자 최인범은 그제야 명나라 상인과 합류했다. 말 타고 이동하기 거북한 한복을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같이 가게 되는 명나라 상인은 비단과 폐물을 팔고 담비 가죽을 사가는 왕담보다. 왕담보는 무술이 뛰어난 최인범이 같이 간다고 하자 좋아했다.
“마적이 나타나면 옆에서 나를 보호해 주시오. 그럼 내가 보답해 드리리다.”
“알겠습니다. 그건 염려 마세요.”
“잘 부탁합니다. 요즈음은 너무 세상이 험악해서요.”
“좋습니다. 나중에 보수나 두둑하게 주시오.”
북경에 도착과 동시에 헤어질 생각이라 명나라 사람으로 누군가 협조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최인범은 장주한이 수소문한 왕담보를 만나 같이 이동했다.
마치 동그란 공처럼 뚱뚱한 왕담보는 바둑은 물론 장기나 마작을 아주 즐긴다고 했다. 상단의 규모도 크고 재력도 많고 욕심 또한 많아 보이는 사람이다.
미모가 뛰어난 설화는 남들이 자꾸 자신을 주목하자 위장했다. 얼굴에 검정 칠해서 흉터처럼 만들고 군복을 입어 몸매를 가렸다.
“왕대인은 바둑을 잘 두세요?”
“즐기는 편이죠.”
“그래요. 저도 바둑을 즐깁니다.”
본시 가마를 타고 이동하던 왕담보는 바둑 이야기가 나오자 최인범과 바둑 이야기를 하느라 뚱뚱한 몸으로 말을 타고 같이 이동했다.
바둑이 두고 싶어 좀이라도 쑤신 듯이 가마에 바둑판을 싣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래서 말 타고 이동 중이라 잠시 쉬는 시간에 바둑판에 간단한 묘수풀이를 늘여 놓고 말했다.
“이런 수를 풀 수 있어요?”
“잠깐. 어려워서 가마를 타고 가면서 풀어야 되겠소.”
위장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왕담보는 쉬운 묘수풀이를 풀어 본다고 하며 가마를 타고 이동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신이 나서 크게 외쳤다.
“와! 드디어 풀었다!”
최인범은 풀었다는 바둑을 살피고 나서 말했다.
“정확하게 풀었군요. 그럼 다음 수를 풀어 보세요.”
“이번에는 더 빨리 풀 것이니 얼른 문제를 내보세요.”
왕담보가 묘수풀이를 풀면 다시 다른 묘수풀이를 늘여주는 방법으로 두 사람은 수담을 즐겼다. 드디어 여각이 있는 마을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바둑을 같이 두게 되었다.
도저히 바둑 실력으로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안 왕담보는 스스로 많은 바둑알을 깔아 놓고 지도대국을 부탁했다.
“제가 7점은 깔고 두죠. 제가 북경까지 여비는 다 책임지겠습니다.”
“7점은 너무하고 5점 정도가 적당해요.”
결국 5점을 치수로 지도 대국을 두게 되었다. 사실 왕담보와 최인범의 바둑실력 차이는 7점은 깔고 둬야 치수가 정확했다. 바둑 실력은 조금 모자라지만 냉철하게 자신의 실력을 평가하는 사람이다.
‘생각보다 지혜가 있는 사람이야.’
바둑을 두며 북경의 소식이나 왕담보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고 있었다.
왕담보는 북경에 제법 큰 전당포도 운영하고 고관들과도 교류가 많았다. 이름에 어울리게 여진족과 담비가죽과 비단을 거래하고 북경에 큰 전당포도 운영하니 아주 팔자가 잘 풀린 사람 같았다.
자신이 엉망으로 알고 있던 가정제에 대해서도 물었다,
“황제는 어떤가요?”
“황제가 어떤 것이야 저야 모르죠. 하지만 황제의 옆에서 권세를 부리는 엄숭이라는 자가 너무 탐욕스럽다는 것은 잘 압니다.”
엄숭은 진사출신인 명나라의 고위관리다.
일개 상인에 불과한 사람도 이렇게 엄숭을 혹평할 정도면 자신이 아는 역사적 사실과 대동소이한 명나라 조정이다. 그러니 잘하면 뭔가 큰 이득을 볼 것이 나타날 수 있었다. 그래서 상대방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범위에서 북경의 소식을 계속 물었다.
한동안 북경의 소식을 말하던 왕담보는 이제 너무 친숙하다고 판단한 것인지 자신의 개인적인 고민을 말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사는 재미가 없어요.”
“무슨 고민이 있나요? 혹시 제가 도울 수 있나 모르겠군요.”
