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풍기를 떠날 때 선비 복장인 두루마기와 바지저고리는 챙겨서 의무병이 한 벌을 가져왔다. 함경도로 가다가 고을을 지날 때 초대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해 준비했다. 그러나 흑립인 갓은 항상 지니고 다니기가 너무 불편해 필요할 때 현지에서 빌려서 쓰기로 했다.
‘양반이나 벼슬아치로 살기도 복잡하군.’
사노비인 두 명의 의무병들은 평소에는 최인범의 개인적인 수발을 드는 당번병이다. 장주환이 급하게 가져온 의관을 차려 입고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다른 사람들은 약초 방에 들러서 산삼 씨가 있는지 알아 봐. 혹시 함경도로 가면서 필요한 생필품 중에 혹시 빠진 것이 있나 살펴서 구입하고.”
“넷!”
말에 오르자 장주환은 고삐를 잡고 그 옆에는 호롱불을 들고 홍성철이 따라 나섰다.
조선에서는 양반의 행차에는 옆에 구종이나 노비가 한 두 명은 반드시 따른다. 그 때문에 다른 양반들과 똑 같은 모습으로 기방으로 향했다.
영천군은 풍기군 보다는 약간 인구가 많아서 그런지 조금은 번화한 곳이다. 관아에서 조금 떨어진 커다란 기방으로 가자 기방 주인인 산월이가 대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나리, 어서 오세요. 산월이옵니다.”
주인인 산월은 30대 후반의 여자로 미모가 상당했다. 가느다란 허리며 약간 홀쭉한 얼굴에는 보조개가 있어 미모가 돋보였다.
‘흠! 조선시대 여자라도 모조리 후덕하게 생긴 것은 아니군.’
기방 주인인 산월은 말에서 내린 최인범을 안으로 인도해 후원으로 갔다. 지방의 고을에 있는 기방이지만 영업이 잘되고 있었다. 여러 개 방에서는 계속 가야금이나 창하는 소리가 들렸다.
후원에는 민택선 진사가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민 진사님, 오랜만입니다.”
“초대에 응해줘서 감사합니다.”
서로 가볍게 수인사를 나누고 후원의 방으로 들어가자 안에는 커다란 상에 많은 음식과 술이 차려져 있었다.
“최 사정께서 상석에 앉으시죠.”
“아닙니다. 민 진사께서 어르신이니 위로 앉으세요.”
“허, 오늘은 수담을 나누기 위해 제가 일부러 초청해서 만났으니 일단 경북고수께서 상석에 앉아야죠.”
결국 최인범이 상석에 앉고 나자 민택선도 앉고 나서 주인인 산월에게 명했다.
“아이들 들어오라고 해.”
“예이!”
세 명의 어린 기생들이 들어와 차례대로 급하게 큰 절로 인사했다. 다들 고와 보이는 얼굴로 진하게 분을 바르고 입술을 붉게 화장했다.
“나리, 풍월이옵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최인범은 곱게 한복으로 차려 입고 처음에 인사하는 젊은 기생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헉! 저 여자가?’
어두운 방안에서 정사를 벌여 얼굴이 또릿하게 기억하지 못한다고 지금까지 인식했다. 하지만 본인을 직접 만나게 되자 목소리나 자태로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히 그때 여자가 이 여자야.’
키가 크고 목도 유달리 길어 그 여자가 틀림없었다. 옷을 입어 정확하지는 않았다. 가슴도 치마끈으로 바짝 조여서 그렇지 자신이 품고 주물러 터트렸던 풍만한 가슴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슬며시 여자의 귀를 슬며시 살폈다. 사람마다 귓바퀴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확인하는 것이다.
‘확실해. 귓바퀴가 작고 약간 튀어나와 도톰한 부분도 똑 같아.’
이것은 귓바퀴를 여러 번 입으로 빨아 봤으니 아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풍월을 바라보자 그녀도 얼굴에 엷은 홍조를 띄우고 있었다.
