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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트레인-153화 (153/519)

153화

<눈꽃 속에 핀 혈화>

별 생각 없이 쇄자갑옷을 팔아 비상금을 챙기라고 한 사실이 떠올라 급하게 여각으로 돌아왔다.

“장 상병, 쇄자갑옷은 팔았나?”

“넷! 여기서 멀리 몽골로 장사를 간다는 상인이 있어 팔았사옵니다.”

몽골 상인에게 팔았다면 조금은 안심이다.

언젠가는 드러나겠지만 지금 당장은 비밀이 어쩌면 지켜질 수 있었다. 걱정하다가 안도하는 모습을 보자 장주한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리, 왜 걱정 돼서요?”

“걱정은 무슨.”

“나리, 건주여진족이 입던 갑옷이라 소인이 함부로 팔아먹으면 골치 아플 것 같아서요? 나리, 소인도 그런 정도는 생각하고 팔았습니다. 물론 조금 싸게는 넘겼고요.”

“됐어. 설화는 술에서 깨어났고?”

“넷! 사냥꾼 옷은 벗고 목욕하고 하녀 옷으로 갈아입었사옵니다. 나리, 그런데 설화가 진짜로 뛰어난 미인이네요.”

“뭐? 미인?”

첩자로 의심되는 여자가 미인이라는 말에 최인범은 즉시 미인계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어찌되었건 뛰어난 미인이라니 호기심이 생기고 있었다.

장주환은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넷! 얼굴에 뭐가 잔뜩 묻어서 그저 조금 예쁘다 할 정도로 봤는데 깔끔하게 목욕하고 하녀 옷으로 입었는데 너무 예쁘더군요.”

“그러냐?”

“옆에 두시고 부리시면 보기도 좋을 겁니다. 말 그대로 해어화입니다.”

“뭐라? 해어화? 장 상병은 전과 달리 말투가 점점 과장이 심해지는군.”

“아닙니다. 소인이 어찌 주인나리께 과장하는 말을 하옵니까? 직접 보시면 아마 깜짝 놀랄 겁니다.”

이렇게 호언장담하던 장주한은 급하게 다시 보고했다.

“나리, 마구간으로 가보세요.”

“왜?”

“소인이 몽골 상인에게서 아주 좋은 말을 샀사옵니다. 쇄자갑옷을 10벌을 주고 바꾼 겁니다. 홍 상병에게 줄 비상금은 소인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나누어 줬습니다.”

쇠자갑옷 10벌이나 주고 바꾼 말이라니 명마로 보여 거래를 성사시킨 것 같았다.

장주한이 이렇게 보고하자 최인범은 서둘러 마구간으로 갔다. 마구간에는 덩치가 큰 흑갈색의 말이 위풍당당하게 서있었다. 털빛도 곱고 눈빛이나 체구도 커서 마음에 쏙 들었다.

“오호! 좋아 보이네.”

“나리, 외람된 말이지만 전에 가지고 있던 흑선풍보다 더 좋아 보입니다. 나리, 새로 생긴 멋진 말이니 이름을 지어야죠.”

“털색이 핏빛처럼 약간 붉은 빛이 나니 흑혈풍이라고 지으면 되겠어.”

최인범이 전에는 애마 명을 흑선풍(黑仙風)이라고 지었다. 적에게 공격을 당한 이후라 그런지 더욱 강해보이는 이름인 흑혈풍(黑血風)으로 지었다.

마음에 드는 말을 구해 이름을 짓게 되자 장검도 흑선검(黑仙劍)에서 흑혈검(黑血劍)이라고 바꾸기로 했다. 두 번이나 기습공격을 당하자 전보다 냉혹해졌다. 그래서 무기나 애마의 이름을 살벌하고 강하게 바꾸었다.

전에는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의미로 선(仙)을 넣어 지었지만 이제는 죽음을 뜻하는 혈(血)을 넣어 조금 변한 것이다.

최인범은 어느새 조선과 접해서 사는 건주여진의 4개 부족과 관계가 깊어졌다.

