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설명을 자세하게 들은 김안국은 놀란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렇게 되면 왕권이 너무 허약해지지 않나?”
“제 생각에는 전혀 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 어차피 군수나 읍 면장을 주상전하께서 직접 입명하니 별로 문제가 될 수는 없지요. 더구나 조선이야 명나라처럼 큰 나라도 아닌데 그런 정도의 권한을 군수에게 준다고 해서 지금과 달라질 것은 별로 없다고 봅니다.”
“그러다가 특정지역에서 반란이라도 나면?”
“아하, 그걸 염려하시는군요. 군대야 군왕이 직접 임명하는 별도의 조직으로 만들어야죠. 지금처럼 군수나 읍장 면장이나 도지사가 군대를 지휘하는 형식이 아니고요.”
“그런 방식이면 큰 문제는 없겠군.”
이렇게 설명하고 나자 최인범은 추가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대감,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양반들에게 면세 혜택을 주는 것을 버려야하고 또한 화폐가 전국적으로 완전히 유통되고 세금도 화폐로 걷어야 하니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라, 제도를 바꾸려면 그런 문제점이 남아 있군.”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가는 중에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듣고 있던 윤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네, 무서운 생각을 가진 사람이군. 나라를 완전히 뒤집어엎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윤임의 이런 말에 최인범은 아차 싶었다.
문뜩 호쾌한 시 한편을 가지고 트집을 잡아 역적으로 몰아 억울하게 죽은 남이 장군의 경우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 늙은이가 왜 생트집이야.’
뭔가 속이 뒤틀려 트집을 잡으려는 심보가 보였다. 자칫하면 별로 깊은 생각도 없이 던진 말 때문에 요상한 구설수에 올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내 응수했다.
“대감, 제가 나라를 뒤집어엎다니요. 잘사는 나라로 만들려면 그런 방식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거죠. 별 다른 큰 이유는 없습니다.”
“자네가 지금 구상하는 제도는 조선의 근간을 흔드는 큰일이란 것을 모르나?”
“대감, 꼭 그렇게 해보고 싶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행정구역이 변하면 행정력이 지방까지 쉽게 전파되지 않을까 해서 해본 생각입니다. 공연히 너무 확대해서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최인범은 속셈을 조금 드러냈다가 기겁해서 얼른 쓸어 담아 버렸다. 사실 최인범은 지금처럼 이런저런 눈치를 봐야하는 조선 조정으로 들어가서 관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시기와 모략에는 견디기 힘들어.’
대가 약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하고자하는 목적을 이루려면 살아야 한다. 누구처럼 고고하게 버티다가 졸지에 사약 받고 죽는 어리석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래 살아남아야 뭐라도 이루고 죽지.’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살아남는 자가 진정한 강자라고.
조선은 군왕이 직접 의지를 가지고 나서도 개혁이 쉽지 않았다. 무리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던 사람들은 졸지에 역적으로 몰려 죽어버린 경우가 많으니 매우 조심스러웠다.
‘이거 윤임이 나중에 시비를 걸지 모르겠군.’
최인범은 윤임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니 이내 다른 말을 토했다.
“저는 여행을 다니기 좋아하는 성품이라 장사나 하면서 여진 땅을 가보고 싶습니다. 또한 이렇게 명나라로 여행하고 가능하면 왜로 가보고도 싶습니다.”
“왜도 가보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물론 이번 기회에 북원(몽골)로 갈 수만 있다면 가보는 것도 좋고요. 저는 아마 평생을 떠돌다가 객지서 죽을 겁니다.”
방랑벽이 심하니 벼슬에도 관심이 없으며 자연히 권력에도 욕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공연히 트집을 잡지 말아달라는 뜻이다.
그러자 윤임은 뭔가 경계하던 눈초리를 슬며시 거두며 가볍게 응수했다.
“자네는 방랑벽이 너무 심하군. 관리로 살기는 어렵겠어.”
“대감, 제가 생각해도 조금 그런 경향이 심한 편입니다. 그래서 저는 혼인도 가급적 30살 정도에 해볼까 생각합니다. 그전에는 마음대로 외국으로 다녀보고 싶고요. 혼인하면 아무래도 아내나 자식 때문에 답답하게 집에 붙어 있어야 될 일이 많아지니까요.”
“내가 듣기에는 혼인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리는군.”
“안한다는 것은 아니고 나중에 하게 되면 30살은 넘어서 해본다는 뜻입니다.”
“그게 그 소리가 아닌가?”
다분히 주상이 거론하고 있다는 부마도위를 거절하고 싶어서 토해내는 말이다. 그렇다고 여자를 옆에 두고 싶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렇게 답하며 요즈음 들어 자꾸 여자가 꿈에 나타나 조금은 변했다.
‘이걸 해소할 방법이 없나?’
치미는 욕정을 해소할 길이야 있었다. 다른 양반들처럼 기생들과 접해도 된다. 또한 사냥을 통해 날고기를 먹으면 해소되기도 한다.
그러나 최인범은 전에 접했던 여자의 기억 때문에 기생을 품고 싶은 마음은 지금은 별로 없었다.
‘기생을 품었다가 애라도 배면 나중에는 진짜로 머리 아파.’
자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은 서얼차별이란 무거운 굴레가 있으니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최인범은 한 곳에 머물면서 살고 싶지 않은 이유는 어떤 속박이 싫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도 있지만 신품종을 구해보려고 여행을 다닐 생각이 있었다.
최인범은 문익점이 목화씨를 한반도로 들여와 백성들의 삶을 크게 개선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조선으로 들여와 뭔가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작물을 찾아볼 생각이다. 그러자면 자연히 멀리 외국으로 여행을 다녀서 구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야 원하는 신품종을 구할 거야.’