‘확실하군. 백여우의 농간에 내가 잠시 착각해서 공연히 신경 썼어.’
죽죽이 주막의 골방에서 하룻밤을 진하게 보낸 여자가 풍월이라는 영천의 기생이라 너무 놀랐다. 공연히 혼자 생각으로 윤 진사의 며느리라는 추측은 분명 자신의 착각을 유도하기 위한 백삼수가 파놓은 교묘한 술수다.
‘그 백여우 같은 자식이 여기서 살고 있는 기생을 언제 연락해서 죽죽이 주막까지 그렇게 빨리 데리고 온 거야. 너무 이상해.’
인생이 심하게 꼬일 수 있는 남의 아내인 폭탄은 아니라 천만다행이다. 짧은 순간에 오만가지의 잡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잠시 눈길을 풍월에게 고정시키자 민택선은 너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슬며시 물었다.
“최 사정, 혹시 이 아이를 아시오?”
“아닙니다.”
급하게 모르는 여자라고 답하자 민택선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영천을 처음 오는 최 사정이라 풍월이를 알 수 없지. 오라! 그러고 보니 영천에서 제일미라고 불리는 풍월의 미색이 오늘따라 더욱 화사하게 돋보여서 그렇군.”
이런 대화를 나누며 술 몇 잔을 주고받았다. 그러는 중에 다른 방에서 기다리던 양반들이 좌석으로 와서 합류했다. 전에 농장으로 왔던 양반도 있고 처음 보는 양반도 있었다.
그들과도 술잔을 나누다가 민택선에게 물었다.
“바둑을 둔다고 해서 왔는데.”
“아, 그렇군요. 그런데 어쩌죠? 두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은데.”
최인범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민 진사에게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바둑실력들은 민 진사님과 어떤 정도인지요?”
“실력은 저보다 조금 아래라고 봐야죠. 왜 실력이 너무 모자라 바둑을 두기가 싫은가요?”
“아닙니다. 전에 약속을 했으니 둬야죠. 다만 제가 어디를 가야 하기 때문에 오늘 밖에 시간이 없어요. 그러니 조금 이상하겠지만 바둑판을 여러 개 준비해 다면기를 두면 어떤가 합니다.”
“다면기라면?”
“간단하게 설명해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사람과 대국하는 겁니다. 조금 허술한 바둑이 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서 모든 분들께 대국을 해드리고 싶군요.”
이런 말에 민 진사의 얼굴이 환해지며 즉시 답했다.
“아하, 그런 좋은 방법도 있군요. 좋습니다. 그렇게 두도록 하죠. 그런데 그냥 두기는 뭐하니 작은 내기라도 하는 것이 어떤지요?”
“면포를 거시게요?”
“예, 다면기니 면포를 각기 50필씩만 걸죠. 어떻습니까? 그런 정도면 적당하다고 봅니다. 치수는 최 사정은 이제 경북최고수이시니 저는 2점 접바둑으로 두고 다른 사람은 3점 접바둑으로 정하고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다면기의 경우 보통 6명까지 동시에 두기 때문에 최인범도 6명과 동시에 두기로 했다.
대충 반타작을 해도 따고 잃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졸지에 술상은 옆으로 치워지고 바둑판이 6개가 놓였다. 그러자 민택선이 또 다른 제안을 했다.
“내가 예천에서 배운 것인데. 바둑을 빨리 두기 위해 기녀들에게 창을 부르게 하더군요. 창의 한 소절이 끝나기 전에 둬야 하는 방법이죠.”
“뭐! 저야 어찌 되던 상관은 없습니다.”
1년의 세월이 지나서 그런지 초읽기로 두는 대국방식이 경상도 북부지역에는 널리 퍼졌다.
정상적이라면 많은 돌을 깔고 둬야하는 바둑이다.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2점이나 3점을 두고 두는 바둑이라 대국은 너무 빠르게 진행되었다.