요동부족은 족장을 직접 죽이고 통화부족은 족장에게 큰 부상을 입혔다. 길림부족은 대목장을 홀라당 털어버렸다. 그리고 연길부족의 경우는 백두상단을 통해 많은 말을 구입하는 친한 사이로 변했다.

‘모두 악연으로 변하게 될지 아니면 좋은 인연이 될지 정말 모르겠군.’

여진족인 설화는 통화에 근거지를 둔 족장이 보낸 자객이 틀림없었다. 그런 눈치를 잘 알면서도 옆에 두기로 한 이유는 여자를 차마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여자의 몸으로 자객을 자청해서 복수한다고 찾아왔다. 그러니 차라리 옆에 두고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내일 일찍 떠난다니 준비하고 푹 쉬도록 해.”

“넷!”

최인범은 방으로 들어왔다. 중국의 하녀들이 입는 무명옷을 입은 설화는 그가 들어오자 앉아 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최인범은 속으로 매우 놀랐다. 장주한이 장담한 그대로 평범한 무명옷을 입고 화장도 전혀 안한 얼굴이 마치 서광이라도 비치듯이 환하게 빛났다.

‘이야! 진짜로 예쁘군. 하지만 눈매가 보통이 아니라 성깔은 있어 보이네.’

설화는 아무 말 없이 공손하게 인사하고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몸에 달라붙은 옷차림이라 그런지 빠르게 움직이는 뒤태도 아주 미끈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설화는 푸짐하게 음식들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와 탁자에 올려놓았다.

설화가 가져온 음식은 작은 공기에 하얀 쌀밥. 반찬은 삶은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다. 모두 커다란 형태로 삶아 가져와 직접 칼로 잘라서 먹어야 한다.

최인범은 이미 세탁을 끝내 벽에 걸어 놓은 군복 안주머니에 들려 있는 두 개의 반월도를 꺼내 식탁으로 가져왔다. 오늘 생긴 반월도를 내밀며 말했다.

“이 반월도는 네가 가져.”

“예? 저에게 주신다고요?”

보석이 촘촘하게 달린 반월도를 넘겨주자 설화는 눈이 왕방울처럼 커지며 놀랐다. 그리고 매우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도 받기를 주저했다.

“왜? 싫으냐?”

“아뇨. 너무 귀한 반월도라.”

월화는 너무 황송하다는 듯이 넘겨주는 반월도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았다. 표정으로 보아 분명히 반월도가 무슨 용도로 사용되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족장이 자신에게 화살에 메어 날려 보냈던 작은 종이를 슬며시 꺼내 펼쳐 보였다. 이글의 뜻을 아느냐고 간접적으로 묻는 것이다.

- 일은반월 반월주왕 (一恩半月 半月主往)- 붉은 글씨를 바라보던 월화는 매우 놀라면서 참담한 표정으로 변했다. 짧은 순간에 여러 가지 표정이 얼굴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최인범은 복잡하고 많은 생각이 담긴 설화의 표정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흠! 반월도에 대한 문구를 보고 저렇게 갈등하는 표정을 보이니 설화와 반월도 사이에는 무슨 깊은 내막이 숨겨져 있는 것이 분명해.’

미모가 너무 뛰어나다는 점이나 또는 여진족을 지휘했다는 것을 고려해 보니 설화의 신분도 범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단순한 자객은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이 죽인 사람이나 혹은 족장과 깊은 관계가 있는 여자 같았다.

‘족장의 손녀가 될지도 모르겠어.’

자신이 허벅지를 뚫어버린 족장의 나이가 많으니 해보는 추측이다. 평범하지 않은 반월도라 쉽게 판단할 일은 결코 아니었다.

잠시 이런 생각을 하던 최인범은 설화가 가져온 고기들을 반월도를 이용해 모두 한 조각씩 잘라 백두에게 풀썩 던져 주었다.

“백두, 먹어!”

컹!

멍하니 식탁의 고기를 보고 침을 흘리던 백두가 고기를 주자 한 번 짖었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가볍게 냄새를 맡고 이내 아무 이상이 없다든 듯이 날름 먹었다.

먹고 나자 더 달라는 듯이 계속 꼬리를 요란하게 흔들었다.

