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주변에 널려 있는 부서진 성곽의 돌들을 이용하면 쉽게 관문과 작은 성곽은 축조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방어 시설이 전혀 없는 상태는 위험하다. 성곽과 관문이 있는 곳은 기마병으로 공격해 오는 여진족을 방어하는데 방어 전력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그곳에 방어 시설이 있으면 우선 겨울 이외에는 여진족이 쳐내려오기 힘들어.’
다른 지역은 상류라 물살이 거세고 수심도 매우 깊었다. 하지만 그곳은 수심도 얕고 물살도 약해 남북 쪽으로 이동하려면 꼭 필요한 지점이다. 물론 혜산 만호지역과는 달리 고지대인 개마고원으로 들어오는 길목이라 교통의 요충지로 사용되기는 어려운 지역이다.
혜산 만호가 목장에서 떠나고 나자 최인범은 두 의무병에게 지시했다.
“이제 군복을 벗고 한복차림 떠날 것이니 갓이나 두루마기를 준비해. 두 사람도 일반 백성들이 상행을 떠나는 차림으로 준비하고.”
“넷!”
이런 준비를 시키고 전에 사용하던 무기들은 모조리 보관시키고 일반적인 검이나 활로 무장했다. 물론 통아를 비롯해 편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활이나 화살을 준비했다.
이런 준비를 하는 중에 덕원부로 갔던 칠복이 형제가 많은 소금, 쌀 그리고 말을 판매한 대금인 5천필의 면포를 가지고 돌아왔다.
“면포를 모조리 가져왔냐?”
“넷! 한양에서 보내 덕원부에 보관되어 있더군요.”
두 사람에게 교서를 넘겨주고 축하해 주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풍기로 돌아가서 앞으로는 하사로 칭하고 부대를 교대로 지휘하도록 해. 착호부대를 해산하라는 명령은 없으니 병사들의 훈련은 계속하고.”
“넷!”
벼슬이 올라가자 두 형제는 얼굴이 환해지며 기뻐했다. 자신들이 고생한 보상을 충분히 받았다. 여진족에게 탈취한 재물이 아직도 남아 있어 그에 대해서도 지시했다.
“남은 재물은 모조리 털어서 덕원부로 가서 그곳에 내 명의로 농토를 사도록 해. 그게 끝나면 여기서 남쪽으로 이주하고 싶은 사람을 모아서 농사를 짓게 하고 말을 50필만 가지고 풍기로 돌아가.”
“알겠습니다. 하지만 덕원부의 농장에도 관리인은 있어야죠.”
“그것은 감목관에게 선정해서 보내라고 할 것이니 너희들이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이번에 돌아가면 네 아버님도 면천해 드리고.”
“감사합니다.”
“면천법이 자칫하면 중단될 수도 있으니 이번 기회에 반드시 해놓도록 해.”
“넷!”
칠복이 형제는 지시를 받자 바로 이주할 사람들을 모았다. 이미 재물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 다시 농사꾼을 모집하기 위해 돌아올 필요가 없었다. 아예 같이 덕원부로 가서 농토를 매입해 정착시켜버릴 생각이다.
“덕원부로 가기만 하면 농토를 사준다고요?”
“그러니 떠날 사람은 모이시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으니 여진족들 중에 농사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모여들기 시작했다.
칠복이 형제는 농사를 짓는다고 하는 50명을 모아 100필의 말을 몰고 개마고원을 떠났다. 50필은 풍기까지 보내야 하고 50필은 덕원부에서 팔아 소나 집을 사서 농사를 짓게 할 생각이다.
살림도구는 하나도 가지고 가지 않고 덕원부로 가서 새로 구입해서 자리를 잡게 된다. 소작농 형태라 모두 소출의 3할만 거두는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그 농장에서 거두어들이는 쌀은 모두 개마농장으로 보내도록 지시했다.
이외에 소작인들을 관리할 마름도 선정해 덕원부로 보냈다. 확보된 물건으로 계속 말을 여진족에게서 구입하도록 하는 등의 필요한 조치를 내리고 개마고원을 떠났다.
“이제야 끝내고 출발하게 되는군.”
“너무 급하게 갈 필요는 없지요?”
