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최인범은‘옷이 뭐에 걸렸나?’하며 무심히 뒤를 돌아보았다. 풍월이가 고양이 눈으로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가늘게 뜬 실눈에서는 작은 불꽃이 보였다.
‘흐미! 이 여자가?’
노려보는 풍월을 보며 잠시 지난 일들이 떠올랐다. 뜨겁게 불타오르던 야릇한 장면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이상의 어떤 애절하거나 사랑스러운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깔끔하게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완전히 털어야겠어.’
이렇게 판단하고 면포 50필의 어음을 넘겨주며 말했다.
“도와주었으니 이것으로 옷이나 해서 입으시오.”
“······.”
자신을 보고 분명 아는 척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면포만 풀썩 던져주고 모른 척 기방에서 나가려고 하자 독이 바짝 오른 풍월은 순간 울컥했다.
“나리, 저를 모르시겠어요?”
알기야 너무 잘 알지만 전혀 모르는 표정으로 부드럽게 답했다.
“내가 어찌 자네를 아나? 오늘 처음 여기서 만나는데.”
벌거벗고 저돌적으로 덤비는 여자를 가볍고 쉽게 생각해 상대하면 절대로 안 된다. 추후에 곤란한 사건이 발생할 위험성이 매우 높았다.
본시 세상사의 모든 일에는 공짜란 절대로 없는 법이다. 자칫하면 장가도 가기 전에 녹녹하지 않게 생긴 기생에게 코가 단단히 끼게 생겼다. 자칫 골치 아픈 사건만 연달아 벌어질 수 있었다.
더구나 풍기나 영천 지역의 양반들은 자신의 허점을 찾아보려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 기생과 문제라도 생기면 복잡해진다. 앞으로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아직 약관도 안 되고 등과도 못한 내가 기생과 복잡하게 엮여서 지낸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비난거리가 돼.’
세상은 공짜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고운 미색으로 보아서는 하룻밤의 풋사랑으로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출발이 분명이 문제가 많다. 더구나 백여우가 낀 술수가 개입된 일이라 더 이상 접하면 안 되는 여자다.
물론 웃음이나 기예를 파는 기생이라고 진솔한 정절이 없거나 탐욕스럽게 재물만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처음 시작점이 너무 황당했다. 그 때문에 역사 속에서 나오는 유명한 기녀들의 구구절절 애틋하던 진솔한 사랑과는 전혀 다르다.
‘바둑과 같이 이런 기녀와 인연은 딱 한번으로 끝내야 하는 일수불퇴가 원칙이야.’
아무리 여자가 그립고 곤궁해도 폐석이 된 바둑알을 다시 살리자고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었다. 특히 자신도 모르게 백여우와 모의해 뭔가 뒤에서 획책한 그런 여자와 길게 인연을 끌고 갈 필요는 없었다.
‘풋사랑이란 본시 재탕은 맛이 없는 법이야.’
최인범은 이렇게 단단히 다짐하며 약간의 잡념은 생겼지만 훌훌 털어버리고 기방에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밤에도 멀리서 아이들이 쥐불놀이를 하느라 불꽃들이 번쩍였다. 밖에서 기다리는 의무병에게 면포 150필을 넘겨주며 지시했다.
“이 면포로 필요한 약재를 사도록 해. 풍산개가 먹을 육포를 많이 사두고. 산삼 씨도 사두고.”
“넷!”
풍산개를 4마리나 데리고 가니 먹이로 줄 육포 값도 만만치 않았다. 개들에게 다른 먹이를 먹이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함부로 다른 먹이를 먹이다 보면 보초의 기능을 상실할 위험성이 높아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취제나 독약이 있으니 조심해야 돼.’
최인범은 아이들이 쥐불놀이하는 모습을 잠시 구경하다가 영천주막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영천 주막에 있던 부하들은 다들 놀랐다. 기방으로 갔으니 분명 뜨거운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올 것이라는 예상이 보기 좋게 어긋난 것이다.
소대장의 이런 행보에 부하들은 약간은 괴이하게 생각했다.
‘이상하시네. 여자를 저리 멀리하시고.’
하지만 최인범은 그동안 다소 찜찜하던 마음이 무척 개운해졌다. 은근히 꺼림칙하게 남아 있던 작은 찌꺼기가 완전히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새로운 인생을 사는 처지다. 분명 잘 못됐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억지로 끌고 갈 바보는 아니라 과감하게 훌훌 털어버렸다.
“권 상병, 무슨 생각을 그리하나? 바둑이 일찍 끝나서 돌아 왔는데.”
“아닙니다.”
“내일 동이 뜨기 전에 일어나 바로 출발할 것이니 일찍 자고 주모에게도 말해서 일찍 아침을 먹을 수 있도록 해.”
“넷!”
이런 지시를 내리고 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은장도를 만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건 또 누구 꺼지?’
윤 진사의 딸이 은장도의 주인이 아니라고 했다. 은장도도 이제 버려야 되는 물건이다. 옆에서 누워 있는 칠복이에게 은장도를 주었다.
“칠복아! 은장도 가져!”
고급스럽게 생긴 귀한 은장도를 주자 칠복이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나리, 귀해 보이는 물건인데요?”
“아무리 귀해보여도 내 것이 아니면 탐하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 네가 가져.”
“넷!”
오래 지니고 있던 은장도까지 수중에서 떠나보내자 진짜로 마음이 개운했다. 그래서 잡념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서서히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 날 꼭두새벽에 일어난 최인범과 부하들은 빠르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말에 올랐다.
