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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트레인-154화 (154/519)

154화

정혼자도 오빠와 같이 죽었으니 아리아는 최인범이 반드시 죽여야 하는 철천지원수다. 그런데 아비인 부족장이 반월도를 이런 자에게 넘기며 남편이라고 지목해 버렸으니 너무 복잡해져 버렸다.

원수이면서 남편으로 확정된 사내가 되어버렸으니 심리적으로 심하게 갈등이 생겼다.

‘어쩌지? 이 자를 죽이고 나도 따라서 죽어야 하나?’

이런 난감한 상황으로 만든 아비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식사하는 내내 얼굴의 표정이 수십번은 바뀌고 있었다.

설화의 이런 얼굴을 바라보던 최인범은 생각했다.

‘표정으로 보아하니 내부적으로 갈등이 너무 심하군.’

사람이란 의식적으로 감추려고 해도 마음속에서 거짓을 말하거나 심한 갈등이 생기면 반드시 얼굴이나 눈빛이 자주 변하게 된다.

짧은 식사 시간 내내 설화는 수시로 얼굴 표정이 수시로 바뀌고 있었다. 반월도나 붉은 글씨는 매우 복잡한 내용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최인범은 자신까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라 이내 털어버렸다. 설화의 예쁜 얼굴을 자세하게 바라보았다.

치렁치렁한 머리로 커다란 눈이 예뻤다. 콧날도 오뚝해 현대적인 미인 형이다. 그러나 가끔 찡그리는 모습을 보일 때는 눈이 가늘게 떠지며 살포시 살기가 풍겼다.

‘독하게 생긴 것이 꼭 서기를 닮았어. 키도 크고.’

물론 한국 출신의 여배우와 비교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은 여진족이라 조금은 다른 나라 출신인 여자라는 느낌이 강해 이렇게 비교했다. 그리고 무술이 뛰어나 보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비교하는 것이다.

‘영화는 영화니까.’

하녀로 취급하라며 예의가 조금 어긋나게 두 사람은 겸상해 식사를 마쳤다.

최인범은 반월도를 다시 군복의 안주머니에 걸어 놓고 지시했다.

“설화! 너도 반월도를 나처럼 휴대하고 다녀.”

“예.”

가볍게 대답한 설화는 식탁의 그릇들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에 설화가 방으로 돌아오자 최인범은 약간 고민했다.

‘침상이 하나라 어쩌지?’

하녀라는 여자를 침상에 재우고 자신이 바닥에서 자기도 뭐했다. 또한 자신이 침상에서 자며 여자에게 방바닥에서 자라고 하기도 약간 곤란했다.

‘내가 설화의 미모에 반했나?’

이런 사소한 것에도 일일이 신경이 써지는 것으로 보아 설화의 미모가 마음에 쏙 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모로는 지금 당장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성깔로 보아서는 조금 꺼려지기도 했다.

‘나를 죽이려는 여자야. 정신 차려! 미모에 넘어가면 곤란해.’

강하게 품어 오른 욕심처럼 침상에서 같이 자자니 아직은 무리다. 강제로 여자를 취할 수는 없었다. 이래저래 약간은 난감한 상황으로 처해 버렸다.

‘에효! 같이 침상에서 잘 수도 없고 조금 고약하게 됐어.’

그러나 그런 사소한 고민은 설화가 쉽게 해결해 주었다. 설화는 한쪽 구석인 벽 쪽으로 가서 마루인 바닥에 모포를 깔고 곰 가죽으로 만든 덮개를 펼치며 자신이 잘 잠자리를 만들었다.

“저는 여기서 자면 되죠?”

“마음대로 해.”

따로 잔다는 설화를 바라보며 최인범은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유는 불숙 탐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제로 범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다. 애써 자제하고 슬며시 침상으로 가서 옷을 벗고 누웠다.

아직은 의심이 가는 부분만 많았다. 어떤 확정된 사실이 없으니 설화를 어찌 처리할 지 추후에 결정하기로 했다.

‘죽여야 할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니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어.’

최인범이 침상에서 누워 눈을 감자 설화도 잠자리에 누었다.

설화는 누운 상태로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또 다시 마음속에서 갈등이 심하게 일어났다. 분명 죽이려고 접근했지만 그런 굳은 결심은 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무술이 뛰어난 자를 죽이려고 하니 두려웠다. 아비에 의해 자신의 남편으로 정해진 사내라 죽이면 안 된다는 느낌이 들어 망설이고 있었다.

‘앞으로 어쩌지?’

자신이 왜 이런 자에게 접근했는지 잘 알면서도 아직도 암살을 시도하지 못했다.

최인범이 전혀 모르는 듯이 아주 평범하게 대하자 살심이 아주 조금씩 사라지는 것이다. 왠지 자꾸만 사내에게 끌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내가 흔들려서는 안 돼.’

이렇게 다짐하고 반월도를 품에 지니고 설화도 조금 지나자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쉽게 잠이 들 수는 없었다. 암살할 기회가 없다고 판단해 오늘 결행하기로 마음을 단단히 다졌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설화는 살며시 눈을 떴다.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자 기회는 지금 뿐이라는 다급함 때문에 반월도로 공격할 결심을 했다.

‘지금 죽여야 해.’

소리죽여 살며시 일어나 조심스럽게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백두는 가만히 누워서 고개만 들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설화가 침상 옆으로 한 발 다가오며 반월도를 뽑아들자 슬며시 공격 자세를 취했다.

크르릉! 크르릉!

‘어마!’