처음에는 조선의 토종 식물만으로 개량을 통해 바꾸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품종 개량이 쉽게 되지도 않고 오랜 시간이 걸리니 생각을 조금 바꾸게 되었다.
‘개마고원이나 함경도, 평안도를 발전시키려면 반드시 감자를 들여와야 해. 그리고 남쪽에는 고구마를 공급하고 고추도 들여와야 하고.’
중요한 신품종으로 담배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백해무익이라니 들여올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세계적인 추세로 보아 담배는 언젠가는 조선으로 들어올 품목이라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졸지에 담배를 사느라 재물을 외국으로 버릴 수도 있으니 그건 결정이 쉽지 않겠어.’
자신이 생각한다고 뜻대로 모조리 이루어 질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나서서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 뭔가 해보고 싶은 일이야 너무도 많았다.
최인범은 굳이 그런 사실을 남에게 발설할 이유는 없었다. 공연히 김안국의 물음인 부국강병책에 대해 엉겁결에 답변하다가 윤임에게 발각 됐다.
자칫하면 그런 식으로 남의 주목을 받게 될 수 있어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저는 잠시 근처로 가서 사냥이나 할까 합니다.”
“알았네.”
최인범은 김안국과 떨어져 후미에서 따라오는 두 위생병에게 다가가 지시했다.
“우리 사냥이나 가자.”
“넷!”
최인범과 부하들은 평상복을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휴대하기가 다소 불편한 물건이나 배낭은 모두 사신단의 후미를 따라가는 백삼수에게 넘겼다.
“백 행수, 북경으로 가서 돈 벌 준비는 잘 하고 있냐?”
“넷! 여러 가지 방법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으니 너무 염려 마세요.”
“알았어.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배배 꼬이면 너는 어찌될지 잘 알지? 돈 많이 벌 구상을 잘 검토해서 내수사에서 빌린 재물은 후하게 이자 쳐서 갚아.”
“알겠습니다.”
최인범은 무거운 장검인 흑선검과 강궁으로 무장하고 흑선풍에 올라 봉황산으로 향했다. 봉황산은 고구려의 오골산성이 있던 곳이라 올라가서 요동 벌판을 자신의 눈으로 살펴볼 생각이다.
“헉! 헉! 주인님 산에는 왜 올라가요?”
“정상에 오르면 경치가 보기 좋잖아. 지도 그리기도 좋고.”
봉황산은 해발 800미터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곳 요동지역에서는 제일 높고 바위로 이루어진 가파른 산이다. 중간에 말에서 내려 가파른 산을 타고 빠르게 올라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인 거대한 바위에 올라 싸늘하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서쪽을 바라보았다. 낮은 구릉들이 이어지는 넓은 요동 벌판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광활한 요동 벌판을 바라보자 가슴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드넓은 벌판을 호령하면서 말을 달리던 조상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후우! 이 넓은 곳이 이제는 남의 땅이라니.’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순간 가슴이 탁 막혀왔다. 압록강을 넘어 오며 위화도를 보고 느끼던 아쉬움이 밀물처럼 다시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찾고 싶은 조상들이 살던 고토(故土)라 마음이 무척 쓰려왔다.
‘그때가 만주를 공략하기 좋은 때였는데.’
하지만 자금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에는 압록강과 두만강 남쪽의 땅인 한반도라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막아내야 하는 처지다. 더구나 무슨 큰일을 크게 벌이기에는 아직은 자신에게 힘이 너무 부족한 형편이다.
“크으아아아! 크으아아아!”
갑자기 호랑이가 토해내는 소리와 비슷하게 고함을 쳤다. 지시를 받아 주변 산천을 그리던 홍성철이 화들짝 놀랐다.
‘호랑이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호랑이처럼 괴상하게 고함치네.’
뭔가 탁 막히는 기분이라 자신도 모르게 서쪽의 요동 벌판을 향해 고함 쳤다. 우렁차게 고함을 치고 보니 조금은 답답하던 숨통이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산에서 천천히 내려오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기회가 생긴다면.’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르지만 이곳을 조선의 땅으로 만들고 싶었다.
봉황산에서 내려온 최인범은 이후 요동지역을 지나면서 수시로 사냥을 핑계 삼아 고구려나 대진국에서 건축한 고성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살폈다.
요동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조상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다가보니 그의 결심은 자꾸 굳어지고 있었다. 기회가 생긴 다면이 아니라 그런 좋은 기회를 자신이 만들고 싶었다.
‘그게 한판 벌여 보자고.’
이후 최인범은 사신단의 앞에서 하루 먼저 지역을 돌아보며 정찰을 겸해 이동했다. 그리고 사신단 행렬이 도착하면 하루 뒤에 출발해 다시 앞장서서 달려 전방 지역을 살피는 방식이다.
사신 행렬의 이동 속도가 너무 느리니 갑갑했다. 그리고 마적들을 출몰을 사전에 막아 보려고 수시로 주변을 직접 수색하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런 그에 행동을 유심히 살피는 무리가 있었다.
최인범이야 일정한 어떤 목표나 일정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미행하는 무리는 때로는 사신단의 앞에서 가다가 뒤에 있다가 하니 참으로 어지러운 행보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매복해서 공격하기도 쉽지 않겠어. 앞장서서 가다가 또는 뒤에서 따라가니까.”
“그러네요. 더구나 상단에 있는 호위무사도 무술이 제법 뛰어나 보이고요.”
요동에 들어서자 주변이 모두 여진족이나 또는 명나라 사람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