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빠르게 달려오던 사람은 검은 머리가 치렁치렁했다. 웃옷이 조금 벗겨진 흐트러졌다. 더구나 흙이나 낙엽으로 뒤범벅인 상태다. 가죽으로 만든 허름한 옷이고 활도 등에 매고 있고 옆구리에 토끼가 끼어있어 분명 사냥꾼이다.
“악!”
정신없이 달려온 여자사냥꾼은 두 사람을 보자 짧은 비명을 토하며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최인범은 급하게 주변을 돌아보자 산위에 바지춤을 까 내린 사냥꾼 차림의 사내들이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을 발견하자 산속으로 재빠르게 도망쳤다.
정황상으로 보아서는 여자사냥꾼이 남자사냥꾼들에게 집단으로 겁탈당하다가 도망친 형국이다. 그러나 계속된 적들의 공격으로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다.
최인범은 모든 것이 자신에게 접근하기 위한 수작으로 보였다.
‘놀고들 있군. 이제는 여자를 내세워.’
이렇게 판단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쓰러진 여자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여자는 기절한 것인지 눈을 감고 사지를 쫙 벌리고 있었다.
이럴 경우 제일 급한 것은 여자에게 물을 먹여 깨워야 된다. 하지만 최인범은 빠르게 여자의 온 몸을 더듬었다. 무기를 숨길만한 곳을 더듬어 보자 장주한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판국에 여자를 더듬다니.’
장주한은 갑자기 나타난 여자의 정체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여자의 배위에 턱하니 걸터앉아 앞가슴이나 옆구리는 물론 사타구니까지 빠르게 더듬는 모습을 보자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런 동작은 누가 봐도 여자를 취하기 위한 전초 작업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단검 같은 무기가 수중에 없다고 해서 적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다. 일단 더 이상 몸을 수색하는 것은 중단하고 깨우기로 했다.
사타구니까지 확실하게 더듬던 최인범은 숨긴 무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슬며시 일어나며 명령했다.
“소주를 많이 먹여!”
“넷!”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 장주한은 소주를 많이 먹이라는 소리에 여자의 코를 잡고 입을 벌리고 호리병에 담긴 소주를 마구 부어버렸다.
‘여자를 술에 취하게 하고 취하시려나?’
이렇게 판단하고 들입다 부어버렸다. 독한 소주가 들어가자 여자는 이내 정신이 들어 바동거렸다. 하지만 코를 잡고 입을 강제로 벌리며 마구 부어버리는 소주를 모조리 먹을 수밖에 없었다.
5홉은 넘는 독한 소주를 뱃속으로 일시에 집어넣자 여자는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컥! 크컥!”
정신이 들어 일어서기는 했지만 술에 취해 몽롱해지고 있었다. 뱃속이 심하게 요동이 치며 이내 술기운은 빠르게 머릿속으로 치밀고 올라왔다. 땅이 하늘로 되고 하늘이 땅으로 변해 마구 뒤집어지는 현상에 너무 놀라 중심을 잡으려고 비틀거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 여자의 눈동자가 완전히 돌아가자 최인범은 부드럽게 여진말로 물었다.
“이름이 뭐냐?”
“나? 커억! 건주 아리아!”
이후 몇 가지를 물었지만 횡설수설만 했다. 대략 토해내는 말은 원수와 죽인다고만 반복했다.
최인범은 짐작이지만 건주여진의 아리아라는 여자가 암살을 시도했다는 정도로 이해했다.
‘너무 어설프게 나오네.’
자신 같으면 미인계를 쓴다면 더 치밀하게 준비를 했겠지만 너무 단순한 방법을 사용했다. 일단 아리아를 같이 데리고 돌아갈 생각으로 지시했다.
“내가 말에 태우고 갈거니 짐을 다른 말에 옮겨.”
“넷!”
최인범은 아리아를 말 등에 올려 앉게 하고 뒤에 타고 자리를 떠났다. 소주에 취한 아리아는 이미 인사불성인 상태라 꼭 껴안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빠른 속도로 말을 달려 드디어 사신단이 있는 요양에 도착했다. 백삼수는 상인이라 별도로 숙소를 정해서 지내고 있었다.
말도 달라져 4마리로 늘고 술에 취한 여자를 데리고 돌아오자 백삼수가 매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나리, 웬 술에 취한 여자죠?”
“그냥 술에 취해 길에 쓰러져 있어 주었다.”
“주워요?”
“왜? 술 취한 여자를 길에서 주어 와서 불만이냐?”
“그게 아니오라 홍 상병은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어서 깨어나면 어찌 된 일인지 물어보려고 하던 참에 나리께서 술 취한 여자와 같이 오니 이상하죠.”
백삼수의 말에 장주한이 급하게 물었다.
“홍 상병이 사경을 헤매다니?”
“아침 새벽에 화살을 맞은 말을 타고 도착했어. 뒤에 화살을 맞고 더구나 화살에는 독이 묻어 있었고. 유능한 의원이 독은 해독해서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아직은 깨어나지 못했고.”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일단은 모두 무사하니 천만다행이다. 적에게 공격당한 사실을 비밀로 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최인범은 백삼수에게 급히 지시했다.
“백 행수, 오늘 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
“넷!”
오늘 일이란 홍 상병이 독화살을 맞은 사건. 갑자기 말이 바뀐 사실이나 자신이 술에 취한 여자를 데리고 온 사실을 일체 발설하지 마라는 뜻이다.