순장바둑은 미리 화점에 많은 바둑돌을 깔고 둔다. 그 때문에 하수인 양반들이 자신의 세력권으로 침입하면 겨우 두어 집 내고 살게 되고 외벽은 철벽으로 변하게 하는 수순으로 진행했다.
“어! 바둑이 왜 이렇게 변한거지?”
이런 소리를 토할 때는 이미 판은 상당히 기울어진 뒤다.
화점 정석은 기본적인 침투 수 보다는 협공의 공격이 변화가 많다. 그러다 보니 변화무쌍한 협공 작전에 양반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옆에서 들리는 창 소리에 놀라 엉겁결로 바둑을 두었다. 또는 남들이 두는 바둑에 정신이 팔려 정신없이 두다보니 양반들의 대마가 죽어 갔다.
“졌습니다.”
또는 작은 집에 연연하다가 중앙에 놓인 돌 때문에 세력으로 크게 밀렸다. 거대한 집을 중앙이나 변에 만들어주어 일방적인 바둑으로 변했다.
그에 비해 최인범은 기묘한 방법으로 화점 정석을 두어 상대방을 철저하게 농락했다. 비교적 변화가 적은 화점 정석이지만 그래도 변형된 정석은 수없이 많았다.
오랫동안 극동지역의 많은 바둑 고수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탄생한 정석들이라 유불리에 대한 검증은 이미 끝난 상태다.
그렇게 되자 중앙에 깔아 놓은 몇 개의 돌들은 어느새 무용지물이 되어 자연사해 버리는 형태로 대국은 끝났다.
“끝내기를 하시겠습니까?”
“아니요. 끝내기는 무슨 30집 이상 차이가 나는데요. 그만 접읍시다.”
하나 둘 기권을 하거나 때로는 고집스럽게 계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다면기인 대국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끝나고 있었다.
결국 민택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최인범을 쉽게 보고 상대하다가 초반에 대마가 죽거나 큰 집을 만들어 주게 되어 대부분 기권해 버렸다.
여러 명의 기생들이 크게 소리 내어 창을 부르자 다소 소란하던 기방이다. 대국들이 의외로 빨리 끝나버리자 결국 민택선만 끝까지 남아서 바둑을 두었다.
최인범은 마지막 남은 바둑을 두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판까지 이겨? 말아!’
잠시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래도 지도 대국을 주선해 준 보답은 해야 된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결심하고 대국에 집중해 적당한 크기의 돌을 죽이는 방법으로 패했다. 정확하게 자신이 5집을 지도록 유도해 버린 것이다.
대국이 모두 끝나자 바둑실력은 3-4급에 불과하지만 눈치야 9단인 민택선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 이제 보니 최 사정도 남의 사정을 봐주는 때도 있군요.”
“아닙니다. 오늘 대국은 너무 잘 두셨습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정말 고맙소. 오늘 술값은 내가 내도록 하죠.”
젊은 사람이 ‘바둑을 잘 두면 얼마나 잘 두려나?’하고 내기를 걸며 덤비던 하수인 양반들은 먼저 나간다고 하나둘 일어나 사라졌다.
“다음에 만나죠.”
“예,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면포를 많이 딴 최인범이야 당연히 재미있게 놀았다. 하지만 허술하게 생각하고 덤비다 면포를 잃은 양반들이야 무척이나 속이 쓰렸다.
‘내가 앞으로 내기바둑을 두면 이름을 갈지.’
이름이야 바꾸지만 성이야 족보를 중시하니 바꿀 수는 없었다.
이렇게 다짐하지만 내기바둑이란 본시 도박과 같았다. 한번 두기 시작하면 쉽게 끊기 어려운 심한 중독성을 지녀 중단하기 어렵다.
최인범의 배려로 면포 50필을 따게 된 민택선은 술값과 화대라고 하며 면포 20필을 기방 주인에게 넘겨주고 조용히 떠났다.
다들 기방에서 떠나자 최인범도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저고리의 뒤가 당겨서 일어날 수 없었다.