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최인범은 예정보다 하루 빠르게 도착한 사신 행렬 때문에 급하게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갓도 구해서 쓰고 의주관아로 갔다.
관아의 동헌으로 가자 정사나 부사 그리고 서정관이 다들 놀란 표정을 지으며 최인범을 바라보았다. 한정문이 급하게 다가와 물었다.
“자네, 한양을 들려서 오지 않았나?”
“예, 개마고원에서 무술을 수련하다가 바로 왔어요. 뭐 그게 이상한가요?”
“허어! 이 사람을 보게. 한양으로 가서 주상전하를 뵙고 와야지. 직접 여기로 오면 어쩌나?”
한정문이 난감해 하는 이유는 최인범의 경우 한양으로 가서 주상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사신단에서 무슨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교서를 받고 그에 따른 신분패를 받아야 국경선을 넘을 수 있다.
최인범은 지니고 있는 교서를 넘겨주며 말했다.
“이 교서라면 명나라로 갈 수 있지 않나요?”
“정사 대감께 교서를 보여 드리고 상의해보지.”
조선 조정에서는 진하사로 정사에는 김안국, 부사에는 윤임을 보냈다. 서장관으로는 예문관 응교인 양진묵을 같이 가고 있었다.
최인범이 한양을 들리지 않고 의주로 오게 되자 한정문까지 포함해 4명의 사신단 고위관리들이 모였다. 서로 의견을 나누며 최인범의 역할에 대해 나름 해석했다.
윤임은 최인범에게 호의적이다가 중전이 부마도위를 삼으려고 적극적으로 나서자 마음이 약간 변했다. 그래서 약간 홀대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최 사정은 무술이 뛰어나니 상단의 호위무사는 어떻습니까?”
그러자 한정문은 즉시 반대하는 의견을 말했다.
“상단의 호위무사로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겸교직이라지만 사정이란 벼슬을 지녔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4명은 최인범을 어찌 해야 하는지 논의가 있었다.
주상께서 주목하는 무관이란 체면이 있어 상단의 호위무사로 정할 수도 없었다. 또 그렇다고 사신단을 호위하는 군관으로 정하기도 다소 애매했다.
교서의 내용을 이리저리 분석해 봐도 난해했다. 어떤 직책이 정확하게 명시되지 않아 이런저런 논의를 하다가 결국 양진묵이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주상전하께서 별도로 여비도 줬으니 국비유학생 신분이 제일 좋겠습니다. 주상 전하의 명령이 없이 함부로 직책을 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 그렇게 정합시다.”
서장관은 사신단의 행적을 일일이 기록하기 때문에 양진묵은 빠르게 이런 결정을 명확하게 정리했다.
“최 사정은 우리와 같이 동행하지만 사신단 일원으로는 포함시키지 않는 국비유학생으로 기록하죠. 그리고 그의 신분패는 이미 지니고 있는 마패로 정하고요.”
“그것도 그렇게 정합시다.”
약간 논란이야 있었지만 사신단에서의 최인범의 위치는 정확하게 정해졌다. 고위직인 관리들과 같이 가면 불편하다고 판단한 최인범은 이런 결정을 듣자 재빠르게 한정문에게 말했다.
“장군, 주상전하께서 주신 여비도 있으니 저는 따로 주막에서 지내죠. 압록강을 넘어갈 때 사신단으로 합류하겠습니다.”
“알았네. 그렇다고 너무 개인행동을 하면 곤란하니 항상 사신단 주변에서 있어야 하네. 압록강 너머에 요즈음 마적이 늘어나서 위험하다니 우리와 너무 떨어져서 이동하지 말고 항상 조심하게.”
“넷!”
최인범은 사신단의 정사와 부사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서둘러 주막으로 돌아왔다. 공연히 꾸물거리다가 윤임이나 한정문이 부마도위 이야기를 꺼내면 머리가 아프기 때문이다.
윤임은 이미 부마도위를 시킬 마음이 없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정치란 살아 있는 생물과 같아서 수시로 상황에 따라 급변하고 있다는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주막으로 돌아오자 한양이나 함경도에 있어야 할 백두상단의 행수인 백삼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 네가 여기는 웬일이냐?”