최인범은 말을 타고 있는 화후돈과 장익덕을 보며 물었다.
“모두 승마를 배웠냐?”
“넷! 타고 어느 정도로 달릴 정도는 됩니다.”
“그럼 됐어. 빨리 가도 되겠어.”
영천주막을 떠난 최인범 일행은 다소 빠른 속도로 동쪽으로 향했다. 오늘 중으로 울진까지 갈 생각이라 조금은 급했다.
두두두두
사람의 왕래가 많은 마을에서 멀어지자 점점 빠른 속도로 달렸다. 말이란 빠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해서 달릴 수는 없다. 한참을 달리다가 천천히 걷게 하거나 때로는 개울에서 쉬면서 가고 있었다.
해가 거의 질 무렵에 울진현의 동해안에 도착한 최인범은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바닷가의 숲에 천막을 쳐.”
“넷!”
바닷가의 작은 모래사장 옆에 있는 소나무 숲에 천막들을 쳤다. 각자 천막을 치고 나자 다들 나무하러 인근 산으로 가거나 또는 사냥하기 위해 다소 떨어진 산으로 갔다.
새로 부대원으로 합류한 하후돈이나 장익덕은 다른 업무는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계속해서 기본적인 무술 수련만 집중했다.
새벽 동이 뜨기 전에 일어난 부대원들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처음 동해에서 맞이하는 해돋이에 다들 감탄했다.
“와! 멋지군.”
맑은 날이라 바다에서 떠오르는 붉은 해는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검푸르고 잔잔한 파도를 이루는 드넓은 동해를 바라보자 멀리 있을 울릉도와 독도가 떠올랐다. 독도만 떠올리면 왜 그렇게 왜놈들이 죽이고 싶도록 미운지 모른다. 또한 애국심이 저절로 치밀었다.
최인범은 무념인 상태로 해돋이를 보다가 무심결에 거수경례하며 애국가를 불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큰 목소리로 부르는 노랫소리에 부하들은 다들 놀란 표정들이다.
‘저건 무슨 노랫가락이지? 소대장님이 이제 보니 새로운 노래도 지으시는 분이군.’
막상 애국가의 일절을 큰 목소리로 다 부르고 나서야 최인범은 자신이 실수 아닌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권영묵에게 슬며시 지시했다.
“권 상병, 이 노래는 앞으로 부대의 군가니 잘 적어 놓고 배우도록 해.”
“넷!”
이렇게 지시해서 이상하게 보는 시선을 피했다. 멋쩍어진 최인범은 말에 올라 부하들과 조금 떨어져 커다란 바위가 보이는 바닷가로 향했다. 풍산개들이 빠르게 따라갔다.
컹! 컹!
이때 뭐를 발견한 것인지 풍산개들이 일제히 짖었다. 개들이 짖는 곳을 바라보니 커다란 물건이 잔잔한 파도에 떠밀려왔다.
둥둥 떠서 밀려오는 물건이 해변 가까이까지 다가오자 놀랐다.
“어라! 저게 어떻게 여기로?”
바닷가의 바위 쪽으로 밀려온 것은 커다란 나무 궤짝이다. 그러나 일부는 부서져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이 보였다. 파도에 밀려온 잔해는 딱 봐도 호피라 놀란 것이다.
후다닥!
궤짝이 다시 파도에 떠밀며 바다로 흘러갈 수 있어 급하게 달려 바위 위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궤짝 안에 들어 있는 호피를 살펴보고 또 다시 놀랐다. 놀란 이유는 수많은 호피가 궤짝 안에 잘 포장되어 들어있기 때문이다.
“호피가 많네.”
많은 호피를 보자 이게 무슨 운수대통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함경도로 가서 호랑이를 잡아야 하는 처지로 바다에서 호피를 거저줍게 되자 정말 신이 났다.
“아싸! 좋았어!”
올해는 정초부터 운수대통의 연속이다.
조상님들께 감사하고 부처님이나 하느님 그리고 어떤 존재인지 모르지만 모두 모두에게 감사했다. 정초부터 많은 재물을 보내 주더니 이제는 그보다 더 큰 재물을 굴러들어오게 해주었다.
‘호피가 도대체 몇장이야?’
곰곰이 생각해 봐도 자신이나 다른 착호갑사들이 호랑이를 잡아 조정으로 보낸 뒤에 왜로 판매한 호피 같았다.
왜의 무역선이 어쩌면 태풍으로 난파를 당해 호피가 들어있는 궤짝이 동해에서 떠다니다가 여기로 흘러온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야 이런 많은 호피가 하나의 궤짝에 들어 있을 까닭이 없었다.
‘전에 왜로 많은 호피와 호랑이를 팔았다는 소리가 있었어.’
이런 생각을 하자 자신이 넘긴 호랑이 새끼들이 은근히 걱정이다. 무역선이 난파당했다면 아까운 호랑이 새끼들이 모두 바다에 수장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재물 좀 쉽게 모아 본다고 해서 아까운 호랑이 새끼만 죽였어.’
조금은 마음이 무거웠다. 그 보다는 당장 거저 생긴 호피가 더욱 중요했다.
최인범은 궤짝을 바위 위에 올려놓고 잠시 호피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비록 바닷물에 흠뻑 젓기는 했지만 가죽 상태는 양호했다.
‘바위에 널어서 잘만 말리면 되겠어.’
이렇게 판단하자 부하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다들 여기로 모여!”
“넷!”
한창 백사장에서 무술을 수련하던 부하들이 빠르게 달려왔다. 부하들은 궤짝에 들어있는 많은 호피를 보자 다들 큰 소리로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