그런 백두를 보며 최인범은 앞으로 고기 종류는 백두에게 먼저 먹이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독화살을 날린 놈들이니 독을 사용할 수 있어. 그러니 궁중에서 상궁들이 기미를 하듯이 먼저 백두에게 먹이는 것이 좋아.’

백두는 후각도 예민해 어지간한 독은 찾아내는 능력도 있으니 해보는 생각이다. 아울러 앞으로는 음식은 모두 설화를 통해 먼저 먹게 하고 그 다음은 백두 그리고 자신은 제일 나중에 먹기로 했다.

‘그건 너무 치사한 건가?’

최인범은 이런 저런 잡념을 떠올리면 백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윽고 잡념을 떨치고 나서 반월도로 고기를 잘라 밥과 같이 먹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던 설화도 들고 있는 반월도로 고기를 싹둑 잘라 백두에게 풀썩 던져 주었다.

‘어마! 안 먹네.’

식탁에 있던 똑 같은 고기를 잘라 줘도 풍산개인 백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식사하면서 최인범이 가끔 잘라주어 던져주는 고기는 잘도 받아먹었다.

설화는 이런 영악한 백두의 모습에 속으로 매우 놀라고 말았다.

‘보통 영민한 개가 아니야.’

주인이 주는 고기 이외에는 절대 먹지 않고 있었다.

설화는 복수하고 싶은 목적이 있어서 최인범에게 허술한 미인계로 일단 접근은 성공했다. 하지만 옆에서 항상 따라다니는 풍산개가 보통이 아니라 함부로 어떤 시도를 하기에 부담되었다.

‘개가 항상 옆에 있으니 암살하기도 어려워.’

그리고 아비인 아패록 족장이 최인범에게 써준 붉은 글씨나 반월도는 설화에게 많은 갈등이 생기게 하는 요인이다. 자신과 최인범이 하나씩 지니고 있는 반월도는 모두 건주여진 5부족장의 신분을 나타내는 증표다. 그러니 매우 중요한 권위 있는 신분 패이다.

‘원수에게 반월도를 주다니 나 보고 어찌 하라는 건지. 아버님도 참으로 너무 하시네.’

최인범이나 자신이 지니게 된 반월도에는 깊은 의미가 있었다.

오래전 대륙을 동북쪽에 거대한 제국을 이루던 금나라 때 압록강과 두만강에 사는 여진족에게 금나라 황제가 하사한 검이라 매우 소중했다.

전설에 의하면 하나의 원형인 물건으로 12개인 초승달처럼 조각난 반월도가 모두 모이면 금나라와 같은 큰 제국을 이루게 된다는 상징물이다. 그래서 반월도는 여진족의 족장이 죽거나 또는 후계자를 정식으로 지목할 경우에 물려지고 있었다.

반월도를 이자에게 준 뜻은 자신을 이자에게 시집보내겠는 뜻이 담겨 있었다.

‘아버님이 나를 이자에게 준다니 도대체 왜 이렇게 하시는 거야?’

아패록 족장은 조카딸이자 딸인 아리아에게 반월도의 주인과 혼인시키겠다고 약속한 사실이 있었다. 그 때문에 아리아는 지금 심하게 마음이 복잡하고 갈등하는 것이다.

붉은 글씨의 내용은 족장이 자의에 의해 반월도를 최인범에게 넘겼다. 그러니 전통을 따르게 되면 그가 부족의 후계자이자 사위인 자신의 남편인 셈이다.

‘아버님은 아진태에게 족장의 직위를 물려준다고 하니 결국 이 사내를 내 남편인 사위로 삼아 어린 아진태의 후견인으로 삼을 요량 같아.’

여진족의 후견인이란 왕정국가에서 나이어린 군왕 대신에 국정을 통괄해 통치하는 섭정왕과 비슷한 지위다.

아니 섭정왕보다 더 많은 권한을 지녔다. 족장이 소유한 모든 것에서 후계자 자리를 제외하고는 고스란히 물려받고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막강한 위치다.

‘원수인 이런 자를 남편으로 모시라면 오빠의 죽음은 너무 억울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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