“당연하지. 하지만 사신단에 합류해 같이 가야하니 미리 의주에 도착해 기다리는 것이 좋아.”
“알겠습니다.”
함경도나 만주 지역의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공연히 잘 모르는 길을 찾아서 가기 보다는 압록강을 따라 의주까지 이동하는 것이 더 빠르다고 판단했다.
명나라도 가기 위해 최인범이 의무병 2명과 같이 압록강 변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백두산 북쪽에 위치한 이도백하 지역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작은 마을에 무려 100기의 기마병이 매섭게 들이닥쳤다.
“살려주시오.”
“앞으로 여기는 우리 부족으로 포함시킨다.”
“부족이라면?”
“백두산의 정기를 받은 흑풍족이다.”
전에는 흑풍대라는 마적으로 활동하더니 이제는 흑풍족이라며 하나의 부족으로 칭했다. 당연히 수뇌부가 족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최인범이다.
이도백하의 구리와 은 광산에 자리 잡은 흑풍대는 재빨리 주변 마을을 공격해 자신들의 무리 속으로 복속시켰다. 젊은 청년들은 모두 흑풍대원으로 포함시키고 나머지 부녀자를 빠르게 광산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최인범은 그래도 말을 타느냐 마냐 정도라도 구분해서 흑풍대에 포함시키고 젊은 청년들만 가입시켰다. 하지만 새로운 지휘관인 금일여는 전혀 다르게 저돌적으로 움직였다.
나이는 상관없이 말을 타면 기마병인 전투병이고 나머지는 광산의 인부로 분리해 버렸다. 이렇게 되자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기마술을 배우기 위해 야단법석을 떨었다.
“말을 타지 못하면 힘든 광산에서 일해야 돼.”
“그럼, 말 타는 기술을 배워야지.”
“지금은 신분을 바꿔 준다고 하니 말 타기부터 배워야 돼.”
지휘관인 금일여는 아주 단순 무식한 방법으로 모아진 무리들의 신분을 결정해 버렸다. 그러자 북쪽으로 다시 돌아온 지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흑풍대의 전투병은 무려 200명으로 불어났다.
이제 기마병은 많아 졌으나 기동성이 좋은 말들이 너무 부족해졌다.
“중대장님, 말이 부족합니다.”
“그럼, 주변 목장을 털어서 충당해야지. 그걸 나에게 묻나?”
그러자 제일 졸병인 금십여가 100명의 기마병을 이끌고 주변에 있는 말을 키우는 작은 목장을 모조리 털었다. 반항하면 잔인하게 모조리 죽여 버리고 항복하면 자신들의 패거리로 삼는 단순무식한 방법이다.
“흑풍족은 정말 무서워! 두 번도 안 물어 보고 마구 죽인다고 하네.”
“우리 마을도 일찍 항복해서 흑풍족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어.”
이도백하로 돌아와 주변을 공격한지 며칠이 흐르자 기마병의 수는 벌써 300명이 넘어갔다. 최인범이야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부대 규모를 조절하고 은밀하게 움직였지만 지휘관이 바뀐 흑풍족은 전혀 달랐다.
“우선 약해 보이는 소부족부터 빨리 빨리 흡수해.”
“넷!”
불과 100명도 되지 않는 소규모인 부족들만 노려 복속시키면서 빠르게 세를 불렸다. 갑자기 검은 두건을 쓰고 주변의 소부족을 복속시키며 세를 불리는 흑풍족 때문에 압록강 북쪽은 심한 혼란이 발생했다.
명나라에서는 여진족에 대해서 부족장에게 작위를 주어 간접적으로 통치했다. 산동 지역은 그렇게 통제가 어느 정도 되었다. 하지만 조선과 접한 지역인 압록강 중류와 상류, 두만강 지역은 명나라의 영향력이 거의 전무한 지역이다.
신흥 세력인 흑풍족이 아직은 만주 지역 전체를 뒤흔들 정도의 큰 영향력은 없었다. 하지만 새롭고 강력한 무력 집단이 생기자 그 여파는 점차 널리 확산되었다.
한편 왕명으로 진하사 행렬과 합류하기 위해 의주로 가는 최인범은 개마고원을 떠나 압록강 변에 있는 삼수군에 도착했다.