“나리, 저도 명나라로 장사하러 같이 갑니다.”
“누가 너를 명나라로 데리고 가는데?”
명과의 교역은 이득이 많은 사업이다. 그래서 의주에 있는 의주상인들이 거의 독점하고 아주 일부는 개성상단이 교역하고 있었다. 그러니 막강한 권력의 배경이 없으면 명나라로 가서 장사할 수가 없었다.
“한 장군께서 저에게 같이 가자고 해서 왔어요.”
“명나라로 뭐를 가져가 팔려고?”
“나리, 백두상단은 안동마포와 한산모시를 가지고 갑니다. 그래서 호위무사를 겸해 10명이 말 50필에 물건을 가지고 가고요.”
최인범은 회계를 담당하는 월녀가 보이지 않자 물었다.
“월녀는 어디다 버려놓고 너만 왔어?”
“나리,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나리의 여동생인 월녀를 감히 버리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그럼 월녀는 지금 어디서 뭐를 하는데?”
“나리, 월녀야 지금 한양을 떠나 한창 함경도의 회령으로 가는 중일 겁니다. 전에 거래한 동여진에게 면포와 소금을 팔고 말이나 가죽을 사려고요. 이번까지 직접 가서 교역을 성사시켜 정산하면 앞으로 동여진과 교역은 사원이 담당하고 월녀는 한양의 시전에서 자리를 잡아 장사하게 되옵니다.”
월녀가 여전히 동여진과 교역하며 명나라로 가는 상단에도 많은 물건을 가져간다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더구나 한양의 시전으로 진출한다니 자금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여진과의 교역에서 재물을 많이 모았다고 해도 그런 정도로 벌지는 못했다.
그래서 명나라로 사가는 물건의 자금 출처가 궁금해 급하게 물었다.
“명나라로 많은 말에 짐을 싣고 간다며? 그런 물건을 살 재물이 어디 있어서?”
“나리, 사실 제가 명으로 가져가는 물건은 모두 내수사에서 저에게 현물로 빌려준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백두상단의 명의로 내수사에서 빌린 것이죠. 그러니 상단주인이신 나리께서 내수사의 자금을 빌린 것이 제일 정확하고요.”
“뭐? 내수사에서 빌린 물건이라고?”
“그렇습니다. 명나라로 가져가 팔고 다시 물건을 사와서 한양에서 팔게 되면 이득금의 반은 내수사로 넘겨야 하는 계약을 했어요.”
내수사(內需司)란 궁중에서 쓰는 미곡, 포목, 잡화, 노비 등 왕실 재정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조선왕조를 개국하며 고려왕실에서 물려받은 재산과 이성계 가문의 사유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됐다. 내수사의 재산은 왕실의 금고이자 주상의 비자금인 셈이다.
최인범은 순간 자신이 이미 코가 단단히 끼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분명 주상이 자신을 붙잡기 위해 물량 공세로 벌이는 고도의 술수 같았다. 재물 욕심이 많은 백삼수가 또 자신과 상의도 하지 않고 주상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어버렸다.
은근히 뿔이 난 최인범은 버럭 소리쳤다.
“어휴! 멍청한 놈! 네 놈이 내 인생을 완전히 물 말아 먹는다.”
잘했다는 칭찬을 기대하다가 이런 무지막지한 소리를 듣자 백삼수는 항의하듯이 퉁명스럽게 응수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죠? 제가 나리의 인생을 망치다니요?”
“너는 왜 내가 시키지 않는 사업을 벌이고 그래. 백여우! 너는 이번에 명나라로 가서 재물을 많이 벌지 못하면 내 손으로 죽는 줄 알아.”
“알겠습니다.”
최인범이 자신을 백여우라고 부르자 백삼수는 아차 싶었다. 그렇게 별명을 부를 때는 상당히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거 뭐가 잘못된 모양이군.’
주상께서 많은 재물로 자신을 압박하자 최인범은 같은 방법으로 재물을 통해 주상이 쳐놓은 그물을 벗어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백삼수에게 다부진 목소리로 지시했다.