“예. 말씀드려 보죠.”
생각보다 젊은 30대 중반의 나이인 왕담보는 아내가 5명이나 되지만 자식이 한 명도 없고 살이 너무 쪄서 고민이라고 했다.
과도한 비만으로 몸에서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그의 병만 조금 치유시켜주면 아주 사이좋은 지인을 북경에 만들 수 있었다.
최인범은 독이 완전히 해독되어 온전해진 홍성철에게 지시했다.
“홍 상병, 네가 왕 대인을 한번 진맥해 봐.”
진맥해보나 마나 너무 육식을 좋아하고 또한 튀긴 음식을 폭식해 살이 찌는 것이다. 살찐 사람의 전형인 당뇨인 소갈 병도 있고 숙변으로 몸속에 탁한 기운이 많은 사람이다.
“나리, 대침을 놓아 숙변을 빼내면 조금은 건강이 좋아질 것 같군요.”
“그럼 어서 치료해.”
홍성철이 이곳저곳에 대침을 놓자 왕담보는 뱃속에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났다.
그르릉. 그르릉.
그러자 왕담보는 급하게 뒤를 보기 위해 움직였다. 결국 왕담보는 이 날 이후 몸이 조금 가뿐해지자 홍성철을 명의라고 칭하며 우대했다.
홍성철은 왕담보에게 소갈병에서 주의할 점을 말해 주었다.
“왕 대인, 소갈병에는 본시 주색을 금하고 짠 음식과 면을 즐기면 안 됩니다. 육식 대신 채소를 먹으세요. 밥맛이 너무 없으면 두부 요리를 먹으세요.”
“알았소. 앞으로 조심하죠.”
왕담보가 바둑 대신에 자신의 건강을 위해 홍성철에게 매달리는 동안.
최인범은 장주한과 설화를 데리고 사냥물을 찾아 주변을 돌아다녔다. 사신단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사냥해야 한다. 그 때문에 많은 사냥물을 만나기는 기대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초원지대에 흔한 사슴이나 또는 오리들은 많이 잡았다.
이미 대릉하를 지나자 드넓은 초원지대는 사라지고 바위산과 계곡들이 보였다. 계곡에서 맑은 물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추운 이곳에도 어느새 봄기운이 찾아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골짜기 마자 눈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벌써 요양을 떠난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계속 같이 다니며 사냥하면서 야지에서 야영하며 지내다 보니 설화는 전보다 더욱 친숙한 사이로 변했다.
설화는 말도 잘 타고 사냥 솜씨도 좋았다. 빠르게 말을 달릴 때는 거친 야생녀로 같았다.
저녁이 되어 설화는 모닥불 옆에서 호기심어린 눈으로 두 남자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동안 두 사내가 해주는 요리를 날름날름 받아만 먹더니 문뜩 요리가 하고 싶어 졌는지 슬며시 입을 열었다.
“나리, 오늘 요리는 제가 할까요?”
“요리를 잘하나?”
“그렇지는 않지만 한번 해보고 싶어서요.”
미심쩍었지만 본인이 요리한다고 자청해 시키고 보니 너무 엉망이다. 반합에 쌀을 넣고 끓이는 밥이야 숯으로 만들고 육포를 넣어서 끓이는 죽도 태워서 먹을 수가 없었다.
사슴고기를 넣어 끓인 이상한 탕을 만들자 먹어보니 이건 극약과 같았다.
설화가 만든 음식은 쓰고 느끼하며 맛이 전혀 없었다. 도저히 삼키지 못하고 토해낼 정도다. 도대체 맛을 내기 위해 뭐를 넣는지 모른다. 보아하니 냄새가 고약한 약초와 짜디 짠 소금만 잔뜩 넣은 것 같았다.
뛰어난 미인이지만 음식 솜씨는 최악이었다.
‘후우! 완벽한 사람은 없다더니 요리 솜씨는 완전히 맹탕이야.’
밤이 되자 세 개의 소형천막을 치고 가운데에 모닥불을 피우고 야영했다. 이제 얼마 있으면 만리장성의 끝에 위치한 산해관에 도착하게 되니 다시 사신 행렬과 합류할 생각으로 지시했다.
“나 먼저 잘 것이니 보초 잘 서! 졸리면 깨우고.”
“넷!”
모닥불 옆에서 설화와 같이 앉아 있던 장주한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백구와 같이 다소 떨어진 바위로 가면서 말했다.
“설화, 나는 저쪽으로 가서 보초를 서지.”
드디어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오자 설화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오라버니의 원수를 꼭 죽여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