최인범은 여각의 이층으로 아리아를 안고 올라갔다. 이미 만취 상태인 아리아를 커다란 침상에 눕히고 나서 장주한에게 지시했다.
“여자가 깨어나도 소주에 취해서 토설한 사실에 대해 일체 아는 척하지 마. 앞으로 저 여자는 설화라고 불러.”
“알겠습니다.”
“첩자의 의심이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고.”
“넷!”
최인범은 서둘러 군복과 쇄자갑을 벗고 평상복을 입었다. 평상복이란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 그리고 망건을 쓰게 된다. 속담에 ‘망건 쓰다 장파한다.’는 말이 있듯이 시간이 오래 걸려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홍 상병은 지금 어디 있나?”
“바로 옆방에 있사옵니다.”
최인범은 옆방 방으로 들어갔다. 마침 정신들은 홍성철이 힘들게 침상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침상 옆으로 다가가 앉으며 말렸다.
“그대로 누워있어.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나리, 요양에 거의 도착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독화살이 날라 왔습니다.”
“몸은 어떤가? 내일 사신 행렬이 일찍 떠난다고 하는데 말 타고 움직일 수 있겠나?”
“예, 내일 아침이면 충분히 움직일 수 있사옵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몸이나 추스르고 독화살에 당한 사실은 앞으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도록 해. 그리고 옆방에 있는 여자는 앞으로 설화라고 부르고. 그저 내 하녀 정도로 대해.”
“넷, 잘 알겠사옵니다.”
최인범은 장주한에게 지시했다.
“장 상병, 쇄자갑은 4벌만 남기고 모두 내다 팔아. 상인에게 쇄자갑은 누가 만들고 누가 사용하는지 잘 알아보고. 그 돈으로 설화가 입을 옷을 몇 벌 사오고 나머지는 모두 홍 상병에게 비상금으로 넘겨. 너는 아까 챙긴 재물이 있으니까 그것을 비상금으로 사용해.”
“나리, 잘 알겠사옵니다.”
“설화도 북경으로 같이 가니까 호위무사를 찾아가 군복과 개인 장구를 한 벌 챙겨 와서 주고.”
이런 지시에 장주한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나리, 설화를 옆에 두시려고요?”
“왜? 이상하냐?”
“아닙니다.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적에게 공격을 당하고 보니 항상 비상금을 소지해야 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부하들에게도 일단 비상금을 챙겨 주는 것이다. 자신이야 이미 많은 재물을 소지하고 있으니 상관없었다.
요양에는 명나라에서 특별히 마 시장을 열고 있었다. 그래서 최인범은 마 시장으로 가게 되었다. 혹시 마음에 드는 말이 시장에 나왔는지 살피려는 것이다.
웅성웅성.
마 시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장사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물론 여진족이나 기타 몽골 사람들도 보이고 활발하게 거래가 이루어졌다. 또한 말 시장 옆에는 소나 양 같은 가축들도 거래되었다.
여진이나 몽골에서 얼마든지 말을 살 수 있는 명나라에서 조선에게 많은 말을 조공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실 조선의 군사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이다.
마 시장에는 무기들도 파는 대장간도 있고 마구나 또는 갑옷을 파는 상점도 있었다.
‘여기가 제일 큰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군.’
당연히 쇄자갑옷이나 또는 철편을 이은 철갑옷도 이곳에서 거래되었다. 그리 많은 수가 거래되지는 않고 두어 개씩 종류별로 진열해 놓고 있었다.
마 시장을 돌아다녀 봐도 별로 마음에 드는 말은 없었다. 전에 애마로 사용하던 흑선풍이 워낙 좋았던 말이라 어지간한 말은 마음에 차지 않았다.
‘에이, 죽일 놈들이 말을 죽여서·······.’
잠시 이런 생각을 하며 마 시장을 돌아다니던 최인범은 눈을 크게 뜨고 쇄자갑옷을 입은 여진족을 살폈다. 그리고 뭔가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그가 놀란 이유는 자신들을 두 번째 공격한 여진족과 똑같은 장식인 쇄자갑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보아 같은 패거리가 분명했다.
그래서 슬며시 명나라 상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 갑옷을 입은 여진족들은 누굽니까?”
“조선 사람인데 잘 모르시는군요. 저들은 요동 남쪽 지역에서 요양까지 활동하는 건주여진족이죠. 저들은 지금 무장하기 위해 바쁘답니다.”
“무장을 하다니요?”
“저들의 족장이 오늘 갑자기 죽는 바람에 지금 소부족들이 서로 세력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게 생겨서 그렇죠. 한동안 요동지역은 서로 족장이 되려고 싸우니 소란스러울 겁니다. 우리 상인이야 무기를 팔아 돈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죠.”
“그렇군요.”
요동 반도로부터 압록강과 두만강에 걸쳐 분포된 여진족을 중국과 조선에서는 흔히 건주여진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모두 5개 족장이 거느리고 있었다.
서여진 3개 부족은 요양, 통화, 길림에 자리 잡고 있다. 동여진으로 불리는 2개 부족은 연길과 무단장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요양 남쪽에 근거지를 둔 서여진이 제일 세력도 강하고 명나라나 조선과 교역도 활발하고 친숙한 편이다.
명나라 상인은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표하자 신이 나서 묻지 않는 여진족들에 대한 정보를 모조리 토해냈다. 사실 최인범이 여진족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렇지 이런 내용이야 상식에 속했다.
결국 자신이 죽인 두목이 서여진의 족장일 확률이 높았다.
‘이거야 원 자꾸 만만치 않은 놈들을 원수로 만들기만 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