백두가 으르렁 거리자 설화는 몸이 굳어 버렸다. 부하의 목을 물어뜯어 죽이던 무서운 개가 으르렁 거리자 무서워서 더 이상 다가가갈 수 없었다.

밤이라 그런지 개의 눈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호랑이나 표범 같은 사나운 맹수와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잠들어 있던 최인범이 조용히 나무라는 투로 명령했다.

“백두! 조용해.”

낑!

설화는 아차 싶어서 얼른 자신의 잠자리로 돌아가 누었다. 자신이 염려하던 그대로 같은 방에서 잔다고 해서 암살의 기회가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방금 토하는 말투는 분명 잠들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저 사람은 내 정체를 다 알고 있어.’

벼르고 별러 접근했지만 이미 상대방이 자신의 정체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옆에 무섭고 영민한 개가 깊은 밤에도 보초를 서니 암살하는 것도 포기해야 될 판국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시도하다가 무산되자 설화는 맥이 탁 풀려 버렸다. 그저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부족에게 돌아가기도 어렵다.

부족장의 명령을 어기고 부하들을 데리고 와서 암살을 성공하지도 못하고 부하들만 허망하게 죽였으니 돌아갈 수가 없었다.

‘같이 다니다 보면 기회가 생기겠지.’

오늘은 암살하기에 좋은 기회가 아니라고 편하게 포기하고 잠이 들었다. 적이 자신의 정체를 안다고 해도 같이 생활하다가 보면 언젠가는 좋은 기회가 찾아 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렇게 결심하자 복잡하던 마음이 차분해져 잠이 들 수 있었다.

설화는 꿈속에서 무서운 호랑이에게 쫒기는 꿈을 꾸었다. 때로는 호랑이나 개가 자신의 목을 노리고 덮치는 꿈을 꾸자 가끔 심한 잠꼬대를 토했다.

“으악! 살려줘!”

너무 크게 잠꼬대를 토하자 최인범은 가끔 깨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식은땀까지 줄줄 흘리면서 잠든 모습을 보자 조금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강단이 좋은 여자라도 죽음을 두려워하는군.’

아직 날씨가 춥기 때문에 최인범은 설화에게 두툼한 담요하나를 덮어주고 다독였다. 그러자 뒤척이며 험하게 자던 설화가 조용히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고르게 숨을 토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쩝! 자객만 아니라면·······.’

아무리 여자라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그러니 아직은 다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슬며시 침상으로 돌아와 누어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난 최인범은 부하들과 같이 마구간 앞에서 격투기를 수련했다. 무술이란 계속 연마하지 많으면 퇴보하게 되니 시간이 나면 끝없이 수련했다.

“탓!”

“타닷!”

앞으로 얼마나 험한 고난이나 위기가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니 그때를 대비해야 한다. 한동안 부하들과 같이 격투기를 수련하던 최인범은 마지막으로 흑혈검으로 검술을 펼쳤다.

“탓! 타닷! 톳! 토돗! 톳!”

무거운 흑혈검이지만 양손이 아닌 한손을 사용해 자유자제로 화려하게 검식을 펼쳤다. 한창 검술을 수련하는 중에 마구간으로 한정문이 와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최인범이 펼치는 검술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전보다 검술 실력이 더 좋아졌어.’

한정문이 보기에 다시 만날 때마다 더욱 무력이 높아지자 놀랐다. 아직은 나이가 어리니 한창 무술실력이 급격하게 느는 시기지만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경이롭게 보였다.

‘타고난 무인이야.’

무술을 수련하는 모습을 한정문 혼자만 지켜보는 것은 아니다. 암살할 기회를 노리고 접근한 설화도 이층에서 몰래 숨어서 지켜보았다. 그녀는 아침에 깨어나 자신에게 모포가 덥혀 있자 놀랐다.

무서운 무술을 지닌 사람이지만 때로는 아주 다정다감하게 대했다. 모르고 줬는지 모르지만 아주 귀한 반월도를 서슴없이 주는 모습 또한 경이로웠다.

‘특이한 사람 같아.’

여진족의 부족장 증표가 아니라도 반월도는 귀한 물건이다. 작은 보석이 많이 달려 단순하게 가치만을 따져도 쉽게 남에게 줄 수 없는 고가인 물건이다. 그런 보물을 서슴없이 자신에게 주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조선에서 뭐하는 사람이지? 그런 귀한 보물도 쉽게 남에게 주고 더구나 무술도 뛰어나 궁술도 대단한데 검술이나 격투술은 더 뛰어나 보여.’

최인범의 무술을 목격한 설화는 자신이 계획한 암살은 영영 포기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여각에서 머물고 있는 명나라 상인들도 모여들었다. 최인범이 무술을 수련하자 많은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바라 보거나 마당의 구석에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대단한 힘이고 검술 실력이 좋네. 저런 사람과 같이 가면 든든하겠어.’

명나라 상인들이 다들 이렇게 생각하며 무술 수련을 구경했다. 이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요동은 물론 요서 지방에도 요즈음 마적들이 많이 출몰하기 때문이다.

최인범은 많은 사람이 구경하자 슬며시 수련을 멈추고 나서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빨리 떠날 준비를 해.”

“넷!”

흑혈검을 부하에게 넘겨준 최인범은 한정문에게 다가가 물었다.

“장군, 저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한정문은 매우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최 사정, 윤임 대감님의 말씀을 너무 노여워하거나 또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게. 그분이야 왕세자의 외숙이니 당연히 왕권이 흔들리는 것에 예민한 것이니 이해하시게. 그리고 앞으로 친하게 지내보도록 노력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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