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최인범은 전과 달리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미행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를 조심스럽게 미행하던 놈들은 사신단과 같이 가는 조선 상인에게 접근해 은밀히 최인범에 대해 알아보았다.
“저기 이상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왜인인가요?”
“아니요. 조선의 풍기라는 곳에서 사는 최인범이란 사람이요. 내가 듣기에는 국비장학생으로 북경으로 가서 공부하게 된답니다.”
“그렇군요. 그럼 같이 다니는 사람들은?”
“그야 양반이니 옆에서 시중을 드는 노비들이죠.”
“그렇군요. 너무 이상하게 생긴 검은 옷을 입고 다녀 신기해 보이네요.”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요.”
미행하던 무리는 최인범의 신분을 알아내고 필요한 정보를 입수하자 서둘러 미행을 멈추고 사라졌다.
한편 압록강 북쪽에 위치한 통화.
이고 통화에서 거점을 잡고 있는 서 건주여진의 부족장인 아패록은 커다란 침상에 누워 있었다. 허벅지를 크게 다쳤으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끙! 쉽게 일어나지 못하니 답답하군.”
아패록은 자신을 부상시킨 사내의 모습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사내를 보면 두려움과 함께 강하게 끌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찰을 겸해 조선 땅으로 사냥하러 압록강을 넘었다가 조선출신 무인에게 기습공격을 당해 목숨을 구걸해 살아남아 급하게 돌아왔다.
‘후우!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려와.’
아패록은 주변에 부하들이 있어 애써 태연하게 행동했었다. 그러나 속으로 간을 졸이며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난생 처음 보는 엄청난 무력을 지닌 저승사자 같은 무서운 적을 또 다시 만날까 너무 두려웠다. 덩치도 산만해 보이고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무력을 지녔다.
‘그런 뛰어난 무장을 휘하에 두면 무서울 것이 없을 거야.’
검은 옷에 검은 말 그리고 휘두를 때마다 약간 검을 빛을 발하는 장검은 모두 죽음을 나타내는 흑색이라 더욱 공포감을 느끼게 했다.
자신도 마상 무술이나 활 솜씨가 좋지만 전에 만난 적의 무술에 비하면 애들이 하는 하잘 것 없는 장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려 150보는 되는 거리에서 편전을 쏘아 정확하게 장수들을 골라서 치명적인 부위를 관통시켜 사살했으니 그의 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편전 솜씨가 그렇게 좋으니 나를 만나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을 거야.’
짧은 화살인 편전에 허벅지가 뚫려 버리자 앞으로 당분간은 말을 타고 어디를 다니기 힘들게 됐다. 손으로 상처를 어루만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사내가 준 약이 너무 좋아. 구할 수 있으면 더 구하고 싶군.’
다행한 것은 그가 자신에게 보내준 약은 상처치료에 뛰어난 효력을 보여 곪지 않고 쉽게 아물었다. 싸움은 끝났으니 부상당한 허벅지를 치료하라고 덕을 베풀어 주었다.
그런 특이한 행동에 아패록은 감탄하고 있었다.
‘비록 적이지만 대단한 인물이야.’
심복이자 조카인 무장을 둘이나 잃고 호위무장까지 죽는 바람에 자칫 권력 기반이 흔들릴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급하게 돌아와 자신들을 공격한 무리가 동여진족 같다고 발표해 당장의 위기는 모면했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라고 했다. 유력한 후계자 후보이던 조카인 장수들이 둘이나 죽어 버렸다. 그러자 허약한 자신의 어린 아들이 후계자로 쉽게 인정받는 분위기로 변했으니 사실 그리 나쁜 결과는 아니다.
‘아진태에게는 다행한 일이 되어 버렸어.’
허약하고 이제 겨우 6살로 어린 후계자지만 그래도 늦게 얻은 아들이라 애착심이 가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 사내가 아들을 옆에서 도와주면 좋은데.’
노회한 아패록은 무력이 뛰어난 조선 사람을 장차 아들의 후견인으로 삼고 싶었다.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서로 협조할 관계만 된다면 아들의 자리는 충분히 보장된다고 판단했다.
