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어명을 무시하는 반골>
주상은 옆에 같이 걷고 있는 문정왕후에게 슬며시 물었다.
“중전, 앞으로 경원대군의 무술 선생이 있으면 좋지 않겠소? 항상 경원대군을 따라다니며 보호하는 호위무사도 겸해서.”
이런 돌발적인 물음에 왕후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전하, 이제 겨우 10살도 되지 않는 어린 경원대군에게 무술을 배우게 해 뭐에 쓰시려고요?”
“뭐에 쓰자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 무술을 배우면 건강할 것이 아니요.”
“전하, 그야 그렇지만 경원대군이 학문에 전념하지 않고 무술을 배우면 조정의 신료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볼지도 모르옵니다. 나이도 너무 어려서 무술을 배우기는 아직 빠르다고 생각되옵니다.”
어미인 중전이 싫다고 거절하자 무술 선생으로 최인범을 대궐로 부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방법이 제일 적당하다고 판단해 다시 권했다.
“경원대군이 아직 어리지만 무술이란 아주 어려서 배우면 나중에 장성해서도 튼튼한 법이니 중전을 그런 점을 잘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말하고 나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주상은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다른 내용을 슬며시 꺼냈다.
“중전, 공주들도 장성하고 있으니 앞으로 부마도위 감으로 삼을 사람을 미리 점지해서 물색해 놓는 것이 좋지 않겠소?”
“전하, 부마도위야 당연히 명문 가문의 자제들 중에서 성품이 온순한 아이로 선택하시면 되는데 지금부터 신경 쓸 필요가 있을 까요?”
이런 중전의 응수에 주상은 한발 더 나가고 있었다.
“과인 생각에는 공주들의 부마도위로 선비보다는 건장하고 호방한 성품의 무인이 좋아 보이는데.”
“전하, 무골로 태어난 사람은 본시 성품이 거칠지 않나요? 그러니 공주들의 남편인 부마도위로는 무인은 적당하지 않사옵니다. 물론 좁은 소견인지 모르니 호방한 성격이 공주에게는 좋지 않아요.”
이런 대답에 주상은 다시 권했다.
“무인이라고 다 거친 것은 아니니 중전은 잘 생각해 보세요. 괴인이 점지해 둔 사람이 있으니 중전이 직접 만나보면 마음에 들게 될 거요.”
“알겠사옵니다. 조금 생각해 보고 결정하고 싶사옵니다.”
“그럼, 잘 생각해 보고 답을 해주시오.”
연산군을 몰아내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주상은 그동안 반정공신들의 힘에 밀려 자신이 하고자 하던 많은 정책들을 포기했다.
이제 군왕으로 산 세월도 30년이 지났으나 공신들의 입김은 여전히 강했다.
‘나라가 외침을 받아 처참하게 유린 되도 조정의 중신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속한 파당의 이익을 챙기기에만 정신이 없어.’
재위기간 동안 수차례 왜인이나 여진의 침략으로 국토가 유린되는 큰 피해를 봤다. 주상은 이번만큼은 대신들의 반대에 절대로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허약한 왕세자를 위해서 반드시 새로운 부국강병책을 시행하기로 결심했다.
주상이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중전은 상궁에게 급하게 지시했다.
“김 상궁, 밖으로 나가서 난정을 불러와.”
“예이!”
중전은 정난정을 만나 그동안 귀양 간 친정식구들의 소식도 듣고 전하께서 낙점하고 있다는 무인이 누군지 알아볼 요량이다. 어린 경원대군에게 무술을 가르치려고 하니 조금 그렇다. 하지만 그가 마음에 드는 인물이면 한 번 호위무사로 곁에 두는 것도 좋다고 판단했다.
주상은 후원에서 집무실로 돌아와 상선에게 명령했다.
“도승지를 들라하라.”
“예이!”
드디어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지고 독단이라도 과감하게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강하게 나가면 대신들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힘을 지닌 윤임이 조정 신료들을 적당히 다독이겠지.’
조금 시간이 지나 도승지가 들어오자 주상은 명했다.
“도승지, 전에 과인이 말한 면천을 위한 면포의 수를 200필로 낮춰서 당장 시행하시오. 면천 신청과 허가는 한양과 경기도는 한양의 호조에서 담당하고 지방은 관찰사가 담당하시오. 또한 화폐발행을 위해 상평창을 설치하도록 호조판서에게 연락하시오.”
“예이!”
전에는 구두로 법령을 검토해 보라고 대신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면 이번에는 달랐다. 국새를 찍어 정식으로 노바 면천법을 시행하는 교서를 내린 것이다.
교서를 받은 중신들을 약간 술렁였다.
“허어! 면포를 더 깎아서 하시겠다니 더 반대하면 더 내리겠다는 뜻이군.”
“대감, 전하께서 이번에는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왕조시대에 국왕이 옥새를 찍어 명령한다는 것은 그것이 곧 법이다. 강하게 이런 조치를 내리자 조정의 중신들도 슬며시 반대하던 목소리를 죽였다.
