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실 복수하기에는 주변에 수하들이 별로 없으니 지금이 제일 적당할 것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여진족 무리를 잘못 건드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됐다. 그런 느낌이 들어 부하들에게도 아무런 내용도 설명하지 않았다.
‘나중에 전쟁이라도 터지고 내 행동이 널리 알려져 문제가 되면 골치 아파지니 당분간 부하들에게도 비밀로 덮어두자고.’
너무 귀한 보석이 달린 반월도나 목걸이를 획득했다. 그 때문에 자신이 공격해 크게 부상당한 족장이 평범한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쉽게 많은 재물을 놓고 가는 것으로 보아 세력이 만만치 않은 큰 부족을 이끄는 족장 같아.’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겁을 먹을 상대는 아니다. 하지만 조선의 조정에서 어찌 나올지 모르니 그것이 은근히 걱정되었다.
조선에서 역적 누명을 쓰면 자신이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니 그것이 제일 자신으로는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다. 모든 것을 버리고 타국으로 날라 버리기도 그렇고 아무튼 그런 사태는 벌이고 싶지 않았다.
잠시 이런 생각을 하던 최인범은 심심해서 장주한에게 지시했다.
“장 상병, 나가서 장기나 구해서 오지.”
“넷!”
겨울의 밤은 너무 일찍 시작되고 길기만 했다. 무료해서 잠자기 전에 장기나 둘 생각이다.
밖으로 나갔던 장주한이 장기를 들고 들어오자 최인범은 아주 쉬운 박보 장기를 늘여 놓고 권했다.
“두 사람이 한번 풀어 봐.”
“넷!”
기회에 박보장기 수를 배우게 생긴 두 사람은 신이 나서 장기를 두었다. 패하는 사람에게는 어김없이 잡스러운 심부름을 시켰다.
“나가서 밤하고 구워 먹은 화롯불 구해 오고 주변에 누가 있는지 돌아 봐.”
“넷!”
미행하던 여진족들이 있었으니 주막 주변을 살펴보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시간을 때우기는 장기나 바둑처럼 좋은 것은 없었다. 실력 차이가 너무 커서 직접 같이 두면 재미가 없으니 박보장기만 계속 늘여놓고 풀게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장기를 두다가 보니 문뜩 중국으로 가서 내기바둑을 두어 돈을 벌면 어떤가 하고 생각했다.
‘큰 나라라 바둑 고수가 많겠지만 그래도 한 번 시도해 볼만해.’
최인범은 많은 숨은 재주가 있었다.
하긴 오래 시간을 소비하고 지냈던 기원이 어디 바둑만 두나? 사람이 모이면 마작도 하고 카드도 하니 잡기에 해당하는 놀이야 많이 알고 있었다.
조선은 이미 도박 금지령이 내려 내기바둑으로 돈을 벌기가 어렵게 됐다. 하지만 명나라는 황제 때문에 놀이 문화나 문학과 미술 등은 이 시절에 많이 발전했다.
‘어쩌면 감수성이 예민한 성품인 사람이 너무 권력의 무게가 무거운 황제를 하다가 보니 다소 요상하게 변했는지도 모르지.’
이윽고 박보장기 두는 재미도 시들해지고 밤이 깊어지자 자리에 누었다. 많은 후궁들을 데리고 사는 가정제를 생각하며 잠이 들어서 그런지 별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양귀비인지 서시인지 혹은 서기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미녀들과 벌거벗고 목욕하는 꿈을 꾸게 되었다. 얼마나 진하게 꿈속에서 노는지 그는 안하던 잠꼬대로 심하게 했다.
“빨리 엉덩이 까고 엎어져!”
건장한 젊은 몸으로 여자를 전혀 주변에 두지 않는 생활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잠을 자다가 이렇게 크게 외치고 있었다.
자다가 놀라 깬 두 사노비는 기겁하며 엉덩이를 감싸고 말았다. 잠결에 주인이 자신들보고 엉덩이를 까고 엎어지라는 소리로 들려 너무 놀랐다.
‘혹시 주인님이 남색을 즐기시나?’
아무튼 세상사에서 특별한 사람은 때로 특별한 성행위를 즐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두 의무병은 이런 생각이 문뜩 스친 것이다.