이때 측근으로 행정이나 재정을 담당하는 명나라의 진사 출신인 진명하가 들어왔다.
진명하는 아진태의 어미인 진유향의 오라비다. 젊은 나이에 등과 했으나 아비가 가정제에게 밉보여 참형을 당하자 화를 피하기 위해 어린 여동생과 같이 이곳까지 도망쳐왔다.
미모가 상당한 여동생을 족장에게 바치고 족장의 측근으로 지내고 있었다. 진명하는 정리한 서류들을 서상의 한쪽에 가지런히 놓았다.
족장의 4째 부인인 진유향은 이제 24살에 불과했다. 62세인 족장과 38년이나 차이 났다. 족장은 젊은 아내가 조금 버거워 정력이나 근력이 좋아진다는 호랑이의 생간을 먹으려고 조선 땅으로 갔다가 겨우 살아났다.
30대 중반으로 곱상하게 생기고 다소 유약한 진명하는 아패록이 누워 있는 침상으로 다가와 보고했다.
“족장님, 두 번째로 미행하기 위해 떠났던 부하들이 방금 돌아왔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그의 신분을 확실하게 알아냈나?”
“넷! 조선출신으로 이름은 최인범이라고 하옵니다. 아직 벼슬까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사신단과 같이 합류해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보아 북경으로 가는 중이 틀림없습니다.”
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었던 아패록은 약간 실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거야 처음 미행한 녀석들도 거의 알아낸 정보가 아닌가?”
“족장님, 그야 그렇지만 그때야 그저 추측이지만 지금은 다르옵니다. 확실하게 조선출신이고 이름까지 알았습니다. 조선인 상인들도 그의 벼슬은 정확하게 모르고 그저 사신단 일행과 같이 가는 유학생 정도로 압니다.”
“명나라로 공부하러 가는 유학생이라면 문인인데 그렇게 무술이 뛰어나다는 건가?”
“조선은 문인도 가끔은 무술이 뛰어난 사람이 있사옵니다.”
“그렇군.”
진명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족장님, 그 놈을 공격하기 위해 부대를 보낼까요? 북경으로 간다면 행선지는 확실하니 얼마든지 길목에서 매복을 설 수 있사옵니다.”
졸지에 외국 출신으로 여진족의 큰 무리에서 실권자가 된 진명하는 그를 죽임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다고 판단해 죽일 것을 권했다.
그러나 속셈이 훤하게 보이자 아패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섣부르게 행동하면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 몰라.”
“족장님, 동여진의 짓이라고 발표했어도 벌써 많은 사람들이 조선인에게 당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대를 보내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아패록을 이런 진명하의 건의에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직접 경험하고도 이제는 안전한 곳이라 그런지 그 사내의 무력이 전혀 겁나지 않은 모양이군. 그렇게 복수하고 싶다면 자네가 직접 부대를 데리고 가게. 내가 기마병으로 200명은 딸려주지.”
“예? 200명으로 그놈을 죽이라고요?”
“왜? 기마병 200명으로는 그를 죽이기는 어렵다는 건가?”
진명하는 막상 자신에게 200명의 부하를 데리고 가서 죽이라고 하자 더럭 겁이 났다. 순간적으로 200명의 기마병을 데리고 가서 죽일 수는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후우! 어림도 없어 보이네. 누가 몰래 접근해서 암살하면 모를까.’
하지만 옆에 따라다니는 부하나 또는 영악해 보이는 커다란 개도 만만치 않아 보이니 그 사내에게 접근하기가 쉬워보이지는 않았다.
대답을 못하는 진명하를 바라보던 아패록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진 대인, 그대는 병법을 배웠다면서 왜 그리 무모하게 강한 적과 정면으로 승부하려고 하나? 강한 적이란 가장 부드러운 방법이 제일 좋다는 것도 모르나?”
“족장님, 그럼 미인계를 쓰시려고요?”