“이번에는 한발 뒤로 물러나는 것이 좋아.”
“그럽시다. 그렇게 면포를 내고 면천을 신청할 노비는 많지 않을 것이니 그대로 시행해 봅시다.”
“그렇군요. 윤임 대감도 찬성하니 우리도 찬성해야죠.”
“그럽시다. 반대만 하다가는 우릴 내칠 것이 분명해요.”
주상의 강한 기세로 보아 더 이상 반대하다가는 왕명을 거역했다고 노여움을 받은 염려가 많았다. 관직에서 파직을 당하거나 또는 대폭적인 인사이동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화폐제도는 면천과는 달리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화폐를 발행하려면 엄청난 재물이 드는데 그것은 어찌 충당하시려는지 모르겠군.”
“왜나 명나라와 공무역을 더 많이 해서 충당하신다고 하잖아. 전하께서도 무슨 따른 복안이 있는 것 같아.”
여전히 화폐제도를 시행해도 실패할 것으로 판단하는 무리들은 서로 모여 수군거렸다.
“화폐제도는 시행하다가 어려우면 중단하겠지.”
“아무렴, 화폐제도를 도입해서 성공한 경우가 없어.”
“그래도 상평청 업무는 적극적으로 협조는 해야죠.”
“당연하죠.”
주상의 지엄한 명으로 결국 상평청에서는 화폐를 주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본시 상평청은 본시 상시평준(常時平準)의 약어다. 국가의 물가를 조절하기 위해 설치된 기관이지만 그동안 유명무실했다. 그러나 이제는 상평창을 통해 대대적으로 화폐를 발행하기로 결정해 주조하기 시작했다.
상평통보로 이름이 정해진 화폐의 단위는 1냥(兩), 10전(錢), 100푼(分)으로 정해졌다. 원형으로 중앙에는 사각형의 구멍이 있다.
한쪽 면에는 상평통보(常平通寶)란 글이 새겨지고 뒷면에는 단위를 나타내고, 화폐의 가치를 나타내는 1, 3, 5 라는 글씨와 주조 년도인 태세가 있다.
지방의 관아에서 발행할 경우 여러 가지 문제점이 많았다. 그래서 한양의 상평청에서만 화폐를 발행하도록 결정했다. 화폐의 가치는 기존에 화폐로 통용되던 면포나 미곡을 중심으로 책정되었다.
가치기준은 2푼(分)이면 미곡으로 1되라 20푼(2전)이면 1말(斗), 200푼(2냥)이면 미곡으로 1가마에 관포로 20필이다. 이런 정도로 기준한 것은 보통 미곡과 보리와 가격이 반 정도로 거래되기 때문에 1푼(分)이면 보리 1되를 살 수 있도록 정했다.
더 아래인 가치기준으로 삼을 경우 화폐발행의 원료인 구리나 주석 값에도 미치지 못해 자칫하면 화폐를 녹여서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화폐를 발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왜에서 구리를 대량으로 수입했기 때문이다.
화폐발행이야 필요한 만큼 많이 주조해서 유통시켜야 한다. 그 때문에 당장 시행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면천법의 경우는 즉시 시행되어 한양에서는 호조로 가서 면천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이번에 면천을 받아야 해. 늦으면 또 안한다고 바뀔지도 모르니까.”
“자네는 가족들까지 다하나?”
“우선 나와 아들 녀석을 먼저 면천하기로 했어. 한 놈이라도 노비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노비의 신분으로 면포 200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흔한 것은 아니다. 그 때문에 면천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대부의 사노비로 있다가 첩으로 들어간 여자들이 면천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농토가 많은 전라도 지역은 의외로 면천을 받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강원도와 경북지역에서는 산삼을 깨서 팔아 면포가 1천 필이나 생겨 면천 받게 된 노비가 있다고 하더군.”
“그런가? 산삼을 깨면 팔자가 확 달라지지.”
면천해 양민으로 바뀐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양민은 군역이나 각종 조세를 부담하기 때문에 면세 혜택을 받는 노비 신분이 더 좋을 수 있었다.
물론 그런 경우는 주인을 잘 만날 경우에 해당된다. 어찌 되었던 전에 비해 노비에서 양민으로 풀릴 수 있는 길이 상당히 쉬워진 것이다.
화폐발행이나 면천법의 시행으로 한양과 조선 팔도가 약간 어수선한 가운데 새로 구성되는 용호영도 무척 바빴다.
용호영의 부대 주둔지는 동대문 밖의 왕십리에 있었다. 왕십리는 조선 초에 한양으로 도읍을 정할 때 이곳에 도착한 무학 대사가 10리를 더 가서 도읍으로 정하라는 유래가 있는 곳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왕십리로 향하는 방향에 동대문에서 5리 정도 떨어져 용호영의 별기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