최인범은 꿈에 미녀가 여럿이나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제 여자에게 관심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거의 길이 아닌 곳으로 이동했다. 이제부터는 길이 어느 정도 잘 나있고 강변에는 작은 마을들이 많았다.
길이 좋아지자 일행을 빠르게 말을 몰아 서쪽으로 이동했다.
압록강은 이곳부터는 중하류에 속해 물살이 다소 약해지고 있다. 그 때문에 주변에 평야지대가 조성되어 작지만 국경마을들이 많았다.
최인범 일행은 압록강 강변 쪽으로 난 길을 타고 서쪽으로 이동하며 때로 사냥도 했다. 청둥오리나 사슴이나 고라니들을 잡으며 야영하거나 주막이나 민박하며 빠르게 의주로 향했다.
한편 그가 바쁘게 명나라로 가는 길목인 의주로 향하는 가운데 한양에서는 최인범의 이런 빠른 행보 때문에 대궐 안이 약간 술렁였다.
편전으로 들어온 예조판서가 조심스럽게 주상에게 보고했다.
“전하, 아직도 최 사정은 한양으로 오고 있지 않다고 하옵니다.”
“뭐라? 아직도 함경도를 떠나지 않았다는 건가?”
“촤 사정은 이미 함경도는 떠났다고 하옵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주상의 이런 하문에 예조판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전하, 소신의 생각으로는 최 사정은 개마고원을 떠나 바로 의주로 가지 않았나? 사료되옵니다. 교서 내용을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사옵니다.”
“뭐라?”
주상은 예조판서의 이런 추측에 그제야 자신이 약간 착각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신 행렬에 합류하라고 명하면 당연히 한양으로 와서 예조에 들러 대궐로 들어와 하교를 받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데 그런 예측과는 달리 최인범이 교서내용을 달리 해석하고 곧바로 의주로 가벼렸다면 진짜 낭패다.
‘흠! 의주로 바로 갔으면 일이 아주 고약하게 됐군.”
허약한 왕세자로 보나 둘째 아들의 장래를 보아도 최인범을 부마도위로 삼으면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부마도위가 실직을 받지 못하는 점을 해결해 보려고 용호영의 대장군을 굳이 왕세자로 임명했다. 부마도위도 용호영의 대장군으로 만들 수 있도록 길을 미리 열어둔 것이다.
‘중전에게 실없는 장담을 해버렸군.’
전에 부마도위로 삼으려고 할 때 조금 싫어하던 중전이었다. 어찌 변한 것인지 최인범을 사위로 삼길 자신보다 더욱 적극적이다. 그러니 임금으로 자칫하면 딸의 혼사를 두고 실없는 아비가 되게 생겨 은근히 걱정이다.
‘혼사란 말썽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자꾸만 어긋나니 고약하군.’
그렇다고 이제 와서 교서로 내린 명령인데 철회하고 한양으로 오라는 교서를 다시 내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직은 기회야 많았다.
‘의주에서 한정문을 만나게 되니 그가 잘 말하겠지.’
진하사로 정사에는 김안국, 부사에는 윤임을 보냈다. 서장관으로는 전에 풍기군수를 하고 예문관 응교인 양진묵을 보냈다. 그와 별도로 용호영의 한정문을 딸려 보냈다.
보통 사신단은 역관이나 노비를 포함해 40명 이내를 보낸다. 하지만 이번에 보내는 진하사는 100명이나 보냈다. 반은 각종 상인들로 구성되었다.
주상은 진하사를 핑계로 명나라와 교역량을 대폭 늘릴 생각이다. 조공 무역량도 늘리지만 그 외에 교역량을 늘려 필요한 물건을 구입해볼 생각이다.
주상은 공주의 혼사를 염두에 두고 슬며시 예조판서에게 하문했다.
“부모가 없는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려면 사주단자를 누구에게 보내나?”
갑작스러운 하문에 예조판서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전하, 그럴 경우 부모가 없으니 예의는 아니지만 본인에게 직접 보내야죠. 혹시 주변에 가까운 친척인 어른이 있으면 그 사람을 통해 보내야 예의를 갖추는 것이옵니다.”