“당연하지. 세상에 힘 좋고 무력이 뛰어난 사내치고 여자를 싫어하는 경우를 봤나? 아무튼 나는 너무 강해 보이는 사내를 야들야들한 미인으로 한번 상대해 보고 싶군. 그것도 재미있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소신이 바로 미녀를 모아 보겠습니다.”
잠시 이런 대화를 나누던 아패록은 자신의 세력권으로 점차 파고 들어오는 신흥세력인 흑풍족에 대해 물었다.
“흑풍족이라고 남쪽에 새로 생긴 부족은 지금은 어디에서 주로 약탈하나?”
“족장님, 그들은 지금 우리가 있는 서쪽보다는 동쪽으로 자꾸 세력을 넓히고 있사옵니다. 동쪽의 큰 목장 2개를 털어 말을 1000필이나 약탈하고 부족민을 1000명이나 끌고 갔다고 합니다.”
“뭐라 1000명이나 끌고 가다니 동여진 놈들은 그 사이에 뭐를 했고?”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목장 2개를 동시에 기습적으로 공격해 말을 약탈하고 목장의 목부들 30명만 죽이고 달아났다고 합니다. 퇴각하며 부족민들을 모조리 끌고 갔고요.”
“추적도 안하고?”
“추적이야 했죠. 너무 빠르게 공격하고 퇴각해버려 성급하게 추적하다가 매복에 걸려 부하 100명만 죽이고 그만 포기했다고 합니다.”
이런 보고를 받자 아패록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지시했다.
“당분간 흑풍족과 접전을 벌이지 말고 멀리서 관찰만 해.”
“넷!”
백두산 북쪽의 이도백하와 인접한 곳에 터전을 잡은 흑풍족은 빠르게 세력을 넓혀 백두산을 중심으로 점점 세력이 커가고 있었다.
아패록은 부상당한 상태에서 함부로 적과 전쟁을 벌이면 자신들이 불리하다고 판단해 자중하기로 했다.
진명하는 급하게 처리할 업무를 보고해 지시를 받고 나자 밖으로 나갔다. 큰 건물로 들어가 또 다른 인물인 족장의 조카딸을 만나고 있었다.
“아리아, 족장님의 허락도 없이 지금 떠나시면 안 됩니다.”
“아니? 오빠와 정혼자를 죽인 그런 원수 놈을 어찌 그대로 살려 둔단 말이요. 내가 직접 찾아가서 그놈을 죽이겠어요.”
“족장님은 그렇게 강한 적은 절대로 정면 승부로는 이기기 힘들다고 하시며 저에게 미인계를 쓰신다고 미녀들을 모아보라고 하십니다.”
“뭐요?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족내혼도 하고 형사취수제도 성행하는 풍습이라 아리아의 신분은 족장의 조카이면서 딸이다.
여진에서 제일 미인이란 칭송을 받던 어미는 남편이 죽자 형인 족장과 재혼했다. 죽은 조카 한 명도 그녀의 오빠로 똑 같은 위치라 무용도 뛰어났지만 후계자로 지목된 이유가 되었다.
아리아는 진명하에게 배워서 북경어도 잘하고 한학도 알고 강한 혈통이라 무술도 뛰어난 다혈질인 여자다. 이제 20살이라 다소 혼기가 늦은 편이다.
오빠와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정혼자가 죽어 버리자 아리아는 새로운 남자를 찾아야할 처지다. 아무튼 친오빠와 정혼자를 죽인 사내가 북경으로 가고 있다니 복수를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 몸에게 여자를 바치다니 그건 안 됩니다.”
“아리아님, 족장님의 뜻은 확실합니다. 그 사람과 절대 다투지 말라는 엄명입니다.”
“그래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진명하는 원수이자 자신이 지금처럼 출세한 배경으로 판단한다면 은인인 최인범의 무력에 대해 설명하며 다독이고 있었다.
“그는 워낙 뛰어나서 매복해서 공격하는 방법으로는 죽일 수 없어요.”
“그럼 어떤 방법이 좋죠?”
“족장님 말씀대로 미인계가 최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