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순간 최인범은 어쩌면 족장이 보낸 것이 아니고 다른 놈이 암살을 지시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족장이 지시했다면 굳이 살인 멸구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조금 더 신중하게 판단해 봐야할 문제라는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이 문제를 잘 알아 봐야 되겠어.’
하얀 눈 위에 붉은 피가 보이고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죽은 시체를 확인하고 나자 적이 얼마나 와서 공격한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모두 12명이었군.”
나중에 오늘 공격한 무리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이라도 정확히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말들은 이미 멀리 달아나고 공교롭게 남아 있는 말이 한 필에 불과했다. 그러니 같이 사신단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는 틀렸다. 더구나 중간에 매복이라도 있으면 문제라 홍성철에게 급하게 지시했다.
“홍 상병, 네가 말을 타고 사신단으로 찾아가 백삼수에게 전해서 말을 가지고 와. 매복이 있을지 모르니 호위무사를 데리고 오고.”
“넷!”
“조심해서 가고.”
“알겠습니다.”
홍성철이 말에 올라 급하게 사신단이 있는 북쪽으로 내달렸다.
그가 멀리 사라지자 최인범과 장주한은 말 등에 있던 무기들을 모조리 챙겼다. 주변을 살피다가 완전히 허물어진 작은 성터가 보이는 곳을 발견하자 지시했다.
“여진족이 놓고 간 화살이나 무기를 모조리 챙겨서 저리 이동하자.”
“넷!”
얼마나 빨리 화살을 날린 것인지 죽은 여진족에게는 화살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여러 명이 남긴 화살이라 두 사람은 40발 정도씩의 화살을 챙길 수 있었다.
땅에 박혀 있는 화살까지 모조리 회수하다 보니 그래도 많은 수를 수거할 수 있었다.
“백삼수나 호위무사들이 아무리 빨라도 내일 새벽이나 혹은 아침이나 여기에 도착할 것이니 사슴고기도 챙기고 모조리 옮겨.”
“넷!”
투박하게 생긴 장창이 5개가 있어 그것도 모조리 챙겼다. 많은 무기와 물건들이라 몇 번을 오가며 부지런히 날랐다. 최인범은 주변을 다시 살폈다.
500보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마을이 보였다. 물론 더 멀리에는 작은 마을들이 간간히 보였다. 마을로 가려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마을이 더 위험할 수 있어.’
대부분 농촌마을이나 지금 상황에서 순박해 보이는 농민들이라고 믿을 수는 없었다. 그들이 언제 강도로 변해 떼로 달려들지 모른다.
근처에 작은 마을이 있으나 누가 적인지 모르니 함부로 마을로 들어가기가 거북했다.
성터로 보이는 곳에 가서 살펴보자 전에는 큰 성터지만 완전히 허물어지고 망루가 있던 곳과 같은 성터만 조금 남아 있었다. 성터는 거대한 모습으로 돌무더기만 뒹구는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문뜩 ‘이곳이 전에 안시성이던 성터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언덕진 곳이라 주변을 살피기도 좋으니 야영하면 되겠어.”
“넷!”
일단 밤을 보내기 위해 작은 천막을 치고 근처에 모닥불을 피웠다. 모닥불에 사슴고기를 구워 먹고 나자 사람이 모닥불 주변에서 자는 것처럼 모포로 위장해 놓았다.
여진족이 남기고 간 모포나 기타 덮을 것을 가지고 이동했다. 외부에서 숨어 있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망루로 들어가 벽에 기대어 있었다. 좁은 계단을 50여개 올라야 오르게 되는 약간 높은 망루다.
허물어진 성벽의 돌을 부지런히 날라 보다 더 몸을 숨길 수 있도록 했다. 그런 작업은 한참동안 진행되었다. 작업이 끝내자 움푹 들어간 곳에 몸을 숨기고 말했다.
“오늘 밤 잠자기는 틀렸어.”
“나리, 그래도 자야죠. 소인이 지킬 것이나 주무세요.”
“아니야.”
와글와글.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조용하던 농촌마을에서 사람들이 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죽은 사람들의 물건이나 또는 죽은 말을 가져가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애마인 흑선풍의 시체도 사람들이 신이 나서 해체해 가져가고 있다. 그런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자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에이, 아끼던 말이라 내가 직접 묻어는 줘야 도리인데········.”
두 사람은 조용히 각자 양쪽 방향을 살피며 조용히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이제 어두워진 밤으로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휘리릭! 휘리릭!
싸늘한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다소 따스하던 날씨가 또 다시 추워지면서 눈이 내리는 것이다. 그래도 곰 가죽으로 만든 검은 외투와 담요를 두툼하게 깔고 위에 푹 뒤집어쓰고 있으니 그리 춥지는 않았다.
주위를 계속 살피다 장주한을 바라보니 자꾸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졸지 마!”
상대방이 졸면 가끔 깨워주며 추운 겨울의 긴긴 밤을 지새우다 보니 너무 지루했다.
최인범은 너무 무료해 자신이 알고 있는 의학 지식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가급적 장주한이 이해할 만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지만 모든 내용은 그에게는 놀라운 말들뿐이다.