“그런가?”
예조판서의 답변에 주상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이유는 중전에게서 이미 사주단자를 최인범에게 전한다고 장담했으니 난감하기 때문이다.
천애고아라는 최인범에게는 주변에 친인척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친척에게 사주단자를 보내서 혼사를 밀어 붙이려고 해도 할 방법이 없었다.
‘허어! 이런 낭패가 있나?’
어떻게 양자를 들어가도 주변에 가까운 친척들이 하나도 없는 혈혈단신에게 갔는지 모르겠다. 또 그런 위치라 공주의 남편으로 적당하다고 낙점한 장점은 있었다.
주상은 잠시 공주의 혼사를 생각하다가 다시 국정을 돌보기 위해 슬며시 물었다.
“예판, 왜에서 무슨 서찰이 동래부사에게 왔다고 하던데 그것은 뭔가?”
“전하, 왜에서 호랑이가 출몰해 사람들이 죽어간다고 해서 동래부사에게 착호갑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이 있었다고 하옵니다.”
조정에서는 왜왕의 서신이 아니면 절대 군왕에게 보내지는 않는다. 그저 예조에서 적당히 처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군왕에게 보고해 필요한 조치를 내리는 경우는 있었다.
“예판, 왜는 호랑이를 잡을 만한 사람이 없나? 왜 그런 요구를 우리 조선에게 해?”
“전하, 들리는 이야기로는 왜로 팔려갔던 호랑이 새끼들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번식해 수가 대폭 늘어난 것 같사옵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착호갑사를 보내달라니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요?”
“전하, 그런 숨은 의도는 알 길이 없지만 왜로 팔려서 넘어간 호랑이 새끼들은 조선 호랑이와 약간 달라 주로 왜의 작은 원숭이들이나 아이나 혹은 작은 덩치인 청년을 주로 잡아먹는다고 하옵니다.”
이런 보고에 주상을 눈이 커지며 매우 놀랐다.
“뭐라? 죽은 줄 알았던 호랑이 새끼들이 벌써 자라서 인육을 즐기는 큰 호랑이로 변했다는 건가?”
“전하, 그러하옵니다. 깊은 산속의 화전민이나 작은 마을에서 나타나 아이들을 등에 태우고 가다가 잡아먹는다고 하니 조금 과장된 말 같사오나 왜에는 호환이 발생하는 것은 분명하옵니다.”
“결국 왜에서 호랑이가 크게 번식했다는 거요?”
“그러하옵니다.”
호랑이 새끼를 40마리를 팔았지만 태풍으로 모두 죽었다고 알았었다. 하지만 폭이 좁은 간몬해협에서 무역선이 침몰해 규슈는 물론 혼슈까지 호랑이가 널리 퍼져 버렸다.
간몬해협에서 폭풍을 만났으나 헤엄 실력이 좋아 겨우 살아난 호랑이들은 처음에는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호기심이 많아 오히려 호랑이에게 접근해 잡기 쉬웠던 왜의 원숭이를 잡아먹었다. 그렇게 해서 개체수가 늘자 차츰 깊은 산골의 민가에 접근해 밭에서 벌거벗고 노는 아이들을 잡아먹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덩치가 커지고 인육에 맛이 들어버린 호랑이들은 더욱 흉포해졌다. 왜는 조선처럼 멀리 나가는 활인 강궁이 없어 원거리 공격력이 너무 약했다.
“전하, 왜에서는 호랑이 때문에 조선 활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 중이라옵니다.”
“왜에서 호환이라니 그게 사실이요?”
“전하. 그러하옵니다.”
이런 보고를 들으며 주상은 너무 생소한 이야기라 약간은 황당하기까지 했다.
‘왜인들이 호환을 걱정하다니 세상이 너무 변했어.’
더운 지방이라 항상 벌거벗고 훈도시만 차고 밭에서 일하는 작은 체구인 왜인들을 만만한 상대인 원숭이로 판단해 무차별로 공격했다.
호랑이의 눈에는 훈도시만 차고 벌거벗고 다니는 왜의 청년들을 엉덩이가 빨간 원숭이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남자와 달리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는 여자들은 호환을 모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