최인범 일행은 압록강 변에 있는 작은 주막으로 들어갔다.
“주인장!”
“예.”
나이 많은 노파가 나와서 반겼다.
손님이 하나도 없는 주막은 무척 쓸쓸해 보였다. 강변에 나루가 보이고 작은 조각배가 2척 있었다. 나루터에 자리한 주막은 초가로 일자형으로 지어졌다. 아랫방과 윗방 그리고 마루가 있고 건넌방이 있었다. 건넌방과 윗방을 손님들을 받는 방으로 사용했다, 싸리나무로 만든 울타리 안의 마당에 평상이 2개 놓여 있다. 나무상자로 만든 등에 주(酒)라고 써진 글씨가 보여 이곳이 주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사꾼들도 별로 없는 곳이야.’
나루터 주막에는 대부분 보이는 마구간도 없었다. 장주한과 홍성필은 7필의 말을 밖에 있는 말뚝과 소나무에 붙들어 맺다. 말 등에 실린 짐을 풀어 주막 안으로 들어갔다.
홍성필이 마당에서 서성이는 최인범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리, 관아로 갈 것을 잘못했나 봐요.”
“하루만 자면 되는데.”
주막의 건넌방에 먼저 들어가 앉은 최인범은 방안을 슬며시 살폈다. 벽에 종이도 바르지 않은 형태로 방바닥은 짚으로 만든 멍석 같은 갈개만 있었다. 이불도 없어 잠자기가 너무 불편해 보였다.
주모인 노파에게 물었다.
“다른 때도 손님이 없나?”
“예, 압록강 너머로 가는 상인들이 찾아오고 가끔 남쪽에서 귀양 오는 사람들이 찾아오죠. 물론 겨울철이 아닌 때는 장사꾼들도 조금 많고요.”
이곳으로 와보니 진짜 이곳이 유배지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부하들이 밖에 말들을 메고 콩대를 주막 옆집에서 구해 먹이고 짐들을 방안으로 날랐다. 모포를 비롯해 곰 가죽으로 만든 풍덩한 검은 외투를 비롯한 물건을 놓았다.
최인범은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말에게 줄 먹이를 구해서 충분히 먹여. 백두에게도 육포를 주고.”
“넷!”
마른 콩대만 먹이지 말고 콩을 구해서 먹이라는 뜻이다.
최인범은 타고 가는 말 이외에 의무병들에게 별도로 2필씩의 말을 끌게 해서 떠났다. 말을 여러 필이나 따로 가져가는 이유는 의주에 도착하면 말을 팔아 여비로 쓰기 위해서다.
중간에 타고 가는 말에게 이상이 생기면 갈아타야 하니 여유롭게 가져가는 것이다. 그리고 경비견으로 사용하는 풍산개는 수놈인 백두 한 마리만 데리고 떠났다. 물론 많은 풍산개들 중에 제일 영민한 놈이다.
개마고원을 떠나 막상 말을 타고 이동하다 보니 지금 입고 있는 한복 차림으로는 먼 의주까지 가기가 너무 불편해 보였다.
‘옷을 군복으로 갈아입어야 되겠어.’
부하들이 말에게 먹이를 주고 나서 노파가 차린 작은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보리와 조로 지어진 잡곡밥에 산나물무침 하나가 반찬의 전부다. 그래도 세 사람은 빠르게 식사를 끝내고 건넌방에 둘러앉았다.
“나리, 군복으로 갈아입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도 그리 생각하던 중이야. 잠자리도 너무 불편하니 군복으로 갈아입고 자도록 하지.”
“넷!”
남들에게 눈에 뜨이는 군복이라 평상복으로 입고 이동하고 보니 너무 불편했다. 삼수군에서 압록강을 따라 이동하려면 이제부터는 눈이 쌓인 숲속에서 야영해야 한다. 그러니 야지에서 생활하기 편한 신식인 군복을 입고 이동하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다.
삼수군의 서북쪽의 압록강 변에는 세종시절에 최윤덕 장군이 개척한 4군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철수해 사람이 전혀 살지 않은 무인지경인 불모지인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