“나리,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고 실로 꿰매 틀어막으면 다시 살아요?”
“그래, 그러니 동물을 가지고 먼저 실험해 봐.”
“알겠습니다.”
별로 깊이 아는 의학 지식은 아니다. 하지만 계속 아는 만큼 설명을 자세하게 하다가 보니 시간은 제법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천연두를 예방하는 종두법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이제까지 숨기고 있다가 말해주는 것은 종두법을 알리며 명나라에서 배웠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조선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비밀이니 명나라에서는 함부로 발설하지 말고.”
“넷!”
명나라는 땅도 넓지만 인구수에서 너무 많으니 종두법까지 알게 되면 인구 증가를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옆에서 사는 조선도 문제지만 후일 지구 전체로 봐도 문제가 많았다.
“뙤놈들은 진짜로 인구가 너무 많아.”
막상 제왕절개 수술을 대충 말하고 보니 수혈에 대해도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수혈에는 반드시 필요한 혈액형도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 상병, 설사 배를 갈라 태아를 살릴 수 있어도 함부로 수술하면 안 돼.”
“알겠습니다.”
“그런 혈액형이나 수혈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더라도 종두법은 부작용이 그런대로 별로 없으니 기회가 생기면 한 번 시도해 보도록 해.”
“넷! 명나라에 가서도 시도해보겠습니다. 물론 종두법이 마마손님을 예방한다는 비밀이나 이런 의학을 저에게 알려준 분이 나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은 안하겠습니다.”
“부득이한 경우는 대충 명나라에서 서양에서 오게 된 서원이나 또는 심산유곡에 사는 의원에게 배웠다고 적당히 둘러대라고.”
“아하, 그럼 되겠군요.”
인간의 어떤 과학적인 발전은 대부분 사소한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된다. 최인범의 의학에 대한 설명을 듣는 장주한은 그야말로 눈빛이 빛나고 막혔던 뇌가 확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리는 정말 대단한 분이야.’
연신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며 주인인 최인범을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와! 나리는 백두산에 내려온 천제의 아드님이 분명해.’
자신이 지금까지 사노비로 살아왔고 세상의 과학적인 지식들에 대해 많이는 모른다고 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의학에 대한 지식 전수에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이란 어떤 계기로 굳은 결심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장주한은 지금을 계기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최인범에 대한 어떤 각오가 새롭게 생겼다.
‘노예라도 좋으니 평생 옆에서 모실거야.’
긴긴 밤은 의학을 전수하는 대화 때문에 빠르게 시간이 지나 어느새 새벽이 다가왔다. 여전히 검은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소록소록 내리고 있었다. 밤사이에 내린 눈은 발목이 푹푹 빠질 정도까지 수북이 쌓였다.
온 대지는 이제 하얀 눈으로 변하고 간간히 보이는 소나무에는 눈꽃들이 활짝 피었다. 아직은 조금 어둡지만 이제 곧 날이 밝아 오게 생겼다.
새벽이 다가오자 밤을 지새우며 너무 긴장한 상태로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차츰 날이 밝아지자 약간은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두 사람 모두 자꾸만 눈이 저절로 감겼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장주한을 보며 최인범 조용히 지시했다.
“안되겠다. 조금씩이라도 교대로 눈을 붙이자.”
“넷!”
하지만 그런 대화는 이내 멈추고 말았다. 갑자기 주변에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모닥불을 피워 놓은 곳으로 수많은 화살이 날아왔다.
쉬이익! 쉬익! 파파박! 팍!
천막은 물론 모닥불 주변에 위장해 놓은 담요 위로 무수한 화살이 박혔다. 적들이 또다시 더 많은 무리를 이끌고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순간 최인범은 ‘여기가 내가 죽는 자린가?’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적들은 긴장감이 풀리는 새벽이 되자 공격을 시작했다. 적들은 두 번이나 연달아 무수한 화살을 날린 이후에 말을 타고 모닥불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많은 화살이 박힌 담요를 들추어 보고 모두 위장된 것을 알자 크게 외쳤다.
“찾아!”
두두두, 다각 다각.
적들은 모두 50명이 넘어 보였다. 여진족답지 않게 기마병과 보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더구나 아까 자신들을 공격한 무리와는 전혀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장주한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리, 아까와는 다른 무리 같습니다.”
“쉿!”
재수 좋아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무사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숨을 죽였다. 그러나 그런 작은 소망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저기다!”
두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한 한 녀석이 크게 소리쳤다. 적들은 약간 높은 망루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일부는 두 사람이 숨어 있는 망루로 빠르게 다가왔다. 하얀 눈이 소록소록 내리는 가운데 새까맣게 달려들었다.
“가까이 오는 놈만 활로 잡아!”
“넷!”
아직도 약간 어둡고 눈까지 내려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멀리 있는 적에게 화살을 날려야 실패한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제일 가깝게 달려드는 놈들만 겨누어 화살을 날렸다.
팅! 쉬익!
“크악!”
팅! 쉬익!
“으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