“백여우, 너 명나라로 가서 홀라당 벗고라도 재물을 많이 모아. 내수사에서 빌린 자금을 2배로 쉽게 갚을 수 있는 재물을 모아. 안 그러면 명나라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여 버리고 혼자 돌아 올 것이니 명심해.”
“두 배로 갚는 다고요?”
“그래, 그래야 된다.”
노골적으로 말하자 백삼수는 겁이 났다. 표정으로 보아 그냥 던지는 헛소리가 절대 아니었다. 부자가 빨리 되고 싶어 먼 명나라까지 가서 장사를 하려다가 졸지에 이역만리서 불귀의 몸이 되게 생겼다.
그러나 최인범이 벌거벗고라도 재물을 모으라는 말에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아하, 벗고 벌란 말이지. 그렇다면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
백삼수도 최인범의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래서 급하게 제안했다.
“나리, 혹시 비자금으로 가지신 재물이 없어요? 있으면 저에게 빌려 주세요. 삼베나 모시는 내수사도 다 아는 거래니 다른 물건을 사가게요.”
“알았어. 그럼 호피도 네가 가지고 가고 은괴도 네가 가지고 가라.”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장사를 벌여 돈을 버는 일이야 백삼수가 솜씨가 좋으니 준비해둔 은괴는 모조리 넘겼다. 자신들이야 수시로 사냥을 해서 생활해도 되고 두 의무병은 침술로 밥이야 먹을 얻어 정도는 되기 때문이다.
사신단이 의주에 오면 거창하게 잔칫상을 차려 관기인 기생들을 불러 객고를 풀게 된다. 객고란 여행으로 쌓인 몸 안의 노폐물을 방출해 낸다는 뜻이다. 물론 푸는 방법이야 사람의 취향에 따라 가지가지다.
고위관리들이 그러는 동안 역관은 먼저 압록강 너머로 가서 명나라로 가져가는 물건이나 사람들의 명단을 제출해 수결을 받아야 된다. 입국 심사를 끝내야 비로써 월경하게 되는 것이다.
사신단이 객고를 푸는 동안 최인범은 명나라로 가서 써먹어야 되는 북경어를 배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월세를 살던 조선족에게서 북경어를 조금 배워서 알고 있었다.
그가 북경어를 배우는 곳은 이곳으로 오는 명나라 상인들이 모여 마작을 즐기는 기루다. 기방이 아니고 기루라고 부르는 이유는 2층으로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이다.
“저도 같이 합시다.”
“좋소!”
이제 재물도 없으니 그저 작은 용돈 벌이도 안 되는 판돈이 걸리는 마작을 두며 북경소식도 주어 들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혹시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선 간을 보는 거야.’
대체적으로 명나라는 역사서에 나타난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상인들의 말에 의하면 몇 가지 자신이 역사를 잘 모르기도 하지만 새로운 소식도 들었다.
이번에 혼인을 한다는 공주는 가정제의 여동생이다. 친여동생은 아니고 배다른 공주로 그녀를 몽골의 추장에게 시집을 보낸다고 했다.
몽골이 자주 침범하자 화평하자는 뜻으로 공주를 시집보내며 몽골의 관습에 따라 많은 상등 말을 몽골로 보낸다는 내용이다.
‘정말 어리석은 황제군. 그렇지 않아도 몽골에는 말이 많아 몽골기마병으로 북경이 수시로 위협을 받는 상황에 좋은 상등 말을 그곳으로 보내다니.’
남의 나라 일이지만 말을 2000필이나 그렇게 소모한다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잡기에 능한 최인범은 명나라의 상인들과 마작을 두어 아주 적은 돈이지만 명나라 은화를 조금 땄다.
그리고 명나라의 북경으로 가면 흔히 바둑으로 내기를 많이 둔다는 정보도 듣게 됐다. 명의 조정에서 영향력이 많다는 몇몇 사람의 이름도 알아냈다.
이렇게 기본적인 정보를 수집하면서 기루에서 보내는 중에 백삼수가 찾아와 보고 했다.
“나리, 빨리 나루로 가야합니다. 이제 떠납니다.”
“알았어.”
최인범은 급하게 기루를 떠나 주막으로 가서 말을 타고 의무병들과 같이 나루로 갔다. 나루에는 이미 여러 척의 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